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모든 것은 기초에서 시작된다.
팽중호는 전생에 자신이 처음으로 하북팽가에 들어왔을 때를 생각했다.
추운 겨울 하북팽가 앞에 쓰러져 있던 자신을 그때의 가주였던 팽주천이 거두어 그의 아들이 되었다.
처음에는 팽가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정말 밤을 새워서 무공을 익혔다.
자신이 쓸모없다면 쫓겨날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너무 급하지 말거라. 누가 뭐라 하여도 내 아들이니 말이다.’
팽주천은 아마 자신이 왜 무공을 죽어라 익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걸 아는 팽주천은 자신에게 더욱 많이 관심과 사랑을 주었고, 그때부터 무공을 익히는 이유는 팽주천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그때의 자신은 강해졌다.
‘세가 제일의 고수가 되었구나. 기쁘다.’
아마 이 이야기를 들은 날이 팽중호의 전생에 가장 기쁜 날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간의 모든 노력이 인정을 받은 기분.
‘네가 앞으로 소가주가 되어, 후에 세가를 이끌 거라.’
‘아닙니다. 저는…….’
팽주천에게는 진짜 피를 이은 아들이 있었다.
그가 소가주의 자리를 잇는 것이 맞을 터.
그렇기에 전생의 팽중호는 완강히 소가주 자리를 거절했다.
‘네가 가장 적임자다.’
하지만 팽주천은 강하게 이것을 추진시켰는데, 그 때문에 하북팽가 내에서도 많은 말이 나왔다.
팽가의 피를 잇지 않은 이가 소가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특히나 장로회에서 이런 반대가 심했고, 그것은 그대로 팽주천에게 큰 압박으로 다가갔다.
‘내가 소가주가 되면 안 된다.’
전생의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망나니와 같은 삶을 살기 시작했다.
팽주천이 이 모습에 실망해 자신을 소가주 자리에서 내칠 것이라 생각하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망나니처럼 하고 다녀도, 장로회의 압박이 거세져도 팽주천은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결국 내가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교의 진격이 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무림에서 사라지기 최적의 기회.
그래서 천마를 향해 무작정 달려간 것이다.
‘이것으로 하북팽가는 안정될 것이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전생한 후에 마주한 하북팽가의 모습은 그것과 완전히 달랐다.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이다.
“나는 그저 도망친 것일 뿐이었다.”
팽중호는 자신의 선택이 그저 도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북팽가에 도움이 되겠다는, 팽주천의 은혜를 갚겠다는 마음에서 도망친 것이다.
“다시금 처음의 마음을 다잡자.”
팽중호는 그때의 마음을 다시금 상기시키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처음의 마음을 다잡는 것.
그것은 역시나 처음 무공을 익힐 때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처음 무공을 익힐 때는 이렇게 명상을 하지는 않았다.
“죽어라 수련을 했지.”
팽중호는 개인 연무장에 섰다.
연무장에 서서 몸을 움직이는 것.
단순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은 사실 꽤 오랜만에 하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일정 경지에 오르고 나서는 조금 소홀했어.”
스윽-
팽중호는 멸뢰진천도 마저 내려 놓고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기본적인 기초 체력 수련.
이제 막 무공에 입문한 이들이 익히는 움직임.
팽중호는 그것을 정성을 다해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후욱- 훅- 후우욱- 훅-
힘 있고 절도가 느껴지는 동작.
그저 기본적인 동작이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차원이 달랐다.
“후우. 후우.”
내공을 제한하고 펼쳤기에, 한참을 움직인 팽중호가 더운 숨을 내뱉었다.
그의 몸에 흐르는 땀.
팽중호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흘리는 땀이었다.
“역시 땀이 나야, 움직인 맛이 나지.”
생사경에 다다른 신체는 팽중호가 원했다면 땀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팽중호는 일부러 그것을 제한했다.
땀을 흘리기 위해서 말이다.
“자, 그럼 다음은…….”
이번에는 멸뢰진천도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 횡 베기와 종 베기만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이것만 수련했으니 말이다.
휘익- 휘익- 휘익- 휘익-
정말 단순한 반복.
지켜보는 이가 있었더라면 지루해 마지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팽중호의 얼굴에는 지금, 즐거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 이 느낌이지.’
오랜 감각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팽중호는 이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모든 것은 기초에서 시작된다.’
모든 초식은 결국 이 베기에서 비롯되는 것.
이 단순한 베기가 모든 초식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기본을 소홀해서는 안 된다.
“좋아. 계속해 볼까?”
* * *
곽채령은 최근 큰 고민 두 가지에 휩싸여 있었다.
‘가가께서 너무 빨리 강해지셔.’
첫째는 위지철이 너무나도 빠르게 강해져 그를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현경의 경지까지는 엄청난 재능으로 빠르게 따라온 그녀지만, 그 이상의 경지인 생사경은 아직 그녀에게 요원했다.
그래서 곽채령은 조급함이 났다.
위지철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에게서 멀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또 다른 큰 고민 하나는 그녀에게 쏟아지는 기대였다.
‘무림맹 서열 삼 위. 청뢰신장 곽채령.’
지금까지는 이것의 무게를 잘 견디고 즐기던 그녀였지만, 이제 무림의 명운이 걸린 큰 싸움이 다가오니 이것이 가지는 무게감이 너무나 무겁다고 생각했다.
마교와의 정마생사회는 자신 하나의 죽음으로 끝이 나지만, 이 싸움은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죽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녀를 무겁게 만들었다.
“이겨 내야 해. 어떻게든 이겨 내야 해.”
곽채령은 홀린 듯이 이겨 내야 한다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계속해서 수련에 몰두했다.
