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이제 끝을 봅시다.
타탓- 탓-
팽중호가 평원의 중앙으로 몸을 움직였다.
승리에 고취되어 있던 무림맹도,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마교도 모두 팽중호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이미 승패는 결정이 되었습니다.”
내공이 실린 팽중호의 목소리가 이 평원을 울렸다.
넓은 평원에 고르게 들리는 목소리.
“그런데 제가 제안 하나 드리겠습니다. 저와 천마의 대결. 그 대결까지 진행을 하죠.”
팽중호의 말에 마교 측이 일순 동요했다.
무림맹 측에는 이미 말을 전달해 두었으니 동요하지 않았다.
다만, 이 결정에 다들 동조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몇몇은 이대로 싸움을 끝내고 싶어 했으니 말이다.
“어떻습니까?”
팽중호의 물음에 마교 측에서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천마 척한준.
그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나타난 것이다.
“좋습니다. 정말로 바라던 바입니다.”
척한준은 혹여나 팽중호와의 대결하지 못할까 걱정하기도 하였다.
이미 약조한 바가 있었으니 말이다.
앞서 패배하면, 이대로 전쟁을 멈추고 돌아가기로 한 약조.
원래라면 이대로 약조를 지키고 돌아가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이렇게 팽중호가 먼저 나서서 대결을 제안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 대결에서 제가 패하면, 다음으로 한 번 더 마교와 무림맹의 전쟁으로 승패를 가리도록 하죠.”
“아니요. 제가 이긴다고 하여도 마교는 돌아가겠습니다.”
팽중호는 여기서 만약 척한준이 이긴다면, 한 번 더 마교 대 무림맹의 전쟁을 할 걸 제안했다.
그래야 마교 측이 순순히 따를 것 같았으니 말이다.
‘위 소협이 있으니, 무조건 승리하겠지.’
게다가 위지철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기에 이런 제안을 흔쾌히 던진 것이었다.
하지만 척한준은 거절했다.
약조한 것은 약조한 것.
이 전쟁은 분명 자신들이 패배한 것이 맞았으니 말이다.
척한준은 미리 마교에 명령을 내리고 온 직후였다.
자신이 이기던, 지던 마교는 무림에서 물러나 신강으로 돌아간다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팽중호는 딱히 거절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물러가 준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대결은 내일로 하도록 하지요. 다들 준비를 해야 하니 말입니다.”
“예. 그러죠.”
척한준의 말대로 대결은 내일 하기로 하였다.
하루 동안 무림맹과 마교 모두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기든 지든 곧바로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할 시간을 주는 것이었다.
“소가주님.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팽중호가 돌아오자 위지철이 곧바로 다가와 물어왔다.
위지철은 팽중호가 왜 척한준과의 결전을 하려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무림의 안녕을 위해 하지 않아도 될 싸움에 나서는 것이다.
“위 소협. 부탁 하나만 하죠.”
“예.”
“혹시나 제가 잘못되면, 팽가를 좀 부탁합니다.”
“그런 소리 마시고, 반드시 이겨서 오십시오.”
“하핫. 알겠습니다.”
팽중호는 만약 자신이 잘못되어도 위지철이 하북팽가를 보살펴 줄 것임을 확신했다.
그렇기에 웃음을 흘리며 마음을 편안히 먹을 수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천천히 막사로 돌아가는 발걸음.
무림맹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런 팽중호에게로 향해 있었다.
지금 팽중호의 등에서 무림이라는 거대한 짐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닌 척을 항상 하지만, 언제나 무림의 안녕을 위해 힘을 쓰는 사람이었다.
“믿습니다!”
“꼭 이겨서 같이 술 한잔하죠!”
“이기십시오!”
무림맹 무인들이 팽중호를 향해 저마다 한마디씩을 내뱉었다.
척한준과 팽중호의 대결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렇게 말이라도 건네어 응원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것이라도 팽중호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힘을 낼 수 있도록 말이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감사한 마음이 전해지도록 말이다.
“제가 이기면, 모두 다 모여서 술이나 한 잔씩 합시다.”
“예!”
“좋습니다!”
무림맹 무인들을 바라보며 팽중호가 한마디 하고는 그대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위지철과 곽채령이 썼던 지하 공동으로 신형을 옮겼다.
넓은 공동에 홀로 선 팽중호.
“후우.”
짧게 숨을 내뱉었다.
긴장감.
그것이 지금 팽중호를 감싸고 있었다.
아무리 팽중호라고 해도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척한준과의 대결.
이것은 정말로 목숨을 건 싸움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긴장감이 싫지는 않네.”
팽중호는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기분 좋은 긴장감.
온몸의 감각이 하나하나 다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무인으로서의 감각.
“자, 그럼 몸을 좀 풀어 둘까.”
뚜둑- 뚜두둑- 뚝뚝-
팽중호는 멸뢰진천도는 뽑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풀기 시작했다.
척한준과의 대련 전에 힘을 뺄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저 가볍게 땀을 흘리는 정도면 충분했다.
내공을 제한하고 움직이자 금방 땀이 나오기 시작했다.
“좋아. 몸은 이 정도면 풀어졌고.”
뭄을 다 푼 후에 팽중호는 그대로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벌러덩 자리에 누웠다.
이대로 누워서 운기와 명상에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팽중호의 경지라면 꼭 가부좌를 틀지 않아도, 어느 자세에서도 운기와 명상이 가능했다.
가부좌를 트는 것은 그저 오랜 습관일 뿐.
‘드디어 마지막이다.’
이제 정말 이 기나긴 싸움의 마지막이 다가왔다.
내일 척한준과의 싸움이 끝이 나면 어떤 식으로든 이 긴 싸움이 끝이 날 것이다.
