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장] 마적 떼를 소탕하다 3 >
“정혼녀라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게 정혼녀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구나.”
백청이 회상에 잠긴 표정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유씨 부인은 이미 그 이야기를 다 아는 듯 밥을 차려오기 위해 방에서 나갔다.
백자안은 난데없는 정혼녀 이야기에 놀라면서도 경청했다.
백청의 젊은 시절 이야기는 좀체 듣기 어려웠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이십 대 초반 시절 백청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함께 공부했던 벗이 있었다. 그 벗과 훗날 서로 자식을 낳게 되면 혼인을 시키자고 약조를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풍습에는 부모가 자식의 혼사를 그런 식으로 결정지을 수 있었다.
자식의 의사를 묻지 않은 방식이라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엄연히 약속이었다. 그 약속을 어기는 것은 체면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이후 과거를 치렀고 결과적으로 모두 낙방했다.
당시 조정이 썩어 합격자가 이미 고관대작의 자제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청과 그의 벗은 차례로 일, 이등을 했으나 아무런 배경도 없는 그들은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좌절했다.
백청은 낙향을 결심했다. 그의 벗은 무재를 인정받아 무림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소식이 끊긴 두 사람은 수십 년간 만나지 못했다.
한데 몇 달 전 선인촌으로 그의 소식을 전해준 사람이 온 것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구대문파 중 한 곳인 화산파 제자였다.
그는 백청에게 서신을 한 통 전달했다.
백청은 서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수십 년 전 헤어졌던 벗이 보낸 서신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신분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친구는 화산파 장문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헤어질 당시 자신은 늦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화산파 장문제자가 되었다고 했다.
이후 거듭된 기연을 만나 무공이 강해진 그는 마침내 삼 년 전 화산파 장문인이 된 것이었다.
서신을 보내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정혼 문제 때문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백자안이 무림맹에 들어간 것을 알고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또한 화산파에 오게 되면 추천장을 써줄 것도 약속했다.
그 추천장은 백자안이 앞으로 무림맹 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은 자명했다.
이것이 서신의 대략적인 내용이었다.
백자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매화검선(梅花劍仙) 그분이 아버지 친구분이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이름은 악소범(岳蘇凡)이라고 하지. 서신을 가져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슬하에 일남일녀가 있다고 하는데, 당연히 너와 정혼한 사람은 그의 딸이다. 그는 내 고향이 이곳 선인촌임을 알고 있었으니, 찾고자 마음만 먹었다면 좀 더 일찍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친구는 폐관 수련을 오래 해 그동안 사적인 일을 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고 하더구나. 장문인이 된 후에는 처리해야 할 일도 너무 많았고 말이야.”
“그 말씀은 사실일 겁니다. 제가 알기로도 현 장문인 매화검선은 전대 장문인의 수제자로 그동안 자하신공(紫霞神功) 연마에 매진했었다고 들었습니다.”
“허허허. 역시 무림맹 무사답게 구대문파에 대해 잘 아는구나.”
“무림인이면 대부분 아는 사실입니다. 갑자기 정혼 이야기를 꺼낸 것은 왜일까요?”
백자안이 안색을 굳혔다.
언뜻 듣기로도 매화검선이 딸을 자신에게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글쎄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추천장 이야기를 하신 것으로 봐서 제게 추천장을 써주고 정혼 사실은 없던 것으로 하려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파혼이 핵심이지요.”
“잘 봤다. 나 또한 같은 생각이다. 그 친구 성격은 나와 비슷해 거짓말을 잘하지 못한다. 매우 강직한 편이지. 아마도 딸의 혼사 추진 과정에서 옛날 나와 약조한 일이 마음에 걸린 것 같다.”
백청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출발을 했던 친구와 자신의 격차가 이렇게까지 벌어졌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때 유씨 부인이 밥상을 차려서 방에 들어왔다.
백자안은 식사를 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유씨 부인도 참여했다.
“나는 처음부터 찬성했다. 석 달 전 서신을 전해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어머니. 화산 장문께서는 저를 사위로 맞을 생각이 전혀 없으십니다.”
“나도 안다. 서신을 가져다준 사람 역시 둘러서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런 것 같더구나. 하지만 내가 기뻐한 것은 바로 그 추천장이다. 화산 장문인의 추천장만 있으면 너도 와룡대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 사람이 말하더구나. 그 말이 사실이냐?”
“네. 구파 장문인들이 써준 추천장은 확실한 신원 보증을 의미하지요. 그 때문에 무공만 어느 정도 되면 입대가 가능하긴 합니다. 물론 명문정파의 적통 제자들보다는 대우가 낮겠지만 일반 무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유리한 발판이 되지요.”
백자안이 담담히 말했다.
사실 그는 추천장이 그렇게 달갑지는 않았다.
지금 관심 있는 것은 어서 빨리 내공을 되찾는 일이었다.
이후에는 낙양에 무관을 하나 차려 제자들을 받고 조용히 살아가는 그런 막연한 바람이 있었다.
무저곡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출세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이 그만큼 사라졌기 때문일까.
그는 내심 이번에 천년색마를 처치한 일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부모님의 자신에 대한 기대였다.
장남으로서 가문을 일으키고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도 컸다.
백청이 말했다.
“어떻게 하겠느냐? 자존심이 상한다면 가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네 무공이 상상 이상으로 높아졌기에 권하는 것이다. 아무런 배경 없이 무공만 높으면 시기하는 무리가 반드시 생길 터. 그것이 걱정이다. 화산에 가겠느냐?”
“네. 두 분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백청과 유씨 부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백청이 말했다.
