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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적 반로환동-12화 (12/250)
  • < [제4장] 흑천사걸 3 >

    사흘 후. 장사.

    호남성 성도인 이곳 장사는 예로부터 사람과 물자가 풍부해 교통의 요충지였다.

    무림인도 상당히 많았다. 성 안의 무림방파 수만 해도 백 개가 넘었다.

    특히 하남성 낙양과는 거리도 적당히 떨어져 비교적 무림맹의 영향을 덜 받고 있었다.

    그 말은 흑도 방파들의 위세 또한 강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오 무렵.

    장사성 안으로 세 명이 들어왔다.

    하루에도 수천 명씩이나 출입하는 성문이라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하나의 깃발이었다.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은 지극히 아름다운 소녀였다.

    소녀의 미모 때문이라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깃발에 적힌 글자를 보는 순간 다들 놀라는 표정이었다.

    <일 검에 마적 백 명의 목을 베다.>

    사람 백 명의 목을 한 번에 벤다는 것은 그 상대가 사형수라고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마적 떼들이라니.

    최근 마적들의 흉포함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었다. 그 마적들을 백 명이나 일 검에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당연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깃발을 든 백의소녀 옆에는 뚱뚱한 소녀 한 명과 청년 한 명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소녀는 평범한 용모였다. 청년은 절세미남이라 할 수는 없으나 준수한 편이었다.

    한데 세 사람은 바로 백자안, 설중화, 백소영이 아닌가.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은 바로 백소영이었다.

    지난 사흘간 백자안이 이 깃발 문제로 그녀와 얼마나 많이 입씨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백소영은 요지부동이었다.

    깃발은 그녀가 손수 만든 것이었다.

    처음에는 백자안으로 하여금 들도록 했으나, 백자안이 말을 듣지 않자 자신이 직접 들고 가게 되었다.

    성안으로 들어서자 관도를 따라 무수히 많은 사람이 오갔다.

    백자안이 다시 한번 부탁했다.

    “소영아. 이제 좀 내리면 안 되겠냐? 그 깃발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설명을 해야 했느냐? 굳이 그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겠느냐?”

    “내 마음이야. 포상금 천 냥 중 절반인 오백 냥은 나한테 준다고 약속했잖아? 나는 내 나름대로 포상금을 확실히 받을 수 있는 작전을 수행하는 중이라고.”

    “어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느냐? 무림의 명성을 높여 내게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한다는 뜻은 좋다. 하지만 너무 노골적이지 않으냐? 설 대원께서는 웃지만 말고 제발 저 애를 좀 말려주십시오.”

    “호호호! 제가 간섭할 일이 아닌 것 같군요. 사실 백 무인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에요. 무림공적 천년색마를 죽인 일은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거든요. 아직 백 무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이런 식으로 알리는 것도 며칠 정도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죠? 언니. 설 언니는 자상해서 좋아. 나하고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어른 같아. 나도 얼굴에 철판 깔고 하는 일인데, 왜 굳이 쪽 팔리게 이런 짓을 하고 싶겠어? 오라버니가 내 인생 책임져 줄 것도 아니고. 그 돈 못 받게 되면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나 그러기 싫어.”

    백소영이 갑자기 눈물을 글썽였다.

    백자안의 마음이 다시 약해졌다.

    눈물은 그녀의 최대 무기였다.

    “좋다. 울지 마라. 그럼 나와 약속하자. 이곳 장사성에서만 그 깃발을 들기로. 하룻밤 묵고 갈 것이니,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좋아.”

    백소영이 다시 활짝 웃었다.

    하지만 하루만 든다는 것이 이번이 네 번째였다.

    “이번에는 약속을 지킬게. 그동안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던 길이라 효과가 미약했거든. 하지만 이곳 장사에서는 단 하루만 들어도 효과가 대단할 거야. 특히 객잔에서 대박날 것 같아.”

    “알겠다. 아, 그리고 무림맹 장사지부에서는 절대 들지 마라. 대부분 나의 상급자분들인데 어찌 이런 황당한 짓을 보여줄 수 있단 말이냐?”

    “알겠어. 내 목표는 객잔이니까 그 정도는 봐주지.”

    백소영이 웃으며 깃발을 더욱 높이 들었다.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아직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글을 잘못 쓴 것인가. 마적이 아니라 색마라 적었어야 했는데······.”

    백소영이 입맛을 다셨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들도 소문을 들었다. 대부분 천년색마가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는 다들 모르고 있었다.