새로운 몸으로 들어온 후에 하북팽가를 원래의 모습으로 부흥시키려고 하였던 일이, 이렇게까지 왔다.
‘이번에는 정말로 일이 끝나면,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야지.’
이번 일만 좋게 끝이 난다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쉴 생각이었다.
사실상 새롭게 환생해서 제대로 뭘 해 보지도 못하였다.
처음부터 이리저리 일들이 계속해서 있었으니 말이다.
‘이겨야 할 이유가 계속 생각나는군.’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떠 올랐다.
이세경.
전생에는 여인을 만나지도 않았다.
그럴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 생에는 이세경이라는 연인이 생겼다.
계약 연인으로 시작해 이제는 엄연히 혼인을 앞둔 연인이 되었다.
그런 이세경을 놓아두고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흐으음……. 잠을 자야 하는데, 잠이 오려나 모르겠네.”
스으윽-
한참을 운기와 명상에 빠져 있던 팽중호가 다시금 막사로 올라왔다.
이미 해가 진 늦은 밤.
팽중호가 올라와서 쉴 것을 생각해서, 이미 이 막사에는 간이 침상이 모두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럼. 제가 재워드리겠습니다. 가가.”
“어?!”
갑자기 막사 밖에서 들려오는 아주 익숙한 목소리.
아무리 팽중호라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였다.
“세경……. 여긴 어떻게……?”
“위 소협께서 데리고 와 주셨습니다.”
위지철은 팽중호가 공동에 있을 때 하북팽가로 전력으로 달렸다.
지금 팽중호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바로 이세경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위지철은 찰나의 팽중호가 느낀 불안 같은 것을 읽은 것이다.
그래서 그런 팽중호의 불안을 없애주기 위해서 이세경을 데리고 이렇게 온 것이었다.
“이것 참……. 고마워해야 해야 하는 건지…….”
팽중호는 이 전장에 이세경이 오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굳이 전장의 모습들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무림맹이 승리한 분위기라고 하여도, 많은 이들이 죽었다.
슬픔과 기쁨, 광기와 투기가 어우러진 전장은 이세경에게 어울리는 곳이 아니었다.
“저도 상행을 하며 많은 경험을 해 보았습니다. 이런 수라장과 같은 전장도 당연히 경험해 보았구요.”
“하하. 미안. 내가 세경을 너무 약하게만 봤어.”
이세경은 신조상단이라는 거대한 상단을 운영하며, 정말 볼 것, 못 볼 것을 많이도 보았다.
당연히 이런 수라장도 몇 차례 본 적이 있었다.
팽중호는 자신이 그런 이세경을 너무 약하게 보고, 안으로 감싸려고만 했다는 것을 깨닫고 사과했다.
이런 행동은 결코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으니 말이다.
“아시면 되었습니다. 자. 이제 잠자리에 드시죠.”
차악-
이세경이 손수 팽중호의 침상에 이불을 펴 주었다.
팽중호는 거절치 않고 그대로 침상으로 몸을 향했다.
스윽- 털썩-
팽중호가 침상에 눕자 그대로 이세경이 다시금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애가 된 것 같은 기분이야.”
“호호호.”
팽중호는 이세경이 온 것만으로도 신기하게 마음이 편해지고 있었다.
그 어떤 명상이나 운기로도 이루지 못한 것을 지금 이세경이 이루어 주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내일 살아서 올 거 같아?”
“당연하지요.”
“정말로?”
“정말로요.”
팽중호가 진지한 눈으로 이세경에 물었고, 이세경 또한 진지한 눈으로 답했다.
이세경은 정말로 팽중호가 살아 돌아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었다.
“좋아. 그러면 이번 일만 끝나면, 같이 어디라도 놀러 가자.”
“흠. 시간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없는 시간이야 만들면 되지.”
“한번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호호.”
그렇게 조금은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하면서 가벼운 대화들을 나누었고, 천천히 팽중호는 잠에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이세경이 함께 누워 팽중호를 살포시 껴안은 채로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
* * *
결전의 날 아침.
그날 아침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구름이 몇 점 하늘에 떠 있고, 햇살이 땅을 비추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까지 부는 꽤 상쾌한 아침.
하지만 그런 아침임에도 지금 무림맹과 마교가 서 있는 평원에는 더할 나위 없는 긴장감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런 날씨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팽팽한 긴장감.
그것은 지금 평원 중앙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선 두 사람 때문에 생겼다.
도신(刀神) 팽중호.
천마(天魔) 척한준.
천하제일(天下第一), 아니 어쩌면 고금제일(古今第一)을 가릴 싸움.
여기서 이기는 사람이 속한 곳이 사실상 이 전쟁의 승리자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어찌 긴장감이 생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척한준이 팽중호를 바라보며,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팽중호와의 싸움.
정말로 척한준은 이날을 너무나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저도 뭐, 기다리긴 했습니다.”
팽중호는 사실 척한준과의 싸움 자체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척한준과의 싸움이 끝이 나면, 이 전쟁인 끝이 날 것이기에 기다린 것이었다.
“이렇게 마주 보니 정말로 너무나 재밌는 싸움이 될 것이란 것이 느껴집니다.”
“저는 썩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하하하. 재미있으실 겁니다. 분명히.”
스릉-
척한준이 먼저 검을 꺼내어 들었다.
천마검.
이제 이 검의 주인은 바로 척한준이었다.
“후.”
스릉-
그에 맞추어 팽중호가 멸뢰진천도를 꺼내어 들었다.
오늘따라 멸뢰진천도의 감촉이 묵직하게 손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우우우우웅-
주인의 마음을 읽어서 그런 것일까?
멸뢰진천도가 낮게 울기 시작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이제 끝을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