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장] 흡수대법 3 >
용봉대회 비무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첫 시합을 필두로 네 번의 비무가 빠르게 이어졌다. 네 명의 승자가 정해졌다.
오늘 본선에 오른 참가자는 모두 여덟 명.
이중 일승을 거둔 사람에게는 최종 네 명에 뽑히는 영광이 주어졌다.
영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상금 때문이었다.
각 등수에 따른 상금이 책정되어 있었다. 그 최소한의 등수가 4위였다.
하지만 대결 방식상 3, 4위는 따로 구별하지 않고 준결승에서 탈락할 참가자 두 명을 공동 3위로 인정해주었다.
3위 상금은 은자 백 냥이었다.
2위는 은자 오백 냥이었으며, 대망의 우승자는 은자 천 냥이었다.
물론 상금만을 보고 참가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보다 용봉대회 우승자라는 영예가 평생 뒤따르기 때문에 수많은 무인이 참가했다.
사실 오늘 여덟 명이 겨루는 본선에 올라온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예선전에 지원한 무인의 수만 오백 명이 넘었다.
따라서 비록 상금은 없어도 본선 진출자라는 사실만으로 나중에 유명 무관에서 초빙하기도 했다.
둥둥둥!
“일차 비무가 끝났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이차 비무가 있겠습니다. 참고로 남은 시합은 준결승 두 시합, 그리고 결승 한 시합입니다.”
담대선생이 능숙한 말솜씨를 뽐내며 휴식 시간을 알렸다.
휴식 시간에는 간단한 술과 떡이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구경하러 온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한 모금의 술과 떡 한 조각이 전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단상 위에는 잘 차린 음식들이 제공되었다.
“하하하! 이번 대회에도 무공이 고강한 참가자들이 많구려. 우 대협께서는 눈여겨본 참가자가 있소?”
“네. 매화선자(梅花仙者)라는 참가자가 눈에 띄는군요. 면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으나 나이가 많지 않은 소저로 보입니다. 무공이 매우 뛰어난 것 같습니다.”
“오! 저와 보는 눈이 같군요. 검법이 낯이 익은데 혹시 화산파가 아니오?”
“성주님의 안목이 대단하시군요. 맞습니다. 화산파의 기본 절기인 매화검법(梅花劍法)을 구사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화산파 여제자 중 한 명으로 생각됩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화산파 여제자 중 별호를 들어본 사람은 화산옥녀가 유일하오. 아, 그랬지. 백 무인께서 화산옥녀의 정혼자라던데 그게 사실이오?”
유관성의 말에 백자안이 흠칫했다.
자신과 화산옥녀의 정혼 사실이 성주 귀에까지 들어갔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어쩌면 이미 화산파 장문인의 귀에도 들어갔을지 모르겠구나. 오해를 사지 않아야 할 텐데······.’
백자안이 씁쓸해했다.
사실 일반적으로는 정혼녀를 만나러 갈 때 조금이라도 마음이 설레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무림삼미 중 한 명으로 경국지색의 미녀가 아닌가.
무림삼미는 비록 정파 위주로 선정된 것이긴 하지만 수없이 많은 미인 중에서 단 세 명안에 드는 절세미인이었다.
그런 미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사내라면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주님. 오라버니가 화산옥녀와 정혼한 것은 맞지만 어른들의 약속이었을 뿐이에요. 사실 화산파에 들르는 것은 파혼 때문이랍니다.”
“파혼? 누가 파혼을 한단 말이오?”
“그야 화산파 측이지요. 그쪽에서 우리 집안이 아무 배경이 없다고 알량한 추천장 하나 써주고 파혼을 강요하고 있답니다. 오라버니는 부모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게 되었고요. 아무리 화산파라지만 너무한 게 아닌가요?”
백소영이 불만을 토로했다.
유관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이 있었소? 나는 전혀 몰랐소이다. 다만 두 사람이 정혼을 했다기에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리라 생각했소. 사실 백 무인 정도면 아무리 배경이 없어도 좋은 신랑감이 될 수 있을 것이오. 아마도 파혼 이야기는 백 무인이 명성을 얻기 전에 나온 것 같구려. 내 말이 맞소?”
