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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적 반로환동-15화 (15/250)

< [제5장] 흑천방 3 >

백자안, 우문호, 설중화, 백소영 네 사람이 흑천방 장사지부에 도착한 것은 해 질 무렵이었다.

왕해는 직접 대문 밖까지 나와 있었다.

흑천방 무사 수십 명이 두 줄로 도열해 나팔을 불었다.

뿌우우.

“하하하! 어서들 오십시오. 우 대협께서도 오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영광입니다.”

왕해가 포권을 하며 백자안 일행을 반겼다.

마중 나온 사람 중에는 흑천방 장사지부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대략 삼십여 명 정도.

다들 기도가 강한 것이 고수로 보였다.

흑천방 고수들이 대부분 낙양에 있다던 우문호의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왕해의 말에 우문호가 물었다.

“우리 말고 다른 손님도 계십니까?”

“네. 우 대협께서 직접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근의 주요 인사들이 대거 왔습니다. 아, 물론 백 무인을 보고 싶어 하는 분들이기도 합니다. 이번 기회에 두 분과 안면을 트고 싶어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군요.”

우문호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설중화와 백소영은 반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외부 인사들이 있다면 공개적으로 백자안 일행을 공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원래 계획이 어땠는지는 모르나 위험요소는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백자안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소리장도(笑裏藏刀)라 했다. 웃음 속에 칼이 있는 법이지. 아직은 모른다.’

얼마 후 도착한 대청 안에는 백여 명의 무림인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로 백자안 일행을 환영했다.

짝짝짝!

뜻하지 않은 환대에 우문호 역시 당황한 듯 포권으로 답례했다.

백자안과 설중화, 백소영 역시 그를 따라 포권했다.

왕해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어서들 앉으십시오.”

“감사합니다.”

백자안 일행이 상석에 마련된 빈자리에 착석했다.

탁자에는 산해진미가 차려져 있었다.

“먼저 소개부터 있겠습니다.”

왕해가 백자안 일행을 사람들에게 일일이 소개해주었다.

“장사성 제일고수이자 무림맹 장사지부장인 우문호 대협이십니다.”

“천년색마를 비롯해 색마 백여 명을 일 검에 죽여 강호를 진동시킨 신진영웅 백자안 무인이십니다.”

“무림맹 와룡대원 설중화 소저이십니다.”

“절세미인인 이분은 백 무인의 친여동생 백소영 소저이십니다.”

둥둥둥.

은은한 북소리와 함께 한 사람 한 사람 소개가 있을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흑도 방파 고수들이 열렬히 환대했다.

곧이어 흑도방파 고수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예상대로 대부분 장사성 내 흑도방파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그중 상당수는 우문호도 아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생소한 인물도 많았다.

그 기도 또한 범상치 않았다.

‘절정급 고수들이 여럿 있다. 저들 모두가 우리를 공격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겠구나.’

백자안이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다소 지루했던 소개가 끝나고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자, 모두 건배부터 합시다. 백 년 묵은 도화주를 특별히 준비해왔으니 마음껏 드십시오.”

왕해가 먼저 잔을 비웠다.

사람들이 일제히 잔을 들어 마셨다.

백자안 일행은 조금 늦게 마셨다. 우문호가 손가락을 술에 조금 담가 독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실 수 있었다.

이후는 각종 요리들을 먹는 시간이었다.

언제 준비했는지 아름다운 무희들의 춤까지 있었다.

음식들을 하나하나 점검하던 우문호도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마음껏 먹었다.

백자안과 설중화, 백소영도 그를 따라 각종 요리를 즐겼다.

고급 객잔에서나 맛볼 수 있는 진귀한 음식이 많았다.

잔뜩 경계하던 백자안 조차 긴장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대청에 있던 흑도방파 고수 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 영웅들이 모였는데, 백 무인의 무공을 한번 견식하고 싶습니다. 다른  분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찬성이오!”

“찬성이오!”

분위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일까.

박수가 터져 나왔다.

왕해가 백자안을 보고 물었다.

“백 무인. 가볍게 한 수 정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아직 내상 회복이 덜 되어 어렵겠군요.”

백자안이 정중히 거절했다.

정파 쪽 사람들의 연회였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흑도의 연회였다.

물론 흑도라 하나 실질적으로 중립적인 방파도 많았다.

