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이 길로 쭉 가 볼까
항주에 도착한 팽중호와 이세경.
정말이지 놀라운 속도로 도착한 이곳에서 둘은 오붓하게 관광을 했다.
큰 전쟁을 앞두었다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 모습.
팽중호로서는 일부러라도 이렇게 쉬는 것이었다.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해 말이다.
아무리 팽중호라도 이런 싸움은 당연히 긴장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세경도 너무 긴장했고 말이야.’
이세경도 당연히 팽중호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커다란 전쟁.
이 전쟁에서 어떤 것을 잃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그보다 저분은 아시는 분입니까?”
조금 전까지 화기애애하던 팽중호와 이세경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하나 흘렀다.
팽중호가 객잔에 들어서자 밝게 인사를 해 오는 여인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신님.”
“아. 만송상단의 상단주님이시군요.”
인사를 해 온 여인은 바로 만송상단의 상단주인 도혜란.
이전에 소가주 경합 때 만나서 거래했던 인연이 있는 그녀였다.
그녀는 팽중호가 만송객잔에 들어서자마자 인사를 하기 위해 이렇게 나온 것이었다.
‘눈빛이 그 사람들과 같다.’
이세경은 인사를 해 오는 도혜란을 보자마자 곧바로, 그녀가 새로운 연적임을 느꼈다.
지금까지 봐 왔던 그녀들과 눈빛이 같았으니 말이다.
팽중호를 바라보는 눈빛이 보통이 아니었다.
“저는 신조상단의 이세경입니다.”
이세경이 먼저 도혜란에게 인사를 했다.
순간 이세경을 바라보는 도혜란.
그녀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반갑습니다. 도혜란입니다.”
도혜란도 물론 팽중호와 이세경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팽중호가 이세경 단 한 명하고만 혼인하지는 않을 터다.
하북팽가가 더 힘을 뻗으려면, 분명 많은 이와의 혼인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오신 것입니까? 분명…….”
도혜란은 이세경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팽중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분명 그녀가 들은 정보에 의하면, 팽중호는 하북성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찌 지금 이곳 항주에 있단 말인가?
그녀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었다.
“좀 빨리 달려왔습니다.”
팽중호가 다리를 툭툭 치며 말하였다.
도혜란은 잠깐 생각하다가, 팽중호가 지금 경신법으로 이곳까지 달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
때문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북성에서 절강성까지의 거리가 얼마인데 그것을 달려서 온단 말인가?
팽중호이기에 가능한 일.
도혜란의 눈이 더욱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만 들어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가가.”
도혜란의 눈빛을 본 이세경이 팽중호의 옆에 더욱 달라붙으며, 이만 방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아, 그래. 상단주님 저희 방을 두 개…….”
“아니요. 어제처럼 하나만 쓰도록 하지요.”
“응?”
지금 이곳은 방이 넉넉히 있다.
그런데 왜 하나만 쓴단 말인가?
팽중호가 의아함을 가득한 표정으로 이세경을 바라보았는데, 그 순간 이세경의 손가락이 그대로 팽중호의 옆구리를 찔렀다.
쿡-
“큽.”
갑자기 들어온 손가락에 팽중호가 소리를 질렀다.
지공을 익힌 후 매서워진 이세경의 손가락.
그것도 완벽한 무방비 상태에서 찔렸으니 당연했다.
“하나만 하겠습니다.”
“그, 그래. 그러자.”
팽중호는 아직까지 영문은 모르겠지만, 이세경이 원하는 것 같으니 그러자고 하였다.
대신 방을 좀 크고 좋은 곳으로 부탁했다.
“호호. 알겠습니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도혜란은 순순히 방을 준비해 주겠다고 하였다.
여기서 무언가를 더 하려고 하면, 부작용이 생길 것을 잘 아는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분명 시간은 아직 많고 많다.
팽중호에게는 천천히 다가가도 문제되지 않았다.
“가자.”
“예.”
그렇게 팽중호와 이세경이 안내해 준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크고 넓은 방.
사람 대여섯이 잠을 자도 충분할 크기였다.
“비싼 곳인가 보네.”
“예. 이 정도면 저희 신조상단이 운영하는 객잔 중에서 가장 좋은 곳과 같습니다.”
주변에 있는 물건들 전부가 고가품이었다.
원래라면 아무에게나 내어주지도 않는 방이지만, 팽중호이기에 특별히 내어준 방이었다.
“오늘은 침상이 넓어서 나눠서 자면 되겠다.”
이 방에 있는 침상의 크기는 지금까지 팽중호가 보았던 그 어떤 침상보다도 컸다.
이 정도 크기라면 둘이서 잘만 나눠 자면 문제없을 듯싶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씻고 오겠습니다.”
“으, 응.”
먼저 씻고 오겠다는 이세경의 말에 팽중호가 얼굴을 조금 붉히며 대답했다.
씻고 오겠다.
이 말에 왜 이리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몰랐다.
‘나도 참…… 문제군.’
전생까지 합하면 그래도 꽤 인생을 살았건만, 이런 방면에서는 완전히 젬병이었다.
팽중호는 이런 자신의 생각을 씻어 내기 위해 가만히 앉아서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가만히 마음을 비우고 계속해서 운기를 하던 그때.
“가가. 이제 씻으시지요.”
“알겠어.”
스윽-
감았던 눈을 뜬 팽중호.
그리고 팽중호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입을 벌린 채로 이세경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촉촉하게 젖은 머릿결을 찰랑이며 나타난 이세경은 그야말로 선녀가 따로 없었다.
‘그랬지…… 이렇게나 미인이었지.’
팽중호는 지금 다시금 이세경이 천하에 꼽을 미녀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그런 미녀와 함께 있는 것이다.
