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장] 설중화 2 >
“현명하신 판단이에요. 마침 제가 군사부에 대해 잘 아니 백 무인을 데리고 먼저 맹에 복귀하겠어요. 그렇게 해도 되겠어요?”
“설 대원 혼자 말이오?”
“그럼 백 무인이 도망이라도 하겠어요? 백 무인! 저와 함께 맹에 복귀하겠어요?”
“네. 어차피 복귀해야 하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만 사적인 일이 있어 화산파에 들러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백자안이 공개적으로 화산파 방문 사실을 밝혔다.
미리 밝혀둠으로써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자 함이었다.
남궁무기가 물었다.
“화산파에는 무슨 일로 가려는 것이오?”
“사적인 일이라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다만 화산파 장문인을 뵙기 위해 가는 거라는 것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매화검선을 뵈러 가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백 무인이 죄인도 아닌데 어찌 그것까지 막겠소? 다만 너무 지체해서는 안 되오. 설 대원이 알아서 잘 처리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설중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충이 다시 반기를 들었다.
“조장님. 저자가 무슨 일로 화산파 장문인을 뵈러 가는지 확실히 밝히게 하십시오. 일개 구급무사가 매화검선과 만날 일이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저자가 그런 배경이 있다고 믿기 힘듭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소. 백 무인! 사적인 일이라 하나 우리 입장도 있으니 사실대로 말해주겠소?”
“그건······.”
백자안이 난감해했다.
정혼 사실을 공개하는 것이 화산파 입장에서는 달가울 리 없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조용히 파혼하고 싶어 할 텐데, 이런 식으로 공개한다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컸다.
백소영이 말했다.
“아까 들으니 화산장문인의 여식과 혼사 문제로 간다고 하던데 그게 정말이야?”
그녀의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매화검선의 여식 화산옥녀는 와룡대 남자 대원 사이에서도 우상이었다.
지난 삼 년 간 화산 옥녀봉에서 수련하고 있는 그녀는 얼마 전 옥녀심공(玉女心功)을 칠성까지 연마하는 데 성공했다고 알려졌다.
자하신공과 더불어 화산파의 유명절기인 옥녀심공은 그 위력이 대단했다.
특히 옥녀심공을 익히게 되면 피부가 옥처럼 깨끗하고 탄력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이 그녀의 미모를 더욱 빼어나게 해주었다.
그런 그녀와 일개 무림맹 하급무사가 혼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무슨 황당한 말이오? 화산옥녀가 어찌 저런 자와 혼인한다는 말인가?”
황보충이 어이없어 했다.
그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황보세가의 방계인 그는 내심 화산옥녀를 흠모하고 있었다.
그가 화산옥녀를 만난 것은 삼 년 전이었다.
매화검선이 화산파 장문인이 된 후 무림맹주에게 인사차 무림맹 총단에 왔었다. 그때 자신의 딸까지 데려온 것을 본 것이다.
당시 화산옥녀의 나이는 열다섯.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그 미모는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옥녀심공의 영향도 있었지만 원래 미색이 뛰어난 소녀였다.
삼 년이 지난 지금 그녀의 미모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지만 옥녀봉에서 거의 내려오지 않는 바람에 최근 모습은 알 수 없었다. 한데 얼마 전부터 초상화 하나가 나돌기 시작했다.
바로 화산옥녀의 최근 모습이 담긴 초상화였다.
이 초상화는 무림맹 차원에서 작성하고 있는 무림 인물 대사전 편찬 작업 때문에 그려진 것이었다.
물론 화산옥녀만 그린 것이 아니라 매화검선을 비롯한 각파 장문인과 주요 고수들도 포함되었다.
편찬 작업의 목적은 주요 인물의 실종 등 사건이 발생 시 보다 빠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실제 지금도 마교와 무림맹 간의 알력으로 주요 인사들의 납치, 살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목적과 달리 초상화가 사용되기도 했다. 화산옥녀 같이 미인의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물론 그런 미인도는 은밀히 거래되고 있었다.
