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적 반로환동-11화 (11/250)
  • < [제4장] 흑천사걸 2 >

    공터.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자안과 흑천일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 모두 적수공권 상태.

    굳이 병장기까지 사용할 상황은 아니라고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본 것 같았다.

    하지만 무림인의 내공이 실린 주먹은 일반 사람들이 흉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했다.

    한 차례 주먹질만으로도 머리를 박살내거나 내장을 파괴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선공은 흑천일이 했다.

    백자안의 몸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일격에 승부를 결정지으려는 의도였다.

    슈우욱.

    빠르게 다가가 오른 주먹을 백자안의 복부에 꽂았다.

    일류고수답게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였다.

    백자안이 육합보를 펼쳐 옆으로 피했으나, 그만 늦어 옆구리를 얻어맞고 말았다.

    퍽.

    백자안의 신형이 반쯤 뒤틀렸다. 하지만 큰 충격을 받지 않은 듯 몸을 추슬렀다.

    바로 안에 받쳐 입은 가죽옷 덕분이었다.

    이를 알 리 없는 흑천일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일단 물러났다.

    “외공이 상당하군. 철포삼이라도 익혔느냐?”

    “······.”

    백자안이 별 대답을 하지 않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별다른 대책 없이 대결을 시작했었다. 그래서인지 처음부터 일격을 얻어맞은 것이다.

    흑천일의 무공이 비록 자신보다 강하지만, 자신 역시 육합계열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이전보다 깊어진 상태라고 여겼다.

    무저곡에 있을 때 굳이 연습을 하지는 않았다. 무명심법을 연마할 때 자연스럽게 육합계열 무공들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많았다. 그 화후가 깊어졌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어제 황보충에게 맥문을 잡혔을 때보다는 덜했지만 반응이 너무 느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방어가 힘들어지면 공격 또한 어렵다. 그래도 가죽옷이 방패 역할을 해주니 근접전을 벌일 수 있겠구나.’

    백자안이 생각을 정리할 때 흑천일이 다시 다가와 주먹을 날렸다.

    이번에는 연속삼권이었다.

    그가 익힌 권법은 흑천권(黑天拳). 흑천방주가 방내 주요 고수들에게 직접 가르쳐준 무공이었다.

    원래 낭인 출신이었던 흑천사걸은 이 흑천권을 전수한 후 흑천방에 가입한 바 있었다.

    슈욱! 슈욱!

    거센 경력과 함께 주먹이 날아들었다.

    백자안이 이번에는 일권을 피했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권까지는 피하지 못했다.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 복부를 얻어맞은 백자안의 신형이 비틀거렸다.

    가죽옷이 충격을 완화해줘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흑천일이 멈칫할 때 백자안이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바로 육합권이었다.

    “흥!”

    흑천일이 신형을 비틀어 이를 피한 후 일장을 후려쳤다.

    팡하는 소리와 함께 백자안이 대여섯 걸음 뒤로 급히 물러났다.

    “으윽!”

    이번에는 좀 더 강한 충격을 받은 듯 계속 비틀거렸다.

    “마지막이다!”

    흑천일이 빠르게 다가와 오른발을 날려 백자안의 턱을 가격했다.

    아무래도 몸통 공격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얼굴 쪽을 직접 가격한 것이었다.

    내력이 실린 발이 백자안의 턱을 날리면 중상이 예상되었다.

    “오라버니!”

    백소영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가 생각하던 백자안의 무공 수위가 아니었다.

    흑천일에게 일방적으로 몰리다가 중상을 입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백자안은 턱을 얻어맞고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으윽!”

    가죽옷이 보호하지 못하는 턱을 맞은 백자안은 엄청난 통증에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턱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으나 그 충격의 여파로 코피가 났다.

    입술도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전신의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곧바로 일어나야 다시 대결할 수 있는데, 그럴만한 힘도 없는 것이다.

    그에게 허용된 시간은 대략 열을 헤아릴 정도였다.

    그 안에 다시 일어나야 했다.

    비무대가 있다면 그 밖으로 떨어지면 곧바로 패배가 결정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그 정도 시간에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일어나는 것은 고사하고 정신이 계속 아득해져 갔다.

