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적 반로환동-9화 (9/250)

< [제3장] 설중화 3 >

늦은 밤.

백자안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이면 설중화와 함께 낙양 무림맹 총단으로 복귀해야 했다.

하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일 년 정도 맹에서 근무를 해봤지만 무림맹 내부의 텃세는 상상을 초월했다.

명문정파들의 특권의식은 와룡대뿐만이 아닌 것이다.

군사부에서 이번 사건을 조사한다고 하지만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오늘 황보충 그자가 중상을 입은 것 또한 무조건 좋아할 일이 아니다. 강한 내공이 내 몸속에 실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긴 했지만, 그는 엄연히 오대세가 중 한 곳인 황보세가 출신이 아닌가. 소문이 퍼지면 체면을 위해서라도 황보세가 지휘부에서 가만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백자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이럴 게 아니라 하루라도 일찍 무명심법을 다시 운공해보자. 혹시 아는가. 진도가 이전보다 훨씬 빨라질지······.’

백자안이 무명심법 운공을 시도했다.

사실 초저녁부터 하려고 했지만, 왠지 겁이 났었다.

이전과 같이 일성을 이루는데 일 년이 걸릴 가능성이 높았던 탓이었다.

무명심법의 연마속도는 사실 처음 일성을 얼마나 빨리 달성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일성에 일 년이 걸리면 칠성까지는 127년이 걸리게 된다. 하지만 만약 하루가 걸리면 127일이면 가능했다.

‘사실 무저곡에 있을 때처럼 삼성까지 칠 년이 걸려도 매우 빠른 편이다. 무명심법 삼성은 절정의 내공 수준이니까. 다른 내공심법으로는 칠십 년 정도 이루어야 겨우 달성할까 말까 하는 수준이지.’

천천히 일주천을 하면서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아직 새로운 내공은 형성되지 않았다.

기존 내공은 여전히 독 기운과 충돌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팽팽한 접전이라 백자안으로서는 남의 내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상대로 무명심법 운용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내공 충돌 현상이 벌어지면 심법 수련 자체가 힘들어진다.

하지만 무명심법은 광대무변한 바다와 같은 것이라 따로 새로운 내공 보관 장소를 만드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새벽이 다 될 무렵.

겨우 일주천이 끝났다.

그 결과 새로 생성된 내공의 양은 충격적이었다.

너무 미약했던 것이다.

바닷가 백사장에 모래 한 알 정도라고 할까.

무저곡에서의 수련과 비교할 때 대략 열 배 정도 느린 수준이었다.

한번 칠성에 도달한 경험이 있어 속도가 이전보다 빠를 것으로 내심 기대했는데, 오히려 훨씬 늦어진 것이다.

‘이 속도라면 온종일 심법을 수련해도 일성을 달성하는데 일 년이 아니라 십 년이 걸릴 것 같구나. 그렇다면 삼성 수준으로 가는 데는 칠십 년이 걸리겠군. 절정 내공을 가지는 데 칠십년이면 다른 사람보다 그렇게 늦는 것은 아니다. 상승 내공심법 중에서도 준수한 편이지. 하지만 그때는 내 나이 구십이 넘을 게 아닌가.’

백자안이 허탈해했다.

처음부터 칠성 달성에 성공하지 않았다면 이런 실망감은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칠성까지 도달했던 사람이었다.

그것도 127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버틴 결과였다.

백자안은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내심 이전보다 열 배 정도 빨랐으면 했는데, 오히려 열 배 정도 느려졌으니 그럴 만 했다.

지금은 이전에 무저곡에서 무명심법을 연마했을 때의 속도가 그리웠다.

하지만 실망할 단계는 아니었다.

기존 내공의 변화를 살펴야 했다.

새로 생성되는 내공이 미약하더라도 기존 내공을 회복할 수 있다면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독 기운과 충돌하고 있는 기존 내공의 변화는 전혀 없었다.

독 기운 흡수와 내공 변환에 가속도를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백자안이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했다.

‘새로운 내공 생성 속도가 너무 느리기 때문이다. 새 내공이 기존 내공을 도와줘야 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너무 미약하구나. 이게 다 천년이끼가 없기 때문인가.’

백자안이 탄식했다.

사실 그 역시 천년이끼가 내공 증진에 엄청난 도움을 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느 수준인지는 몰랐다.

무저곡에 있을 때 먹을 게 천년이끼밖에 없어서 그저 먹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명확해졌다.

천년이끼 복용이 무명심법 수련 속도를 열 배 빠르게 해줬다는 것을.