하지만 흑천방과 교류를 하는 방파가 대부분이라 구린 구석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왕해가 웃으며 말했다.

“백 무인께서 내상을 입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니, 그만 독촉하시오. 차라리 무림백대고수 중 한 분인 우 대협께 부탁드리는 것이 좋을 듯하오.”

와아아.

짝짝짝.

우문호로서는 사양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백자안처럼 내상을 입은 것도 아니었다.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 성의를 보여야 체면에 맞았다.

“좋습니다. 그럼 부족한 실력이지만 한 수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우문호가 대청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청동향로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청동향로가 매우 커서 그 무게가 상당할 것 같았다.

대략 어른 열 명을 합친 무게 정도.

우문호는 손짓 하나로 그 청동향로를 들어 올렸다.

허공에 떠오른 청동향로는 그 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대단하군!”

“역시 절정고수란 말인가!”

이윽고 청동향로가 회전을 멈추고 다시 바닥에 내려앉자,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우문호가 포권으로 답례했다.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한 빼빼 마른 노인 한 명이 코웃음을 쳤다.

“흥! 저 정도가 뭐 대수라고. 장사성 제일고수가 저것밖에 안 된다는 말인가.”

“귀하는 뉘시오?”

우문호가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노인은 아까 있었던 주요 인사 소개에서 빠졌던 인물이었다.

“노부는 흑천방의 식객이오. 고목노인(古木老人)이라 하오.”

“고목노인?”

우문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들어보는 별호였다.

고목노인이 다시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한 수 지도를 받을 수 있겠소? 귀하가 정말 장사성 제일고수라면 나 같은 무명소졸은 쉽게 이겨야 하지 않겠소?”

“흥! 작정하고 시비를 거는군.”

우문호가 냉소했다.

왕해가 안색을 굳혔다.

“고목노인! 우 대협께 더는 실례를 마시오. 오늘 이 자리는 백 무인과 우 대협을 환영하는 게 목적이니, 비무는 적합하지 않소.”

“하하하! 알겠소이다. 식객 된 도리로 주인장의 뜻을 따라야하겠지요. 다만 우문호 저자의 배포가 계집보다 약한 게 아쉬울 따름이오. 무림맹 장로 출신이라 해서 제법 영웅일 줄 알았소. 한데 나 같은 무명소졸까지 두려워해 몸을 사릴 줄이야. 명성이 잘 못 전해졌군.”

쿵.

“네놈이!”

우문호가 탁자를 내리치며 발끈했다.

“하하하. 그래야 사내지. 내 도전을 받아주겠소? 미리 말씀드리지만, 노부의 도전은 단순히 호승심에 따른 것으로 여기 계신 왕 지부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소이다.”

“좋다. 도전을 받아주지.”

우문호가 대청 중앙으로 나왔다.

다소 흥분해 보였지만 여전히 침착한 걸음걸이였다.

백자안이 옆에 있는 설중화에게 전음을 날렸다.

「제가 보기에 우 지부장께서 함정에 빠진 것 같습니다. 말릴 수 없을까요?」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물릴 수 있겠어요? 저 또한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예요. 저 고목노인이라는 사람의 무공이 대단할 것 같아요.」

「하긴 무림인의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우 지부장께서 참기 어려우셨을 겁니다.」

백자안이 대청 중앙에서 대치하고 있는 우문호와 고목노인 두 사람을 쳐다봤다.

이미 무형의 기세 싸움은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 대결이 왕해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했지만, 분명 사주를 받았을 것이다. 결국 이게 노림수였단 말인가.’

백자안이 걱정했으나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였다.

우문호가 일장을 날렸다.

쏴아아.

가벼운 장세로 보였으나 우문호로서는 전력을 담은 공격이었다.

조금 전 기세 싸움에서 상대의 공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고목노인이 피하지 않고 장력을 날려 맞받아쳤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윽!”

입가에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고 있는 사람.

바로 고목노인이었다.

장력 대결에서 단번에 내상을 입은 것이다.

“으으······ 역시 장사성 제일고수답군. 노부가 패했소. 왕 지부장을 볼 면목이 없으니 지금 바로 떠나겠소. 며칠 동안이지만 식객으로서 편히 쉬다가 가오.”