“네. 사실 그렇긴 해요. 혹시 또 모르죠. 오라버니 명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으니 마음을 바꾸려 할지. 사실 직접적으로 파혼 이야기는 없었으니까 말 바꾸기는 아닌 셈이지요. 뭐 그때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오라버니 마음이 중요하겠지요.”
“소영아. 됐다. 그만해라.”
백자안이 눈짓을 주었다.
그는 더는 불필요한 소문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유관성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렇다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려. 내게 만약 여식이 있다면 백 무인 같은 젊은 영웅에게 시집보내려 했을 것이오. 다만 듣고 보니 화산옥녀에게 다른 혼처가 있는 것 같소. 담대선생. 혹시 화산옥녀의 혼담에 대해 들은 것이 있소?”
유관성이 담대선생을 바라봤다.
담대선생은 장사성의 총관으로 천하 각지에서 일어나는 일의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천하 각 지역에 관청이 없는 곳이 없기에 그 정보력은 대단했다.
“한 가지 소문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 그게 무엇이오? 어서 말해보시오. 백 무인께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최근 화산파에 천하제일가 총관이 다녀갔다고 합니다.”
“아!”
“천하제일가!”
단상에 있던 사람들이 탄성을 내었다.
우문호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천하제일가라면 무적세가(無敵世家)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무적세가주 독고승(獨孤勝)은 십 년 전 혈교와의 전쟁 때 혈교주 혈마(血魔)의 목을 베어 천하에 명성을 떨쳤지요. 그 덕분에 전쟁이 종료되었고, 평화가 찾아왔지요. 혈교와의 전쟁으로 무림맹 측 사망자만 만 명이 넘었으니, 계속 전쟁이 이어졌다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을 겁니다.”
담대선생의 말에 귀빈들이 하나같이 안색을 굳혔다.
안색을 굳힌 것은 그만큼 혈교와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가 컸던 탓이었다.
백자안 역시 열세 살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영웅무관에 들어간 지 일 년 정도 되었을 때였다.
전쟁이 발발하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무관 제자들 역시 속속 참전하고 있었다.
물론 무공이 어느 정도 되는 관원들 중심이었다.
사범들 역시 무관연합회의 결정으로 의무적으로 참전했다. 당시 영웅무관 사범만 세 명이 전사했었다.
백자안은 너무 어리고 기초도 부실해 그냥 매일 전해져 오는 승전과 패전 소식에 기뻐했고 두려워했다.
‘정말 비상시였지. 낙양이 공격받지 않아서 그나마 나는 별 탈이 없었지만, 전 무림이 단결해 혈교의 침략을 막아낸 기억이 난다. 숙부님도 대륙표국의 표사 자격으로 몇 달간 참전하셨지.’
가물가물한 기억이었지만 무림대란이 벌어지면 생활이 어떻게 변하는지 몸소 겪은 바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을 종료시킨 무적세가주 독고승의 이름은 당연히 그도 알고 있었다.
“무적세가라면 저도 귀가 따갑도록 들었어요. 휘하에 소속된 문파만 해도 삼백 곳이 넘는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백소영의 물음이었다.
평소 강호를 동경해 무림의 대소사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진 그녀였다.
담대선생이 아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그렇소이다. 무적세가주의 명성이 높아지자, 사람들은 다들 그가 무림맹주가 될 것이라 믿었소. 하지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견제로 맹주로 추대되지는 못했소. 이후 자연스럽게 세력을 키워 지금 그 힘이 무림맹과 맞먹을 정도요. 중도 성향의 문파 대부분이 무적세가가 주도하여 만든 단체인 정무련(政武聯)에 소속되어 있지요.”
“정무련주가 바로 무적세가주 독고승 그분이겠군요.”
“그렇소이다. 백 소저께서는 무림의 일에 대해 박식하군요.”
“과찬이세요. 한데 무림맹과 정무련의 힘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나요? 아까 맞먹는다고 하셨는데 궁금해서요.”
“하하하. 그래도 무림맹이 더 강하지요. 맞먹는다는 표현은 좀 과장되었소. 정무련의 힘은 무림맹 절반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오.”