    선인촌이 워낙 궁벽한 곳에 있었다. 그 소식을 전달한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백소영의 노력이 절대 헛된 게 아닌 것은 확실했다.

    무림맹 지휘부의 기득권 의식을 고려할 때 딴소리 못 하게 소문이 퍼지는 것은 사실 매우 유리했다.

    백자안이 극구 만류하면서도 강압적으로 깃발을 빼앗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백소영의 눈물겨운 노력이 그에게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설중화가 화제를 돌렸다.

    “백 무인. 내상은 많이 좋아졌나요? 정말 흑천사걸을 제거할 때 무공을 회복한 게 아니었나요?”

    “네. 내공 충돌 현상은 여전합니다. 다만 새로운 희망을 본 것은 사실입니다. 아직 너무 부족하지만 말입니다.”

    “아니에요. 비록 흑천일 그자가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일류고수였어요. 그런 자를 해치웠다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지요. 나머지 흑천사걸은 사실 무공이 별로였지만 말이에요.”

    “과찬이십니다. 이 모두가 설 대원 덕분입니다.”

    “호호호! 제가 뭐 해드린 게 있다고 그러세요? 아, 저기 객잔이 있네요. 요기라도 하고 지부에 가죠.”

    “네. 저희야 설 대원께서 가자는 대로 갈 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냐? 소영아.”

    “물론이지. 물주가 설 언니인데 무조건 따라야지. 언니! 나중에 포상금 받으면 모두 갚아드릴게요. 낙양까지 잘 부탁드려요.”

    “알겠어. 이래봬도 나 돈 많아. 부잣집 딸이라고. 호호호.”

    설중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줄곧 유쾌한 표정이었다.

    항상 긴장하며 대원들과 함께 바쁘게 움직이다가 이렇게 혼자가 되자 여유가 생긴 것이다.

    백소영이 백자안을 나무랐다.

    “오라버니! 난 오라버니가 어머니보고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완전히 속았잖아. 어떻게 한 푼도 없을 수 있어? 월봉 받은 것 다 어디에 썼어? 전부 다 집에 보내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럴 사정이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아마 까무러칠 거다. 그래서 말해주지 않는 것이다.”

    백자안이 말을 할 때.

    객잔 문밖까지 나와 있던 점소이 한 명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세분입니까?”

    “그렇소. 빈자리가 있소?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것이오?”

    백자안이 무림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객잔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보며 물었다.

    “아직 모르셨습니까? 내일 성주님 주최 용봉대회(龍鳳大會)가 열리기 때문이지요. 무림맹 장사지부에서 열리는데 모르셨습니까?”

    “금시초문이오. 설 대원께서는 아셨습니까?”

    “네. 용봉대회는 이곳 장사성에서 오년마다 한 번씩 개최되는 비무대회로 오랜 전통을 자랑하지요. 특이한 것은 주최자가 이곳 장사성의 성주님이란 거예요. 개최지가 무림맹 장사지부이니 관부와 무림의 협력이 잘 되고 있다는 증거이지요.”

    “죄송하지만 어서 들어가서 말씀을 나누시지요.”

    점소이가 몰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급히 객잔으로 안내했다.

    그러다가 백소영이 들고 있던 깃발을 보고 깜짝 놀랐다.

    “헉! 설마 소저께서 천년색마를 처단한 분입니까?”

    “호호! 제가 아니라 여기 계신 제 오라버니가 주인공이세요. 벌써 이곳까지 소문이 퍼졌나요?”

    “물론입니다. 천년색마를 비롯하여 마적 떼로 위장한 천년색문 무사 백여 명이 일 검에 두 동강 났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호호호! 잘 기억하세요. 여기 계신 오라버니 이름은 백자안이에요. 자안 오라버니. 기분이 어때?”

    “어서 들어가자.”

    백자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백소영과 설중화도 함께 들어갔다.

    점소이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천년색마를 처단한 영웅께서 우리 객잔에 오셨습니다. 백자안 대협이십니다.”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화제의 영웅을 손님으로 잡아두면 객잔의 인기 또한 올라가게 마련이었다.

    백여 명이 넘는 손님 중 한 명이 먼저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

    다른 손님들 역시 박수를 보냈다.

    절반 이상은 식사를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백자안을 환영했다.

    백소영이 기쁜 표정으로 깃발을 흔들었다.

    깃발에 적혀 있는 내용이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온 것은 그 직후였다.