지금 저 두 가지 고민을 모두 해결할 방법은 강해지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수련을 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이 고민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강해져야…… 강해져야만 해…….’
그리고 이런 생각들은 지금 그녀도 모르게 그녀를 점점 심마(心魔)에 빠지게끔 만들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아무리 높은 성취에 있다고 하더라도, 심마에 빠지게 되면 큰일이 날 수가 있다.
하지만 어디 심마라는 것이 안다고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던가?
게다가 지금 곽채령은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든 상태이기에, 마음의 시야가 완전히 좁아져 있었다.
더욱더 깊은 심마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강해……져야……해! 크윽.”
콰지지지직- 콰직- 콰지지지직-
심마에 빠져든 곽채령의 몸에서 뇌기가 심상치 않게 튀기 시작했다.
전혀 제어가 안 되고 마구잡이로 튀는 모습.
곽채령의 주변에 있던 것들이 이 뇌기에 의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퍽- 퍼석- 퍼퍽- 펑-
“곽매!”
그때 위지철이 곽채령이 있는 곳에 나타났다.
심상치 않은 기의 파동을 느끼고 달려온 것이었다.
‘주화입마 초기다.’
위지철은 지금 곽채령이 심마에 빠져, 주화입마의 초기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느꼈다.
주화입마에 빠져 버리면 내공을 쓸 수 없게 되거나, 자칫 목숨까지 잃게 된다.
‘그렇게는 둘 수 없다.’
하지만 위지철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주화입마 상태에서는 조금만 잘못해도, 일이 더 크게 벌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급하다고 마구잡이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꺼내 줄게. 곽매.”
스릉-
위지철은 태극신검을 꺼내어 들고 천천히 곽채령에게 다가갔다.
콰지지직- 콰지직-
다가오는 위지철을 향해 사납게 튀어 오르는 뇌기.
현경의 경지를 넘은 곽채령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뇌기이니 당연히 그 힘이 엄청났다.
위지철은 그 뇌기를 태극신검으로 그대로 흘려 내며 곽채령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으으…….”
곽채령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심마가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곽체령 스스로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온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참아.”
바로 곽채령의 뒤까지 도달한 위지철.
곽채령의 몸에서는 더욱 강렬한 뇌기가 터져 나와 위지철을 위협했지만, 위지철은 그것들을 모두 흘려 내며 아주 살포시 곽채령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스으으으윽-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곽채령의 등을 타고 들어가는 위지철의 기운.
물론 그 와중에도 곽채령의 거친 뇌기는 계속해서 위지철을 향해 쏘아져 나왔는데,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한쪽 손을 댄 채로 모든 뇌기를 흘려 낼 수는 없기에, 위지철의 몸에 조금씩 뇌기로 인한 상처가 생겨나고 있었다.
스으으으으으윽-
하지만 위지철은 손을 떼지 않았다.
계속해서 내공을 불어넣어 불안정하게 날뛰는 곽채령의 내공들을 포용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라면 두 사람의 내공이 다른 성질이 아니었기에, 쉽게 포용되어 융화된다는 점이었다.
파지지지직- 파짓- 파지지직-
거칠게 날뛰던 곽채령의 뇌기가 점점 안정되기 시작했다.
심마에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단계가 아니다.
그렇기에 위지철은 계속해서 쉬지 않고 곽채령에게 내공을 불어넣어 주었다.
한참이나 이 상황이 지속되었다.
“하아. 하아.”
위지철이 가쁜 숨과 함께 천천히 손을 떼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곽채령이 스스로 헤쳐 나오는 것뿐.
“이겨 낼 수 있어.”
위지철은 곽채령의 옆을 떠나지 않고 서서 기다렸다.
곽채령이 심마에서 완전히 벗어나 눈을 뜰 때까지 말이다.
“쿨럭! 쿨럭…….”
그렇게 또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곽채령은 입에서 시커멓게 죽은 피를 토해 내며 눈을 떴다.
그저 내상을 입는 것으로 다행히도 심마는 벗어난 것이다.
“곽매. 괜찮아?”
“아아……! 가가! 괜찮아요?”
곽채령이 깨어나는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위지철.
하지만 곽채령은 지금 위지철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몸에 성한 곳이 없었으니 말이다.
곽채령은 그것이 지금 자신 탓임을 깨달았다.
강해져야 한다는 압박감 탓에 심마에 들어 주화입마에 빠져들었고, 그것을 구해 주기 위해 위지철이 지금 이런 상처를 입은 것이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나는 괜찮아. 이런 상처는 금방 나을 거니까.”
가벼운 상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떻게든 치료할 수는 있을 터였다.
“곽매. 너무 조급해하지 마.”
“하지만 제가 힘을 내야…….”
“천천히 가는 것이, 빨리 가는 길일 때도 있어……. 내가 곽매 몫까지 강해질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가가…….”
와락-
곽채령이 위지철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렇게 잠시간 서로 끌어안고 있던 두 사람.
“저를 떠나시면 안 돼요…….”
“당연하지. 내가 곽매를 왜 떠나. 평생 곁에 있을게.”
그렇게 한창 두 사람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흠흠. 계십니까.”
문밖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두 사람은 재빨리 떨어졌다.
“소가주님. 들어오십시오.”
“좋을 때 온 것 같아, 이거 죄송합니다.”
지금 이곳에 나타난 이는 바로 팽중호였다.
팽중호는 위지철을 찾아 무림맹으로 온 길이었는데, 곽채령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는 이야기에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알려 드릴 것이 있어서 온 것인데……. 조금 천천히 올 걸 그랬나 봅니다. 크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