고목노인이 왕해를 향해 포권한 후 대청 밖으로 나가버렸다.

짝짝짝.

사람들이 승리한 우문호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우문호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저자의 장세에 독이 들어있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중독이 되고 말았구나.’

우문호가 중독된 사실을 내색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중년 사내 한 명이 다가왔다.

“본인 역시 흑천방의 식객으로 철무객(鐵武客)이라 하오. 한 수 가르침을 부탁드리오.”

우문호가 승낙도 하기 전에 철무객이 주먹을 날렸다.

“흥!”

우문호가 코웃음을 치며 신형을 비틀어 피했다.

하지만 중독된 여파로 내공 배출이 원활하지 못해 반격이 늦어졌다.

그 틈을 노린 철무객이 소매 속에 감췄던 강침을 날렸다. 하지만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우문호의 팔꿈치에 턱을 얻어맞고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퍽.

“크윽!”

철무객이 비틀거리며 일어난 후 그 역시 식객 생활 종료를 고한 후 대청 밖으로 나갔다.

우문호는 또다시 상처를 입고 말았다.

철무객이 날린 강침이 오른쪽 어깨에 깊숙이 박히고 만 것이었다.

너무나 작은 침이라 사람들이 보지 못했지만, 오른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큰 부상이었다.

우문호는 체면을 의식해 이번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하하하! 식객들의 호기가 대단하구려. 시간도 늦었으니 우리는 이만 가볼까 하오.”

“우 대협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들이 명성을 탐해 무모한 도전을 한 것 같은데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왕해가 고개를 숙였다.

우문호 역시 이제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자리라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백자안과 설중화, 백소영도 떠날 준비를 했다.

웃고 떠든 자리였으나 적지나 마찬가지였다.

“백 무인께서는 좀 더 있다가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대로 대접을 못 해 드린 것 같은데······.”

왕해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잘 먹고 갑니다. 그럼.”

백자안이 포권한 후 우문호, 설중화, 백소영과 함께 대청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복면을 썼는데 모두 백여 명이었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소리쳤다.

“백자안! 우리는 천년색문 문도들이다. 네놈을 죽여 돌아가신 문주님의 복수를 하겠다. 물론 동료들의 복수도 해야겠지. 무림 관례에 따라 생사결을 제의한다.”

“천년색문 잔당들이에요!”

설중화가 검을 뽑았다.

백소영 역시 엉겁결에 검을 뽑았다.

“꼼, 꼼짝 마라.”

엉뚱한 소리가 나왔지만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왕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초대도 받지 않고 이렇게 본방에 들어오다니! 이 무슨 짓이오? 하지만 문주의 복수를 하기 위해 생사결을 제의했으니 난처한 입장이오. 백 무인! 죄송하지만 저는 중립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흥! 왕해! 네놈이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나에게 상처를 입힌 후 백 무인을 제거하려던 계획이었군.”

우문호가 분노했다.

왕해가 펄쩍 뛰었다.

“우 대협.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저는 무림 관례에 따를 뿐입니다. 관례에 따르면 수장이 어떤 식으로든 죽게 되면 수하들이 복수할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그때 제삼자가 개입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일대일 대결을 해야지. 이렇게 떼거리로 덤벼서야 하겠어요? 오라버니! 그냥 가. 지금 보니 모두 한통속이야.”

백소영이 발끈했다.

내상 회복이 덜 된 몸으로 백자안이 백여 명의 천년색문 잔당을 상대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흑도방파 고수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왕해의 의견에 따른다는 묵시적인 동의였다.

“소영이 말이 맞아요. 백 무인. 그냥 돌아가요.”

설중화의 권유에 백자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잘되었습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저놈들을 이 자리에서 처리해야 합니다. 네놈들이 잔당 전부냐?”

“그렇다. 네놈 때문에 우리 문파는 쑥대밭이 되었다. 추적까지 당해 이렇게 얼굴을 가리고 있지. 어떻게 하겠느냐? 생사결을 받아들이겠느냐? 네놈이 우리 무사 백 명을 한 번에 죽인 적이 있으니, 비슷한 수인 우리 모두를 상대하는 것이 불공평하지는 않을 것이다.”

“좋다. 수락하지. 이곳은 좁으니 밖으로 나가자.”

< [제5장] 흑천방 3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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