조금 전 다스렸던 마음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니, 예뻐서.”
“……!!”
팽중호의 대답에 이번에는 이세경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저렇게 대놓고 예쁘다고 말을 하니, 당연히 얼굴을 붉힐 수밖에.
“어, 어서 씻으시지요.”
“응.”
그렇게 팽중호가 금방 씻은 후에 나타났다.
두 사람은 잠시간 어색한 침묵으로 서로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다가, 간신히 침상에 나란히 몸을 뉘였다.
그 넓은 침상에 서로 끝자리에 자리잡은 둘.
“잘 자.”
“가가도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였건만, 두 사람은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한 시진, 두 시진…….
시간이 한참이나 흘렀건만 잠들지 못한 두 사람.
그때였다.
스으윽-
이세경이 팽중호의 곁으로 갑자기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대로 팽중호의 품에 포옥 안겼다.
“그, 그…….”
“이대로 잠들 겁니다.”
“부, 불편하지 않아?”
“아니요. 이래야 잠들 것 같습니다.”
팽중호는 이세경을 밀어내지 않고, 그냥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은은하게 느껴져 오는 향기와 체온.
절로 마음이 편안해져 왔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편안해지니, 몸의 감촉이 다시금 살아난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밀착한 이세경의 몸.
“저, 저기.”
“코오…….”
팽중호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였는데, 벌써 이세경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작게 미소 지은 팽중호는 내공을 조금씩 이세경에 흘려 주었다.
좀 더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가볍게 잠든 이세경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잘 자.”
* * *
다음날 아침.
이제 팽중호와 이세경은 다시금 하북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때, 도혜란이 다시금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돌아가시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밤은 편안하셨는지요?”
“좋았습니다.”
팽중호의 대답에 이세경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자신이 팽중호의 몸에 완전히 착 붙어 있던 것이 생각나서였다.
“호호. 좋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아침부터 찾아오셨습니까?”
“이걸 전해 드리려고 기다렸습니다.”
“음?”
도혜란이 팽중호에게 옥으로 만든 하나의 상자를 내밀었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옥갑.
다만, 겉에 아무런 장식이나 글도 없는 그저 옥으로만 만들어진 상자였다.
“이것을 왜 제게 주려고 하십니까?”
“한번 열어 보시지요.”
딸칵-
도혜란의 말에, 팽중호는 옥갑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안에 보이는 무언가 무수한 글자들.
전부 마구잡이로 쓰인 듯한 글이었는데, 옥갑의 정중앙에 쓰인 글자는 알아볼 수 있었다.
‘팽가(彭家).’
팽가라 쓰인 글자.
이 무림에 팽가가 하나뿐이겠냐마는 팽중호는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하북팽가의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디에 맞는 것인지도 말이다.
‘신옥팽호상(神玉彭虎像).’
신옥팽호상을 넣어 두는 옥갑인 것이다.
“이번에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되었는데, 때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냥 주시는 겁니까?”
“후훗. 물론입니다. 도시님 덕분에 저희 신풍상단이 이렇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신풍상단은 팽중호가 다녀간 이후로 절강제일 상단이 되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러니 이런 것쯤은 얼마든지 팽중호에게 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팽중호는 그렇게 옥갑을 챙겨 들고, 이세경과 함께 항주를 벗어났다.
이른 아침부터 달려가는 것이니, 아마 저녁에는 하북성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한번 달려 봤으니 더 빠르게 갈 수 있었다.
“자. 더 빠르게 간다!”
“예!”
파아앗-
팽중호와 이세경의 신형이 엄청난 속도로 절강성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 *
팽중호가 다시금 하북팽가로 돌아왔다.
아직까지 마교와의 전쟁 전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팽중호는 이제 혼자만의 준비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 해야 할 일.
“어디 보자…….”
팽중호는 고이 보관해 두었던 신옥팽호상을 꺼냈다.
그리고 이번에 받아온 옥갑으로 가지고 갔다.
딸칵-
옥갑을 열고 그 안으로 신옥팽호상을 넣었다.
딱 맞게 들어가는 신옥팽호상.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흐음…… 아무리 봐도 그저 보관만 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옥갑에 쓰인 수많은 글자들.
그것들이 그저 이유 없이 쓰였을 리는 없었다.
그냥 놓는 것이 아니라면, 남은 방법은 하나 아니겠는가?
파지직- 파지지지직-
팽중호는 곧바로 혼원벽력신공을 운용해 내공을 흘려 넣었다.
옥갑과 신옥팽호상을 타고 도는 뇌기.
그리고 드디어 비밀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이거였군.”
뇌기를 머금은 신옥팽호상이 빛을 내기 시작했고, 그 빛이 상자에 있는 글자들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빛을 받아 빛나는 글자들과 빛나지 않는 글자들이 나뉘었다.
빛을 내는 글자들.
팽중호는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가…… 이게 혼원벽력신공과 혼원벽력도의 오의(奧義)인가…….”
쓰여 있던 글은 혼원벽력신공과 혼원벽력도를 하나로 관통하는 오의에 관한 것이었다.
스윽- 텁-
팽중호는 그대로 다시 옥갑을 닫아 버렸다.
오의는 알았지만, 솔직히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깨달은 내용이니 말이다.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좋을 뻔하긴 했겠네.”
다만, 그렇다고 아무런 도움이 없지는 않았다.
자신이 생각하고 깨달은 것이 맞는 길이란 것을 확인했으니 말이다.
“그럼 이 길로 쭉 가 볼까.”
팽중호는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빠져들어 갔다.
오늘 하루는 다시 천천히 무공을 돌아보고 또 돌아볼 생각이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새로운 것들이 보이고, 또 다른 깨달음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이제는 앞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보며 나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미흡하다. 그러니 마치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수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