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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적 반로환동-2화 (2/250)
  • < [제1장] 반로환동 2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백자안이 일주천을 막 완성했을 때였다.

    운기행공을 하던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 드디어 성공했다.”

    백자안이 무척 기뻐했다.

    마음이 번잡해 매우 염려를 했었다. 하지만 다행히 무명심법을 칠성 수준으로 연마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백자안이 천천히 일어났다.

    평소와 달리 계곡 바닥에서 운공을 했던 그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여전히 붉은색의 독안개가 덮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독 안개를 뚫고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마친 것이다.

    “내 목숨이 며칠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집으로 가봐야 한다. 필시 누군가가 부모님과 동생들의 묘소를 마련해두었을 것이다.”

    그랬다.

    백자안은 지금 고향 집에 가서 가족들의 흔적이라도 찾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떠나기 전에 몇 가지 챙길 것이 있었다.

    그가 지난 세월 동안 숙소로 사용했던 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무명비급을 발견했던 곳이라 이후 계속 거처로 사용해왔다.

    동굴은 그다지 깊지 않았다.

    사오장 정도 들어갔을 때 장방형의 석실 하나가 보였다.

    석실 중앙에 평평한 바위 하나. 구석에 돌로 만든 침대 하나.

    침대 옆에는 나무로 만든 수납장 같은 것이 있었다.

    수납장 위에는 덩굴로 만든 바구니가 보였다. 주식이라 할 수 있는 천년이끼를 담아 먹는 용도인 것 같았다.

    “으음······ 가지고 갈 것이 별로 없구나. 하기야 옷도 없이 살았으니 더 말할 바가 있겠는가.”

    백자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몸을 쳐다봤다.

    놀랍게도 그는 벌거숭이였다.

    “그래도 밖에 나가서 이렇게 다닐 수는 없지.”

    백자안이 수납장 안에 넣어두었던 가죽옷 하나를 꺼냈다.

    짐승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 짐승은 호랑이와 유사하게 생긴 영물이었다.

    다행히 놈을 만난 것은 무명심법을 오성 정도 달성했을 때라 겨우 처치할 수 있었다.

    놈이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추측건대 놈 역시 무저곡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드디어 이 옷을 입게 되는구나. 새 옷으로 갈아입을 때까지 유용할 것이다.”

    백자안이 미소를 지으며 가죽옷을 입었다.

    그런 후 수납장에서 한 권의 비급을 꺼냈다.

    바로 무명비급이었다.

    사실 그가 동굴로 들어온 주된 이유는 바로 이 무명비급 때문이었다.

    무명심법과 팔대무공이 수록된 희대의 비급.

    그 중 무명심법은 연마 중이지만, 문제는 팔대무공이었다.

    사람 심리란 것이 묘해 무명심법이 칠성에 달하자 팔대무공 역시 연마하고 싶었다.

    물론 천수를 다해 곧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세상에 나가 보람된 일을 조금이라도 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헛된 바람일지는 모르나 팔대무공을 익히게 되면 수명이 더 늘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일단 가져가자. 팔대무공 역시 내용은 모두 기억해두었지만 비급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다. 재질이 특별해 어쩌면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을 수도······.”

    백자안이 금빛이 은은하게 나는 무명비급을 품속에 넣었다.

    석실 안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옷과 비급 외에는 굳이 가져갈 것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병장기도 하나 없구나. 무명검법(無名劍法)을 익히려면 그에 맞는 보검이 있어야 할 텐데······.”

    백자안이 습관처럼 다시 혼잣말을 했다.

    잠시 무명비급의 내용을 떠올렸다.

    역시 팔대무공 중 하나인 무명검법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신검이 필요하다고 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천하제일검 지존검(至尊劍)이 바로 그 신검이라 적혀있었지. 전설로만 생각했는데 실제 그런 검이 있었단 말인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존검을 찾게 될 때 무명비급의 출처에 대해서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백자안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자신과는 인연이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직 검법도 연마하지 않았는데, 부질없는 생각이다. 이제 정말 나가자.”

    백자안이 아쉬운 표정으로 석실을 둘러봤다.

    그동안 정이 들었기 때문일까.

    하기야 자그마치 127년이었다.