‘지금 내 무공으로 다시 무저곡으로 내려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내려간다고 해도 천년이끼를 한꺼번에 몇 십 년 치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번에 많이 먹게 되면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을 받지 않았던가. 하루에 먹는 양이 정해져 있어 그토록 오래 섭취가 가능했던 것이지.’

어이가 없는 것은 또 있었다.

팔대무공을 익히려면 칠성 수준에 달해야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 내공 충돌 현상이 그대로라면 무려 1270년이 걸려야 가능했다.

‘127년이 아니라 1270년이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서 팔대무공을 연마할 수 있을까. 신선이 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것이다.’

백자안이 엄두가 안 나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를 절망으로 이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무명심법의 특성상 일성을 이루기 전에는 아무런 위력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일성을 이루는 데 십 년이 걸리게 된 지금 그때까지 내공 면에서 아무런 발전이 없는 셈이었다.

이는 그가 무명심법 상의 내공인 무명진기(無名眞氣)로 육합비를 연마할 때 경험한 바 있었다.

‘정녕 무명심법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으로서는 새로운 무명진기를 쌓는 것이 별 의미가 없구나.’

백자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답한 마음에 밖에 나가 육합계열 무공이라도 수련해보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명진기 대신 운기토납지기를 사용해야 했다.

운기토납지기는 그가 십 년 넘게 연마한 기운.

넓게 봐서 내공으로 부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 미약한 힘이라 효율이 매우 떨어졌다.

그가 오늘 황보충의 금나수를 피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실제 무림맹 무사 정도면 모두 내공이 상당할 것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그러하지 않았다.

내공심법을 제대로 배운 자는 무림맹 전체 무사 중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그것도 맹에 들어와서 배우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굳이 운기토납지기도 내공 범주에 넣어준다면, 지금 백자안이 사용 가능한 진성 내공은 대략 일 년 정도였다.

운기토납지기가 평균적인 내공의 일할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다.

백자안이 나가기 전에 방 한쪽에 있는  백의 한 벌을 집었다.

그 옷은 이번에 백자안이 오면 주려고 유씨 부인이 손수 만든 것이었다.

백자안은 무저곡에서 자신이 만들었던 가죽옷을 계속해서 입고 있었다.

마적 떼를 향해 무명검법을 펼칠 때 사실 검의 파편 몇 개가 백자안 자신에게도 향했었다. 그 파편을 가죽옷이 막아준 것을 뒤늦게 인지한 것이다.

‘그 영물 가죽이 도검불침에 가까운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무명검법마저 막아낼 줄이야.’

백자안이 새삼 그 영물과 싸우던 당시를 떠올렸다.

당시 무명심법 오성 수준이었던 그는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공격하던 놈과 무려 사흘을 싸웠다.

육합계열 무공에 끄떡없던 놈은 결국 백자안에 의해 목이 졸려 죽었다.

놈의 급소라 할 수 있는 조문이 바로 목이었던 것이다.

가죽을 벗겨 내는 일도 매우 어려웠다.

가죽옷을 만드는 데 걸린 시간만 해도 일 년이 넘었다.

고생해서 만들었기에 애착이 깊었다. 게다가 생각보다 얇고 가벼워 내의로 입고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갑옷의 역할도 해주니 벗을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내가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은 것도 이 녀석 때문인지 모르지.’

백자안이 가죽옷을 한번 매만진 후 겉옷을 입었다.

방에는 검 한 자루도 걸려 있었다. 그것은 백자룡이 주워 온 것이었다.

아마도 마적 중 한 명이 사용하던 것 같았다.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병장기가 필요한 백자안에게는 반가운 것이었다.

텅.

방문을 열자 제법 쌀쌀한 새벽 기운이 느껴졌다.

여명도 밝아오고 있었다.

백자안은 문득 용기가 났다.

‘그래 절망은 없다. 언제든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무명심법도 포기하지 말고 천천히 연구해보자. 내가 어쩌면 잘못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새롭게 마음을 먹었기 때문일까.

좁쌀보다 적게 생성된 새로운 무명진기의 질감이 이전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양은 똑같은데 질이 더 좋아졌다고나 할까.

‘쓸데없는 생각이다. 일단 육합 무공부터 다시 단련해두자.’

백자안이 각오를 다시 한 후 검을 들고 마을 공터로 갔다.

* * *

‘선객이 있었군.’

공터로 접어든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공터 한구석에 한 사람이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명이 밝아오는 산을 묵묵히 바라보는 사람.

남자는 아닌 것 같은데 덩치가 있었다.

바로 설중화였다.

그녀는 마치 석상처럼 서서 떠오르는 해를 감상하고 있었다.

백자안이 헛기침을 하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아! 백 무인! 일찍 일어나셨군요.”

“설 대원께서도 잘 주무셨습니까?”

