< [제9장] 내공수 3 >
“후후후! 벙어리는 아니었구나. 잠시 기다려라. 박 채주 이 친구를 쓰러뜨린 후 네년을 데리고 막사로 갈 테니까.”
장강염라가 여유 있는 표정으로 백리설아를 쳐다봤다.
백자안과의 대결은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벌써 이긴 것 같았다.
백리설아가 탄식했다.
자신을 막사로 데려간다는 의미를 모를 그녀가 아니었다.
자신을 두고 대결을 벌이는 두 사람 중 누가 이겨도 그 결과는 같을 것이었다.
다만 증오의 감정은 당연히 장강염라에게 집중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손에 대륙표국 쟁자수와 표사 백여 명이 몰살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악양 인근에 다른 표물을 운송하려고 와 있지 않았으면 그녀가 직접 군량미를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모두 나의 경험 부족이다. 도중에 적의 공격을 받을 것을 대비해 고수들을 좀 더 보충해야 했다. 운반로 역시 철저히 보안에 부쳐 놈들이 그 경로를 알 수 없게 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그녀가 표행에 직접 관여한 지는 아직 일 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빈틈이 없었다.
사실 이번에 그녀와 함께 표행에 나섰던 표사들의 무공은 매우 뛰어났다.
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수적들의 무공 수위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 문제였다.
표사들은 수적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특히 장강염라의 무공은 경악할 정도였다.
지금 그녀가 가장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믿고 따르던 표국 사람들의 죽음이었다.
‘차라리 그분들을 살리고 내가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내 어찌 그분들의 가족을 볼 낯이 있단 말인가.’
백리설아가 눈물을 흘렸다.
장강염라가 흠칫했다.
“어찌 우는 것이냐? 나는 너를 취한 후에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내 첩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해주마. 어차피 천하는 우리 세상이 될 것이니까.”
“어서 대결을 시작하시오.”
장강수왕이 재촉했다.
“알겠습니다. 총채주님.”
장강염라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자안을 쳐다봤다.
백자안은 무심히 서 있었다.
하지만 방심은 하지 않았다.
일 검에 이백여 명의 수적을 베었다고는 하지만, 지금 상황은 또 달랐다.
상대는 원래 절정고수급 고수였다. 내공수 덕분에 거기에서 열 배 이상 무공이 강해진 자였다.
자칫 실수하면 자신이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하하! 같은 편끼리 죽일 수는 없고 간단하게 장력 대결로 승부를 보지. 어떤가?”
“좋소.”
백자안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육합장을 펼칠 생각이었다.
육합 계열 무공은 흑도 인물들도 대부분 익히고 있는 것으로, 부담 없이 펼칠 수 있었다.
“하하하!”
장강염라가 호쾌하게 웃으며 일장을 날렸다.
여전히 총채주 자리에 대한 열망이 있는 그였다.
채주와 장로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단 일장에 이기는 것이 필요했다.
반면 백자안은 내공의 양을 적절하게 줄였다.
마음 같아서는 장강염라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의심을 살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 내공수와 화약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지금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쏴아아.
백자안이 장풍을 날리자, 장강염라가 날린 염라장(閻羅掌)과 부딪혔다.
꽈앙.
대청 전체가 떠나갈 듯한 폭음과 함께 한 사람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윽!”
사람들이 놀라서 보니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장강염라가 쓰러져 있었다.
그의 배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피가 철철 흐르고 내장 부스러기가 흘러나와 있는 그는 이미 즉사한 후였다.
의외의 사태에 대청 안이 일순 적막에 휩싸였다.
아무도 예상 못 한 결과였다.
백자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는 장강염라가 자초한 일이었다.
그가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백자안을 죽이려 했던 것으로, 이에 반응해 백자안 역시 내공을 더 높일 수밖에 없었다.
“유감입니다. 염왕채주가 살공을 먼저 펼쳐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백자안이 장강수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장강수왕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백자안이 보여준 무공은 충분히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백자안이 그나마 장강염라를 죽일 수 있는 수준만 내공을 끌어올린 결과였다.
“하하하. 박 채주! 걱정하지 마시오. 모두가 보았소. 장강염라 이 친구가 먼저 박 채주를 죽이려 한 것을 말이오. 무공 대결 중에 죽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니, 이번 사건은 불문에 부치도록 하겠소. 다만 지금은 대전투를 앞두고 있으니 염왕채 병력은 내가 거두도록 하겠소. 염왕채 부채주가 여기 있었던가?”