    그는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육합계열 무공이 더 깊어진 것이 아니라, 훨씬 무뎌졌다는 것을.

    그도 그럴 것이 무저곡에 있던 127년간 육합비 외에는 단 한 번도 실전 연습을 하지 않았다. 이해도가 깊어진 것은 맞았으나 너무 연마하지 않았다.

    게다가 운기토납지기 역시 사용을 거의 안 해 육합 계열 무공과 연결이 잘되지 않았다.

    ‘한심하다. 그래도 이전과 같은 줄 알았는데 훨씬 퇴보했구나. 건달 수준도 안 되다니······.’

    사실 영물 가죽옷이 아니었다면 첫수에 쓰러졌을 그였다.

    ‘내가 무얼 믿고 저놈과의 대결에 응했던가. 흑도 놈이면 무조건 깔보는 자만심이 내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알량한 무림맹 무사의 자존심이란 말인가. 하지만 애초 저놈은 나보다 훨씬 무공이 높은 일류고수였다. 패배가 당연했다.’

    백자안이 깊은 자책을 하며 정신 줄을 놓아버리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백소영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이 패배하면 그녀가 놈들에게 잡혀간다는 사실이 비로소 생각난 것이었다.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일어나야 했다.

    절박한 간절함이었다.

    그때였다.

    단전 부위 기해혈 한 곳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바로 간밤에 새로 형성한 좁쌀만 한 크기의 무명진기였다.

    아무 쓸모도 없다고 생각했던 그 기운이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벌떡.

    백자안이 기적처럼 일어났다.

    열을 세기 직전이었다.

    흑천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백자안의 무공이 예상보다 형편없다는 것을 이미 파악한 그였다.

    “후후후! 그래도 맷집이 있군. 이번에는 일어나지 못하게 해주마.”

    흑천일이 노리는 부위는 역시 가죽옷이 보호하지 못하는 발목 부위였다.

    스스슷.

    신법을 펼쳐 빠르게 다가간 흑천일이 오른발을 든 후 비스듬히 꺾어 백자안의 발목을 후려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백자안의 움직임이 달랐다.

    발목을 살짝 빼는가 싶더니 오른 무릎을 들어 올려 흑천일의 복부를 가격했다.

    한데 그 속도가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게 아닌가.

    게다가 흑천일은 방심하고 있었다.

    백자안이 반격을 가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흑천일이 배를 부여잡고 뒤로 쓰러졌다.

    “으으······.”

    상황이 뒤바뀐 것이었다.

    백자안은 연속 공격을 가하지 않고 기다려줬다.

    흑천일이 가까스로 다시 일어났다.

    “개새끼! 죽여 버리겠다!”

    흑천일이 검을 뽑아 그대로 백자안의 목을 베어갔다.

    쐐애액.

    반원형을 그리며 빠르게 다가오는 검.

    “조심해!”

    백소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백자안이 철판교의 수법으로 허리를 젖혀 검을 피했다.

    역시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매우 능숙했다.

    “놈!”

    허공을 가른 흑천일이 검의 방향을 돌려 목을 찔러갔다. 백자안이 육합보를 펼쳐 피한 후 우장으로 힘껏 흑천일의 어깨를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흑천일이 검을 놓치고 쓰러졌다.

    피를 연신 토하는 것이 중상을 입은 것으로 보였다.

    결국 그렇게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고 승부가 결정되었다.

    바로 백자안의 승리였다.

    와아아아!

    숨죽여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이 함성을 터뜨렸다.

    남은 흑천사걸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흑천일을 향해 백자안이 말했다.

    “그대가 패했으니 약속대로 돌아가시오. 설마 승복하지 못하는 것이오?”

    “으으······ 내가 졌다. 무인답게 패배를 인정한다. 돌아가겠다. 헉! 천년색마! 죽었다던 네놈이 어찌!”

    흑천일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백자안의 뒤쪽을 가리켰다.

    백자안이 신형을 돌려 뒤쪽을 바라봤을 때.

    흑천일이 소매 속에 감춰두었던 비수를 꺼내 백자안의 등을 찔렀다.