“잘 결정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네가 무림맹에서 승승장구하여 명성을 떨치는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나도 인간인지라 자격지심이 생겨 너를 화산파에 보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너의 앞날을 위해 보내려 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화산파에 가서 파혼이 결정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아라.”
“네. 솔직히 저 역시 정혼 약속에 얽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무림인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게 전통이니까요. 화산파에 가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추천장만 받고 바로 파혼이 진행될 것 같습니다. 화산옥녀(華山玉女)는 아마 만나보고 싶어도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고요.”
백자안이 미소를 지었다.
유씨 부인이 안타까워했다.
“나도 일전에 화산옥녀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들은 적이 있다. 무림삼미(武林三美)에 들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라지. 무공도 매우 높아 후기지수 중 으뜸이라 들었다. 하지만 자안이 너의 무공이 그녀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냐? 우리가 보기에 정말 대단한 실력 같았는데······.”
“어머니. 세상은 넓고 천하에 고수는 많습니다.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백자안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 그런지 조금 소극적으로 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과거로 돌아오니 점점 정신도 이전의 것으로 변해가는 것 같구나. 사실 내공만 회복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역시 모든 것은 실력이 가름하는 것인가.’
백청이 말했다.
“정혼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자. 화산파에 가서 혼사 역시 잘되었으면 하지만, 그 일은 네게 맡기겠다. 너는 무림인이니 혼인은 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하도록 해라.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든지 너의 선택을 믿고 지지하겠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백자안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바로 백소영이었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들떠있는 표정이었다.
“오라버니! 깨어났어? 몸은 괜찮아? 혼인이라니 무슨 소리야?”
“웬 호들갑이냐? 자룡이는 어디 있느냐?”
백청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백자안이 마적 떼를 제거한 이후로 백소영의 기세가 대단했다.
마치 자신이 영웅이 된 것처럼 으스대고 있었다.
“중요한 사실을 알게 돼서 저 먼저 온 거예요. 수색은 끝났고 자룡이는 와룡대원들과 함께 올 거예요. 마침 오라버니가 깨어났으니 천만다행이에요. 정말 괜찮아?”
“그래. 나는 괜찮다. 무슨 중요한 일이냐?”
백자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백소영의 성격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웬만한 일에는 양보를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열두 살 이후로 멀리 떨어져 지내는 바람에 애틋함이 더 많았다.
게다가 백소영이 낙양에서 무관을 다니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잘 알기에 미안한 마음이 늘 있었다.
“다들 놀라지 마세요. 글쎄 와룡대원들에게 들었는데, 오라버니가 마적 떼를 소탕한 것이 확실하게 증명되면 포상금을 지급한데요.”
“포상금?”
유씨 부인이 호기심을 보였다.
최근 들어 가뜩이나 궁핍해진 살림이었다.
백자안을 뒷바라지하느라 땅이며 패물이며 모두 팔아버린 것은 오래전 일이었다.
“네. 어머니. 이번에 죽은 천년색마는 부녀자를 천여 명이나 간살한 희대의 악인이라 무림공적 장부에 올라가 있대요. 그래서 놈을 제거한 사람에게 은자 천 냥을 상으로 내린다고 하네요. 정말 대박이죠.”
“천 냥씩이나?”
유씨 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백청과 백자안 역시 깜짝 놀랐다.
백소영이 빠르게 다시 말했다.
“오라버니! 상금 받으면 나 그 돈으로 낙양에 있는 무관에서 무공을 배우고 싶은데 가능할까?”
“물론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절반인 은자 오백 냥은 아버지, 어머니께 드리고, 나머지 돈은 네 수련비와 생활비로 쓰도록 하자. 나는 월봉이 나오니까 돈이 필요 없고 말이야. 한데 소영이까지 낙양으로 가도 될까요?”
백자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백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그동안 돈이 없어 못 보냈지. 그만한 돈이 생긴다면 어찌 보내지 못하겠느냐? 낙양에는 네 숙부도 있으니, 이전의 너처럼 신세를 지게 하면 될 것이다. 당신도 찬성이지?”
“네. 소영이 소원이니 그렇게 해야지요. 나이가 많아서 제대로 배울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유씨 부인이 걱정스러워했다.
“열일곱 살이 뭐 그리 많아요? 저도 자룡이에게 배워 기초 무공을 제법 안다고요. 실전에 써먹지 못해서 그렇지. 호호호.”
백소영이 즐거워했다.
눈물까지 글썽이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기쁜 것 같았다.
사실 여인의 몸으로 낙양에 있는 무관에 다니는 의미는 남자와 조금 달랐다.
무공을 배우는 목적도 있지만, 사교의 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천하의 인재 절반이 낙양에 모여 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유씨 부인이 말했다.
“아, 그리고 아까 우리에게 준다는 은자 오백 냥은 자안이 너의 혼인 자금으로 갖고 있으마. 혹시라도 화산파 장문인 여식과 혼인이라도 하게 되면 돈이 한두 푼 들겠느냐?”
“그건 걱정 마세요. 아직 저는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백자안이 말한 그때 마당이 소란스러워졌다.
백소영이 안색을 상기시켰다.
“와룡대원들이 복귀한 것 같아요. 오라버니! 어서 나가서 그들에게 무공을 보여줘. 그래야 포상금을 하루라도 빨리 받지. 안 그래?”
“그건 좀······ 일단 나가보자. 와룡대원들은 모두 내 상급자라서 보고를 해야 하니까.”
백자안이 마당으로 나갔다.
백청과 유씨 부인, 그리고 백소영 역시 따라 나갔다.
< [제2장] 마적 떼를 소탕하다 3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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