    탁자에 자리하기에 무섭게 손님들이 백자안 일행에게 몰려온 것이었다.

    “천년색마 그놈은 정말 희대의 색마였소. 그놈에게 당한 부녀자가 천여 명이 되는데도 아직 잡지 못했는데, 정말 장하시오. 백자안이라고 했소? 아직 젊으신데 대협 소리를 들을만하오.”

    “정말 일 검에 백 명이 넘는 놈들을 두 동강 낸 겁니까?”

    “흑천사걸도 작살내셨다면서요?”

    흑천사걸에 관한 소문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백자안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별말을 하지 않았다.

    백소영이 능숙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적들이 마을을 공격했을 당시 현장에 있었던 그녀가 아닌가.

    “그러니까 우리 마을 사람 모두 정말 죽다 살아났어요. 오라버니가 혈도를 스스로 풀고 일 검을 날리자 놈들이 모두 두 동강 났답니다.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얼마나 통쾌했는지······.”

    백소영이 손짓발짓을 하면서 있는 말 없는 말을 보탰다. 워낙 실감이 나 다들 집중했다.

    원래 이런 객잔에서는 전문적으로 무림의 일을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일종의 정보 상인이었다.

    백소영의 입담은 그들을 뺨칠 정도였다.

    천년색문 무사들을 몰살시킨 것부터 시작해 흑천사걸을 제거한 것까지 이야기가 이어지자, 환호성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대단하군!”

    “흑천사걸 그놈들까지 일검에 베셨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천년색마도 잘 죽었지만 흑천사걸 그놈들이 죽은 것이 더 후련하오. 놈들이 무고한 양민들을 얼마나 괴롭히고 죽였는지 아는 사람은 모두 알 것이오.  이 기회에 악마 같은 흑천방 놈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겠소?”

    “이게 다 여기 계신 백자안 대협 덕분이 아니겠소? 모두 다시 인사드립시다.”

    수십 명의 포권지례가 있자, 백자안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답례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제 동생이 아직 철이 없어 이런 황당한 깃발까지 들고 다닙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색마를 제거하는 것은 무림맹 무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대협이란 칭호는 가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일개 순찰당 무사일 뿐입니다.”

    “아닙니다. 무림맹 장로면 뭐합니까? 그분들이 천년색마가 활개치고 다닐 때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습니까? 말로만 잡겠다고 하고 뒤로는 놈이 절정고수라 제압하기 곤란하다고 모른 척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런 장로들보다 백 대협이 더 영웅입니다.”

    “백 무인이라 불러주십시오. 장로급 고수분들은 다들 바쁘셔서 그랬던 것이겠지요.”

    “흥! 오라버니! 그런 분들을 너무 비호할 필요 없어. 여러분! 제가 한마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해도 될까요?”

    백소영의 말에 손님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어서 말씀하시오.”

    “어서 하시오.”

    “감사해요. 제가 이런 요란한 깃발을 든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에요. 세상에 무림맹에서 제 오라버니의 공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답니다. 일개 하급무사가 그런 무공을 가질 수 없다면서요. 제 오라버니는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깊은 내상까지 입었어요. 한데 당장 무공을 보여주지 않으면 포상금도 안 준답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쳐 죽일 놈들이 있나? 이래서 무림맹 지휘부 놈들이 썩었다는 이야기가 나도는 게 아니겠소?”

    “포상금이 얼만데 그런 야비한 짓을 한다는 것이오? 천년색마 정도면 은자 만 냥 정도는 걸렸을 것 같은데······.”

    “은자 천 냥이에요.”

    “그것밖에 안 되는데 그걸 안 주려는 것인가. 물론 일반인에게는 엄청난 액수이긴 하나 무림공적, 그것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지탄하는 색마를 처치한 영웅에게 그만한 돈을 아끼려 하다니. 말만 하시오. 우리 모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소.”

    “호호호. 그냥 지금처럼 소문만 내주시면 돼요. 맹주님도 강호 여론을 무시하지 못하실 테니까.”

    백소영이 고개를 숙여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짝짝짝.

    박수가 다시 쏟아졌다.

    이번은 백소영에 대한 박수였다.

    미인인데다가 말주변도 좋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백발노인 한 명이 말했다.

    “자, 다들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읍시다. 백 대협께서 조용히 식사할 수 있도록 배려해 드립시다.”

    “그게 좋겠습니다.”

    손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제야 백자안 일행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제4장] 흑천사걸 3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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