진본은 아니고 그대로 베껴 그린 것이지만 제법 고가였다.
단속의 우려로 거래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황보충 같이 목숨을 걸고 구하려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의 품속에는 올해 열여덟 살의 눈부신 미모를 뽐내는 화산옥녀의 초상화가 소중히 간직되어 있었다.
“황보 대원! 고정하시오.”
남궁무기가 손을 들어 만류했다.
황보충이 지나치게 흥분한 것을 그도 느낀 것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백청이 말했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자안이도 오늘 비로소 정혼녀가 있는 것을 알았으니 탓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현 화산파 장문인 악소범은 제 친구로 서로 자식을 낳게 되면 혼인시키기로 약조를 한 적이 있었지요. 자안이가 화산파로 가는 것은 제 친구의 초청을 받아 가는 겁니다. 실제 혼사가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으니 너무 민감하게 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백청이 넌지시 이 혼사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밝혔다. 황보충을 비롯한 와룡대원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하하. 그렇군요. 그럼 두 분이 자제분들의 혼인을 약속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겠군요.”
남궁무기의 물음에 백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벌써 삼십 년도 넘었지요. 그때는 그 친구도 과거 시험 준비 중이라 지금처럼 화산파 장문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흥! 보나마나 파혼당하겠군. 하기야 시골 촌장 집안과 비교가 되지 않지. 굳이 화산파에 직접 가려는 것은 뭐 얻어먹을 게 있는 것이겠군. 거지 근성이 대단하군. 이왕 혼사가 안 되니까 자식을 팔아 돈이라도 좀 챙기려는 것인가. 아들보다 그 아비가 못났군.”
황보충이 빈정거렸다.
백청의 표정이 구겨졌다.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단한 모욕을 받은 셈이었다.
“무슨 헛소리냐? 오라버니가 화산옥녀에게 꿀릴 것이 뭐가 있다고. 내상만 회복하면 이제 천하제일 무공을 지니게 될 것인데, 그까짓 화산옥녀가 뭐라고. 오라버니! 화산파에 안가면 안 돼? 가려거든 아버지를 모욕한 저놈을 혼내주던가. 아무리 내상을 입어도 저놈 하나 혼내줄 힘도 없는 거야?”
백소영이 흥분했다.
백청은 백자안의 앞날을 위해 이번에도 꾹 참고 있었지만, 그녀는 달랐다.
황보충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 우리 미인 소저께서는 그래도 당찬 기백이 있군. 백자안이라고 했나? 나와 겨뤄 이기면 내가 사죄를 하겠다. 대신 네가 지면 화산파에 가는 것을 포기해라. 네놈 때문에 화산옥녀의 명성에 누를 끼쳐서야 되겠느냐?”
“부조장님! 내상을 입고 사흘간 정신을 잃었다가 조금 전 깨어난 분입니다. 그런 분과 비무를 하려 하다니 부끄럽지 않은가요?”
설중화가 다시 백자안을 거들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비무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특히 황보충의 눈에는 지금 살기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꼭 죽이지는 않더라도 백자안이 크게 다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백자안은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 역시 매우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모욕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부친에 대한 모욕은 그 역시 견디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한순간의 분함을 참지 못하고 무명폭잠공을 다시 펼치면 십중팔구 목숨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컸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것도 아니라 그만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운기토납지기에 기반을 둔 육합계열 무공으로 겨룰 수도 있지만 그것은 결과가 너무 뻔했다.
백자안이 주저할 때.
황보충이 다가와 그의 맥문을 잡았다.
금나수법이었다. 황보세가의 상승내공심법이 기반이 된 것이라 매우 능숙하고 빨랐다.
백자안으로서는 전혀 피하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황보충이 말했다.
“나와 대결할 자신이 없는 모양이니, 네놈의 내공을 다시 한번 검사해봐야겠다. 아무리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공이라 해도 외부 공격을 받게 되면 뭔가 반응이 있겠지.”