    하지만 가죽옷을 뚫지 못했다.

    도검불침에 가까운 가죽옷은 병장기의 침투를 직접 막아주는 효능이 매우 뛰어났던 것이다.

    남은 흑천사걸 세 명이 검을 뽑아 백자안의 목을 찌른 것은 그 직후였다.

    하지만 비수로 인해 등 뒤에 강한 타격감을 느낀 백자안이었다.

    신형을 돌리며 그 역시 검을 뽑아 휘둘렀다.

    그 바람에 그의 공격반경 안에 흑천일뿐만 아니라 나머지 흑천사걸 모두가 들어왔다.

    쉬이이익.

    매끄럽기 그지없는 육합검법이 펼쳐지며 흑천사걸 네 명의 목이 동시에 잘려 나갔다.

    댕강.

    수급 네 개가 한 자 정도 떠올랐다가 땅에 떨어졌다. 몸통 역시 썩은 짚단처럼 앞 다투어 무너졌다.

    와아아.

    마을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설중화가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백 무인. 대단해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후환이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제가 증인이 되었으니, 이번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총군사께 보고해 뒤탈이 없게 해드릴게요.”

    “아! 총군사께 직접 말입니까?”

    “바로 보고서를 작성해 전서구를 날려드릴게요. 흑천방 총단 역시 낙양에 있으니 군사부에서 그곳에 통보하면 이번 일의 책임을 백 무인이나 가족들에게 묻지 못할 거예요. 흑천방 놈들은 무림맹과 척을 지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니까요. 사실 이번 일도 흑천사걸이 다른 흑심이 있어 무리하게 일을 벌인 감이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백자안이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설중화가 답례한 후 한쪽 구석에 가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백자안이 그제야 어느 정도 안심을 했다.

    흑천방에서 자신에게 복수하려는 것은 걱정되지 않았으나, 문제는 가족이었다.

    자신이 맹에 복귀한 후 혹여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총군사께서 직접 개입하면 이번 일은 깨끗이 마무리될 것이다. 물론 돈은 갚아야겠지만······.’

    백자안이 한숨을 돌린 후 마을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동안 마을 사람들은 흑천사걸의 시체를 묻어버리고 정리를 해주었다.

    마침 곽휘가 몸을 회복하고 나와 총지휘를 해주었다.

    “백 무인. 가족은 걱정하지 말게나. 내가 책임지고 지켜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곽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 * *

    백자안과 설중화의 복귀 시간은 점심  식사 후로 정해졌다.

    설중화는 이번 흑천사걸 사건을 전서구로 총단에 보고했다.

    혹시 몰라 그녀는 무림맹 장사지부에도 똑같은 내용을 보냈다. 이중으로 안전망을 쳐둔 셈이었다.

    흑천방의 보복은 비단 백자안의 가족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의 걱정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인기는 매우 높아졌다.

    “살이 쪄서 그렇지 참 좋은 아가씨야.”

    “역시 와룡대원이군.”

    “설 대원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

    마을 사람들이 설중화를 두고 하는 말들이었다.

    얼마 후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백자안과 설중화가 떠나려던 때였다.

    백청과 유씨 부인, 그리고 백자룡 세 사람이 마을 사람들 수십 명과 함께 배웅을 나왔다.

    한데 백소영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소영이는 어디 있습니까?”

    백자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모르겠다. 아까부터 바쁘게 왔다 갔다 하더니만.”

    유씨 부인이 백소영을 찾으려 할 때.

    그녀가 나타났다.

    한데 검을 차고 있는데다가 백의무복까지 입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먼 길을 떠나는지 보따리도 하나 들고 있었다.

    “그게 다 무엇이냐?”

    유씨 부인의 물음에 백소영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오라버니 따라 낙양으로 가겠어요. 말려도 소용없어요. 어차피 가기로 한 것 아닌가요? 포상금 받는 것도 옆에서 돕고, 숙부님 댁에 머물면서 무관 들어갈 준비를 하려고요.”

    < [제4장] 흑천사걸 2 > 끝

    ⓒ 행호사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