“네. 여기 있습니다. 저희 염왕채는 총채주님의 휘하로 들어갈 것입니다.”
“하하하! 고맙소. 채주끼리 정정당당한 대결을 벌인 결과는 복수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장강수로채의 관례이니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오. 아, 그리고 저 계집은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 같으니 차라리 내게 넘기는 것이 어떻겠소?”
장강수왕이 백자안을 쳐다봤다.
백자안은 지금 일부러 몸을 조금씩 떨고 있었다.
아무리 내공수 덕분에 무공이 높아졌다고 해도 용왕채는 십팔채에 들지도 못하는 수채였다.
더 이상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박 채주! 내상이 중한 것 같구려. 혹시 잠력이라도 폭발시켰소?”
“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선천진기까지 사용해 자칫 주화입마될 뻔했습니다. 막사로 돌아가 쉬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그럼 아까 내가 말한 대로 저 계집은 내게 넘기는 것이오?”
장강수왕이 탐욕의 눈빛을 발했다.
‘박무 저놈의 무공이 저렇게 높아졌다니. 믿을 수 없구나. 그대로 내버려두면 내 자리를 위협할 가능성이 크다. 백리설아 저 계집을 내게 양보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니, 그걸 빌미로 이참에 죽여야겠군.’
백자안을 죽인 후 핑계 댈 것은 매우 많았다.
간단하게 하극상을 저지른 죄를 처벌했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장강수로채에 이렇다 할 규율이 있는 것도 아니고 총채주의 말이 곧 법이었다.
사실 십팔채에 들고 안 들고의 차이는 매우 컸다.
따라서 하극상으로 몰아붙여도 할 말은 없는 것이다.
백자안이 말했다.
“총채주님. 저 계집은 이제 제 것입니다. 총채주님께 드릴 수는 없습니다. 조금 전에 하신 말씀과도 틀리지 않습니까?”
“하하하. 오해하지 마시오. 나는 분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잠시 저 계집을 데리고 있겠다는 것이오. 계집 하나 때문에 벌써 채주 한 명이 목숨을 잃었소. 다음 차례는 박 채주가 될지 누가 알겠소? 무엇보다 지금은 전쟁 중이오. 계집 하나 때문에 대사를 그르쳐서야 하겠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총채주님이라도 저 계집을 데려가려면 저와 싸워 이기셔야 합니다.”
백자안이 다시 내공을 끌어올렸다.
장강수왕이 무형의 기세에 눌리는 느낌을 받고 흠칫했다.
‘저놈이 일부러 내상을 입은 척했구나. 일단은 지켜봐야겠다. 나중에 기회를 노려 독살을 하는 것이 좋겠군. 그대로 계속 놔두면 내 등에 비수를 박을 놈이다. 총채주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하더니 저런 실력까지 갖고 있었을 줄이야.’
장강수왕이 다시 한번 껄껄 웃었다.
“하하하! 좋소. 박 채주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뜻대로 하시오. 벌써 새벽이 다 되어가니 어서 계집을 데리고 가서 만리장성을 쌓도록 하시오. 여러분도 모두 돌아가서 자도록 하시오. 백자안 그놈은 아마 오지 않을 것 같소. 나중에 내공수를 받을 때 다시 보도록 합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청 안에 있던 지휘부 고수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백자안은 대청 안에 있던 용왕채 장로 두 명의 도움을 받아 백리설아와 백풍을 데리고 막사로 향했다.
그들이 간 곳은 용왕채 지휘막사로 바로 용왕채주가 머무는 곳이었다.
오백여 명의 용왕채 수적들은 지휘막사 주위에 모두 각각 막사를 치고 있었다.
막사들이 쳐진 곳은 관아의 대연무장이었다. 그곳은 지금 수적들의 막사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래서 대다수 수적은 빈 전각 안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었다.
“다들 돌아가게.”
지휘막사 안으로 들어온 백자안이 장로들에게 명했다.
“네. 채주님. 이자는 데려갈까요? 뇌옥으로 사용할 막사가 옆에 있으니 그 안에 가둬놓으면 될 겁니다.”
장로들이 말한 사람은 바로 백풍이었다.
지휘막사로 오는 도중 백자안은 암암리에 진기를 그에게 넣어줘 회복을 돕게 했다.