황보충이 내력을 사용해 백자안의 손목을 비틀었다.
치유 목적이 아닌 이런 식의 내공 사용은 상대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기 마련이었다.
특히 지금 사용한 수법은 분근착골수였다.
죽지 않을 정도로 내력을 사용해 상대의 근육과 뼈를 뒤틀리게 하는 고문 수법이었다.
“으윽!”
백자안이 신음을 내뱉었다.
엄청난 고통이 밀려들었다.
신음을 내지 않으려 했으나 도저히 참기 어려웠다.
누가 말릴 사이도 없었다.
“후후후! 어서 말해라. 네놈이 우리에게 속인 것을 실토해라! 정말 자신의 실력으로 천년색마를 죽였느냐?”
황보충이 소리치며 백자안을 다그쳤다.
보다 못한 설중화가 나서려 할 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황보충이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더니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게 아닌가.
“크윽!”
백자안의 손을 놓고 땅바닥에 대자로 뻗은 그는 피를 계속 토해냈다.
한눈에 봐도 중상을 입은 게 틀림없었다.
“황보 대원!”
남궁무기가 급히 그를 부축해 내력을 사용해 치료했다.
하지만 이미 내장이 상해 회복이 되지 않았다.
설중화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품속에서 단약 하나를 꺼냈다.
“이것을 먹으면 고비는 넘길 수 있을 거예요.”
실제 단약을 먹이자 황보충의 안색이 조금 돌아왔다.
하지만 회복을 하려면 몇 달은 걸릴 것 같았다.
그래도 고비를 넘기자 사람들이 안도했다.
특히 백자안이 매우 기뻐했다.
자칫 황보충이 죽기라도 한다면 매우 골치 아파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신세를 지게 되었구나.’
백자안이 설중화를 보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감사의 표시였다.
설중화 역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궁무기가 백자안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오?”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 몸속의 내력이 자체 방어를 한 것 같습니다.”
백자안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공과 독 기운의 충돌이 발생하고 있는데, 외부의 공격이 가해지자 반탄력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는 고수들의 대결 중에 모르고 다가갔다가 내상을 입고 튕겨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백자안의 몸속에 있는 내공과 독 기운의 힘은 황보충 같은 자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만약 설중화가 회심단(回心丹)을 먹이지 않았다면 십중팔구 사망했을 것이었다.
“방금 먹인 단약은 혹시 회심단이 아니오?”
남궁무기의 물음에 설중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총군사께서 직접 제조하신 것이니 안심해도 될 거예요.”
“아!”
남궁무기를 비롯하여 와룡대원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회심단은 구하기 어려운 약재로 만들어져 매우 귀한 것이었다.
설중화가 그런 회심단을 갖고 있다는 것은 만박서생과의 친분이 예상보다 더 친밀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궁무기는 황보충을 데려가 안정을 시키도록 하고 백자안에게 말했다.
“모두 내 불찰이오. 부조장이 먼저 공격했으니 이 일은 불문에 부치겠소. 아니 내가 대신 사과하리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졌으니까요. 사실 집으로 오면서 뜻하지 않은 기연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대단한 무공을 지니게 되었지요. 하지만 너무 무리해서 그 힘을 회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맹에 복귀할 때까지 회복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러면 군사부에서 바른 판단을 내려주시겠지요.”
“알겠소. 조금 전의 반탄력으로 어느 정도 내공의 고강함이 입증된 셈이니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그럼 언제 맹에 복귀하겠소?”
“내일 아침 출발하겠습니다. 아, 물론 저기 저분도 함께 가야겠지요.”
백자안이 설중화를 가리켰다.
“그렇소. 설 대원! 인사하시오.”
“네. 설중화라고 해요. 저와 가는 게 여러모로 편할 거예요. 아, 물론 도중에 화산파에 들러 백 무인의 아름다운 정혼녀도 만나봐야겠지요. 호호호.”
< [제3장] 설중화 2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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