“화산파 입장에서는 무적세가와 사돈을 맺으면 엄청나게 도움이 되겠군요. 그야말로 최고의 배경이라 할 수 있으니까.”
“당연하오. 화산파와 무적세가의 혼담이 사실이라면 애석하게도 백 무인에게 기회는 없을 것이오. 하하하, 내가 너무 냉정하게 말했나. 죄송합니다. 백 무인.”
“아닙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알아서 할 것이니, 이 정도로 해두지요. 무적세가주 독고 대협은 저 역시 존경하는 분입니다. 화산옥녀가 그 집안으로 시집가는 것은 환영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아, 이제 다시 시합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둥둥둥!
휴식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담대선생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무대로 향했다.
“준결승 첫 번째 시합은 매화선자와 은하검객(銀河劍客)의 대결입니다. 두 분은 어서 나오십시오.”
와아아.
짝짝짝.
엄청난 환호성과 박수와 함께 일남일녀가 비무대에 올랐다.
은하검객은 무림에 명성이 높은 은하산장(銀河山莊)의 대공자였다.
그는 삼 년 전부터 천하를 돌며 비무행을 해왔다.
그 결과는 모두 그의 승리였다.
그렇게 명성을 높인 그가 오늘 이 용봉대회에 참가한 것이었다.
그는 비교적 여유 있는 표정으로 삼장 정도 앞에 무심히 서 있는 매화선자를 바라봤다.
얼굴은 면사를 써서 알 수 없었지만, 그 몸매만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날씬하면서도 굴곡이 있어 청초함과 성숙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게다가 두 손을 비롯해 조금 드러난 피부는 마치 옥처럼 깨끗하고 탄력이 있었다.
그 때문에 아까부터 다른 사람들의 비무는 보지 않고 매화선자만 계속해서 보는 사람도 상당했다.
하지만 매화선자는 마치 얼음처럼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남자들의 시선 따위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오로지 시합에만 전념하고 있는 것이다.
“두 분은 성주님께 먼저 예를 표하십시오.”
은하검객은 물론이고 매화선자 역시 유관성을 향해 고개를 조금 숙였다.
얼마 후 고개를 들 때 그녀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바로 백자안이었다.
그녀의 면사 위로 드러난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저 사람이 내 정혼자라니. 공교롭게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천년색마를 죽일 정도면 무공이 매우 강하겠지만, 일부러 소문을 내 나와의 혼사를 이루려 한다면 오산이지. 천하제일가 대공자와 정략혼인을 하는 것도 싫지만 저렇게 얄팍한 수를 쓰는 사람은 더 싫다. 차라리 대회를 마치고 내가 직접 파혼을 통보하는 게 좋겠구나.’
매화선자, 아니 화산옥녀 악미미(岳美美)가 백자안을 잠시 주시했다.
순간 백자안의 눈과 마주쳤다.
백자안 역시 마침 악미미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
악미미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은하검객이 검을 뽑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악미미 역시 검을 들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검이었다.
그녀의 목표는 매화검법만으로 이번 용봉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동안 연마한 옥녀심공이 토대가 될 것이었다.
‘내 마음대로 가출을 한 셈이니 반드시 대회 우승을 하고 돌아가야 해. 안 그러면 아버지께서 혼내실 거야.’
악미미가 문득 한 달 전 일을 떠올렸다.
그날도 옥녀봉에서 수련하고 있는데 부친인 매화검선이 올라왔다.
처음 보는 중년인 한 명과 함께였다. 그는 자신을 무적세가 총관으로 소개했다.
그가 온 이유는 혼담을 넣기 위해서였다.
그 자리에서 총관은 다른 사람과 혼약을 한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매화검선은 수십 년 전 백청과 약속한 일을 솔직히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백자안과 파혼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다.
무적세가 총관은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갔고, 파혼이 되는 대로 정식으로 혼사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 과정에 악미미의 의사는 무시되었다.
아니 평소 남자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 질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답답해져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화산을 떠난 것이었다.
“대결을 시작하시오!”
담대선생의 말과 함께 악미미와 은하검객이 움직였다.
< [제6장] 흡수대법 3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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