    그 오랜 세월을 고독하게 살아온 한 인간에게 있어 거처 또한 남다른 느낌을 주었다.

    마치 어머니의 품속처럼 매일 저녁 석실로 돌아오면 잠시나마 평안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가족과 있었을 때의 그 행복한 시간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림맹 입맹시험에 합격해 뛸 듯이 기뻐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가 무림맹 정식무사가 된 것은 스물두 살 때였다.

    이후 무림맹 외성 경계 근무를 일 년간 맡았다.

    무림맹 총단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며, 외성 경계 근무는 신입무사들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물론 입맹 시험 성적이 뛰어난 무사들은 곧바로 요직에 들어가기도 한다.

    백자안은 거의 꼴찌로 합격했다.

    하지만 피나는 노력을 한 대가였다.

    열두 살 때 홀로 낙양으로 올라와 표국에 다니던 숙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무관에서 무공을 연마했던 것이다.

    하지만 산골 마을에서 천재로 일컬어졌던 그는 무림맹 총단이 있는 낙양에서는 그저 그런 재목에 불과했다.

    그가 다녔던 영웅무관만 해도 뛰어난 자질의 관원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는 뚝심을 발휘해 비교적 이른 나이에 무림맹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무관 관원 시절 내내 성실했고 한눈을 팔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무관에 다달이 내야 하는 돈이 너무 많았다.

    그 돈은 마을 촌장으로 있던 부친이 인편을 통해 보내주었다.

    늦은 나이에 혼인한 부모님이었다.

    그런 만큼 장남인 자신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다.

    자신을 뒷바라지하느라 가세가 기울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백자안으로서는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

    그렇게 합격한 후 고향 집에 내려가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집에 모여 잔치를 벌였다.

    이후 다시 맹에 복귀한 그는 외성 성곽의 한 초소에서 일 년간 근무를 섰고, 마침 부친 회갑연에 맞춰 휴가를 갔던 것이다.

    하지만 비상 경계령으로 하루 늦게 도착한 게 화근이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피맺힌 한이 되고 말았다.

    ‘제 날짜에 갔다면 어떻게든 미리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백자안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초탈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여동생과 남동생의 죽음은 그에게 뼈에 사무치는 슬픔을 주었다.

    사실 동생들 역시 자질이 뛰어났다.

    하지만 백자안에게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아 그들을 낙양에 있는 무관에 보낼 수 없었다.

    ‘어떻게든 뒷바라지 해주려 했는데······ 소영아. 자룡아. 미안하다.’

    백자안이 눈물을 훔치며 석실에서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뭔가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으음······ 뭐지?”

    백자안이 냄새가 나는 석벽 한 곳을 쳐다봤다.

    백년 넘게 이끼만 먹어 음식의 맛을 거의 잊어버린 그였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식욕을 돋우는 냄새였다.

    천년이끼처럼 내공 상승에 지대한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꼭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석실 안에는 이끼가 없는데 기이한 일이군.”

    백자안이 의아해하며 냄새가 나는 부분을 만졌다.

    석벽들은 모두 특수한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동안 혹시 몰라 여러 차례 두드려봤지만 허사였다.

    하지만 심법이 칠성에 달했기 때문일까.

    내공을 모아 힘껏 두드리자 이전과는 다른 소리가 났다.

    마치 뒤쪽에 빈 곳이 있는 느낌이었다.

    백자안이 천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또 다른 팔대무공인 무명장(無名掌)은 연마하지 못했지만, 장법 역시 이전에 익혔던 육합장(六合掌)이 있었다.

    참고로 그가 무저곡으로 떨어지기 전에 익혔던 무공은 육합계열이었다.

    육합보(六合步), 육합비, 육합장, 육합권(六合拳), 육합지(六合指), 육합검법(六合劍法) 등등.

    강호에 잘 알려져 있는 무공들이었다. 하지만 육합계열 무공은 사실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서 그 위력이 천차만별이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영웅무관에서 기초 무공으로 가르치는 육합계열 무공이었다.

    다른 무관과 달리 영웅무관은 오랜  연구 결과로 그 위력이 뛰어났다.

    그 덕분으로 낙양 십대무관 중 한 곳이 될 수 있었다.