“네. 어제 좀 우리가 피곤하게 만들었죠?”

“아닙니다. 산다는 게 원래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백자안이 설중화에게 다가갔다.

미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왠지 그녀를 대할 때 마음이 편해지는 그였다.

“어제 감사했습니다. 설 대원이 아니었다면 매우 곤란해졌을 겁니다. 어쩌면 정말 체포를 당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아니에요.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보다 감사를 드려야 할 사람은 바로 저예요.”

“무슨 일로?”

“호호호. 백 무인께서 천년색마를 처치해주셨잖아요. 사실 처음에는 저도 의구심이 들었는데 어제 확신했어요.”

“아, 제가 황보충 대원을 쓰러뜨릴 때 말입니까?”

“아니에요. 처음 백 무인의 눈빛을 봤을 때요. 뭔가 대단한 기도가 갈무리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신뢰가 생겼지요. 하지만 맹에 복귀하면 또 곤란해질 거예요. 눈에 보이는 확실한 무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할 거예요. 낙양으로 가는 동안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랄게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어려울 듯합니다. 조금 전 몸 상태를 다시 점검해봤는데, 내공 충돌을 단기간 안에 해소할 수 없을 듯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려 절망적입니다.”

“아, 정말 내상이 깊으시군요. 좋아요. 만약 총단에 도착할 때까지 차도가 없으면 제가 신의 한 분을 소개해드릴게요.”

“신의라 하심은?”

“생사신의(生死神醫)라고 아시지요?”

“물론입니다. 생과 사를 좌우한다는 최고의 의원이 아니십니까? 그분은 오래전 은퇴하셨다고 들었는데······.”

“아직 정정하세요. 은자림(隱者林)에 계시는데 제가 부탁하면 도와줄 거예요. 그러니 포기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설 대원께서는 정말 좋으신 분 같군요.”

“호호. 그뿐인가요? 하기야 절세미인을 정혼녀로 두신 분이 저 같은 소녀가 눈에 들어오겠어요?”

“그럴 리가요. 설 대원께서도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미의 기준은 제각기 다르니까요.”

“호호호! 농담이에요. 타고난 얼굴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요. 살도 빼고 싶은데 정말 체질이 그런지 어렵네요. 칭찬해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설중화와 친해진 것 같았다.

“으음, 아까 제게 천년색마를 제거해줘서 고맙다고 하셨는데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으십니까?”

“네. 사실 몇 년 전 제가 친동생처럼 아끼던 시녀가 천년색마 그놈에게 간살을 당한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반드시 제 손으로 원수를 갚으려 했었지요. 백 무인께서 대신 놈을 처단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설중화가 고개를 숙였다.

백자안 역시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설중화가 미소를 지었다.

“백 무인. 실례가 안 된다면 길을 안내해 주실 수 있어요? 산책을 하고 싶은데 마땅한 곳이 있나요?”

“네. 조금만 가면 오솔길이 하나 있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네. 감사해요.”

“그럼.”

백자안이 설중화를 데리고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덩치는 설중화가 더 커서 보기에는 조금 그랬으나, 두 사람은 편안한 표정이었다.

설중화가 물었다.

“만약에 화산옥녀가 백 무인을 마음에 들어 한다면 혼인하실 건가요?”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내공이 그대로라고 해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명문정파인 화산파 장문인 정도라면 사위 될 사람의 배경 또한 생각할 것이니까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 따로 혼사를 추진하는 곳이 있을 겁니다.”

“하긴 요즘 추세가 그렇지요. 십년 전 혈교와의 전쟁 이후 다들 혈맹 수준의 원조 세력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으니까요. 최근에는 마교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고요. 사실 저 역시 비슷한 처지이긴 해요.”

“네? 무슨 말씀인지?”

백자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모르시겠어요? 저같이 뚱뚱한 여자를 좋아할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 그게 아닙니다. 정말 설 대원도 정혼자가 있는 겁니까?”

“정혼은 아니에요. 다만 조만간 약혼하게 될 것 같아요.”

“어떤 분이신지?”

“호호호! 그 정도까지만 하지요. 우리가 뭐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아! 그리고 제가 약혼한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주세요. 정말 백 무인께만 말씀드리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듣게 되면 비웃을 수도 있으니까. 알겠죠?”

“네.”

“고마워요. 아, 저기 정말 오솔길이 있네요. 어서 가요.”

설중화가 걸음을 빨리했다.

백자안 역시 보조를 맞췄다.

‘약혼한다고 하니 사람이 달리 보이는 구나. 시녀까지 있었다고 했으니 집안도 좋을 것 같군. 인맥도 대단한 것 같고 보통 소녀는 절대 아니다.’

< [제3장] 설중화 3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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