그 때문인지 백풍은 지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백자안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직 해가 뜨려면 한 두 시진은 있어야 했다.
그동안 자신과 백리설아 두 사람만 있게 된다면 나중에 안 좋은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풍을 그대로 두는 것도 문제였다.
자칫 의심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사천사자들이었다.
섭혼술을 통해 내공수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사천사자이며 그들의 수가 백 명이라는 것까지는 알아낸 그였다.
“옥막사에 가둬 두게. 고문은 내가 직접 할 것이니 절대 손을 대지 말게. 물과 식사도 충분히 주고 말이야. 내 명을 어길 시에는 모두 목을 벨 것이다. 알겠느냐?”
“존명!”
“존명!”
장로들이 백풍을 데리고 지휘막사 밖으로 나갔다.
이제 남은 사람은 백자안과 백리설아 두 사람뿐이었다.
“내 몸에 손을 대면 혀를 깨물고 죽을 것이다.”
백리설아가 몸을 웅크리며 백자안을 노려봤다.
백자안의 손에 장강염라가 죽었을 때는 그녀 역시 통쾌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의 청백지신이 더렵혀질 위험에 처한 것이다.
백자안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으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장강염라 그놈과 싸우다 입은 내상이 너무 깊어 회복운공부터 해야 할 것 같으니까. 네년과의 합방은 내일로 미루겠다.”
“······.”
백리설아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백자안이 일부러 피를 한 모금 토하자 그제야 믿는 표정이었다.
사실 내상이 심한 상태에서 방사를 치르면 돌연사할 가능성이 높았다.
백자안이 무명심법을 운공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짧은 시간에 여러 사건이 일어나 마음이 어지러운 상태였다.
무엇보다 연락이 끊긴 설중화에 대한 걱정이 컸다.
‘성 밖으로 나가다가 적의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장강수왕은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혹시 그 사천사자란 놈들에게 걸린 게 아닐까.’
박무의 기억상으로 사천사자들의 무공은 한 차원 높은 것이었다.
아무리 내공수를 먹어도 그들을 당해낼 수 없다는 기억을 읽은 것이다.
‘날이 밝으면 내공수를 준다고 했으니 그때 그들을 볼 수 있겠군.’
한편 백리설아는 눈을 똑바로 뜨고 있으면서 경계를 놓지 않았다.
백자안이 회복운공을 마치고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백자안 역시 눈을 감지 않고 반개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한 시진 정도 후면 날이 밝아올 것이었다.
백리설아에게는 그 시간이 너무 길었다.
‘날이 밝으면 반드시 나를 구출하러 사람들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내 몸을 지켜야 한다. 다행히 저자가 내상이 심해 시간을 벌었구나.’
백리설아가 안도의 한숨을 쉴 때.
백자안이 가부좌를 풀었다.
벌써 회복운공을 마친 것 같았다.
백리설아가 안색을 굳혔다.
“다시 말하지만 내 몸을 건드리면 혀를 깨물고 죽겠다.”
백자안이 안색을 굳힌 채 말했다.
“백리 소저. 안심하십시오. 믿기 어렵겠지만 저는 무림맹에서 온 사람입니다. 용왕채주 박무란 자로 지금 역용하고 있지만, 사실은 무림맹 무사 백자안이란 사람이지요.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백리 소저께 사실을 밝히는 게 나을 것 같아 이렇게 제 정체를 밝히는 겁니다.”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것이냐?”
백리설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백자안이 빠르게 역용을 풀어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고 다시 박무의 얼굴로 돌아갔다.
놀라운 역용술이었다.
“정말 천년색마를 제거한 백자안 대협이신가요?”
백리설아의 음성이 부드러워졌다.
백자안의 눈빛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나 반가워하는 눈빛이었다.
백자안이 백리설아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이러면 믿겠습니까? 저는 성 밖 토벌군 진영에 있다가 정탐을 위해 성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다 뇌옥에 갇힌 분들을 구출하기 위해 관아까지 온 것이지요.”
백자안이 자초지종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백리설아가 생각보다 빨리 수긍했다.
“어쩐지 운공하는 모습이 범상치 않다고 느꼈어요. 절대 흑도의 기운이 아니었지요. 절 구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장강염라 그놈에게 끌려갔더라면 지금쯤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예요.”
백리설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대륙표국 소국주 백리설아 은공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제9장] 내공수 3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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