    백자안 역시 육합계열 무공을 익혔으며, 다른 무공은 배우지 않았다.

    고급무공들을 배우기 위해서는 수업료로 막대한 금액을 더 내야 했다. 그만한 여유가 없는 것은 물론이었다.

    게다가 백자안은 육합계열 무공을 좋아했다.

    영웅무관장 말대로 가장 기초적인 것이 궁극에 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연마할수록 위력이 높아졌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바로 무명비급 때문이었다.

    육합계열 무공이 궁극으로 통할 수 있는 것은 맞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무형검의 경지에 달해야 했다.

    무형검이 꿈의 경지라고 생각할 때 아무래도 실전무공 역시 상승무공이 더 위력이 좋은 것이다.

    게다가 육합계열 무공의 가장 큰 단점은 심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여러 경로로 간단한 운기토납법은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내공심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 많은 무림맹 무사들이 맹에 들어온 후 상승내공심법을 배우고 싶어 했다.

    상승심법을 배우게 되면 그때부터는 또 다른 차원의 무공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백자안 역시 영웅무관에서 운기토납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야말로 단전호흡 수준이라 기의 축적은 미미했다.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심법이라 할 수 있는 무명심법을 연마한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기연이었다.

    “육합장으로 한번 쳐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동안 자칫 동굴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석벽을 파괴할 생각은 못 했었다.

    하지만 떠나는 마당인데다가 석벽 뒤에 공간이 있다는 것이 유력한 지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백자안이 무명심법을 칠성까지 끌어올린 후 곧바로 내리쳤다.

    꽝.

    쩍쩍.

    금이 생기자, 연거푸 가격했다.

    콰콰쾅.

    벽이 무너지며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아니! 저것은?”

    백자안이 발견한 것은 바로 한 송이 꽃이었다.

    놀랍게도 새로운 석실 바닥에 꽃이 피어난 것이었다.

    향기는 그 꽃에서 나고 있었다.

    “아, 이런 곳에 저런 꽃이······.”

    백자안이 탄성을 내며 꽃에 다가갔다.

    꽃은 만개하고 있었다.

    절정에 달해 향기를 뿜어내는 것 같았다.

    열매도 하나 열렸는데, 복숭아처럼 탐스러웠다.

    백 년 넘게 과일을 먹어보지 못했던 백자안이 자신도 모르게 열매를 따서 입에 넣었다.

    그때였다.

    꽃 전체에서 금빛이 뿜어 나오더니 석실 안을 가득 메웠다.

    백자안이 놀랄 때 단전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꽃의 열매가 몸속으로 들어가 발생한 결과였다.

    백자안이 급히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무명심법을 운공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복용한 열매가 엄청난 내공 덩어리였던 것이다.

    백자안이 눈을 감고 운공에 매진하며 몸속에 들어온 기운을 다스렸다.

    영약을 복용하듯 천천히 순환시켜 자신의 내공으로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한데 그 양이 끝이 없었다.

    마치 대하처럼 온몸 구석구석 혈도를 따라 흘러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시점이 되자 석실에 가득했던 금빛 기운이 백자안의 몸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늘에 실이 가듯이 열매를 따라 이동한 것이었다.

    백자안이 잠시 눈을 떠보니 금빛을 뿜어내고 있던 꽃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아, 금빛이 바로 꽃의 정화로구나. 결과가 어찌 되든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

    백자안이 다시 눈을 감고 무명심법으로 기운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금빛 기운이 모두 사라졌을 때.

    백자안의 얼굴과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변한 것은 머리카락이었다.

    백발이었던 머리가 젊은 사람처럼 새까맣게 변했다.

    육신 역시 노인의 것에서 젊은이의 것으로 변했다.

    ‘반로환동까지 이루어진 건가.’

    백자안이 놀라면서도 무척 기뻐했다.

    반로환동은 그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뜻하지 않은 현상이 발생했다.

    반로환동이 끝났을 무렵 그의 몸이 급격히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휙휙휙.

    제어를 하려고 했으나 불가항력이었다.

    “으으······.”

    백자안이 신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그의 신형은 쓰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갔다.

    휙휙휙.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 [제1장] 반로환동 2 > 끝

    ⓒ 행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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