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그럼 우리 떠날까?
무림맹 회의는 아주 열띤 분위기로 이루어졌다.
다들 정말 수없이 많은 의견을 피력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 그중에서 쓸 수 있는 옥석을 골라내는 작업은 필요했다.
“가능한 것들은 제가 추려서 정리하겠습니다.”
옥석을 고르는 정리는 군사인 사마운이 맡기로 하였으니, 문제는 없을 터였다.
다만, 그 혼자서 모든 것을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터.
팽중호는 곧바로 하북팽가에서 장춘오를 불렀다.
이미 전에도 함께 일을 했었기에, 두 사람은 금방 합을 맞춰 일을 진행할 터였다.
“자. 그럼 이제 이야기는 끝이 났고, 보름 동안 각자의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예?”
회의가 슬슬 끝나갈 무렵.
팽중호가 갑자기 각자의 시간을 보내라고 하자, 모인 이들이 모두 의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전쟁이 코앞인데, 각자의 시간을 보내라니?
당연히 지옥과 같은 수련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말이다.
“각자 수련을 하셔도 좋고, 대련을 하셔도 좋습니다. 그저 방에서 몸을 쉬는 것도 좋고, 술을 마시는 것도 좋습니다. 가족을 만날 분은 만나고 오셔도 좋고요. 보름은 알아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후회 남지 않도록.”
사실 보름이라는 시간에 수련으로 극적인 성장은 기대하기 힘들다.
차라리 그 시간 동안 각자가 하고 싶었던 일이나, 해야 할 일들을 해서 후회와 미련을 줄이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지막 전쟁에서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니 말이다.
“그럼. 보름 후에 봅시다.”
이것으로 무림맹 대회의를 마쳤다.
다들 여러 가지 표정을 가지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몇몇은 빠르게, 또 몇몇은 느리게 말이다.
“나도 움직여 볼까나.”
팽중호도 발걸음을 움직였다.
미리 생각해 둔 일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처음으로 팽중호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하북팽가.
팽중호는 쉬지도 않고 빠른 발걸음으로 하북팽가로 달려왔다.
“그래 일이 바쁘지 않느냐?”
“아직 바쁘기 전입니다.”
팽중호가 제일 처음 찾아간 이는 팽자성이었다.
마지막 큰일을 하기 전, 얼굴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가족이니 말이다.
“다들 이제 마지막이라고 하더구나.”
“아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겠지?”
“분명 쉽지 않을 겁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라기에는 조금 딱딱한 대화.
처음 이 몸으로 다시 환생했을 때에는 가족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래도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런 대화로도 충분히 마음은 전달되었다.
“그래. 돌아올 수는 있느냐?”
“물론 돌아올 겁니다.”
“하하, 그것이면 되었다.”
돌아올 수 있다는 확답.
팽자성은 팽중호에게 그 말 한마디만 들었으면 충분했다.
“다시 돌아와서 누릴 건 다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뤄 놓은 게 얼마인데.”
“그래. 네가 다 이뤄 놓은 것이니, 충분히 누려야지.”
그렇게 팽중호는 팽자성과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팽중호가 환생을 한 후로 가장 긴 대화였다.
어느덧 해가 기운 어두운 시각.
“그럼 날도 늦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았구나. 피곤할 터인데.”
“하하……. 그럼.”
팽자성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는 팽중호.
팽자성은 그런 팽중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무나 커졌구나.”
자신의 아들이지만, 지금의 팽중호는 자신을 아득히 뛰어넘은 거인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이끌어 주고, 보호해 주어야 하건만, 오히려 그 반대의 입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지.”
지금에 와서 어차피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니, 그 조금 있는 일이라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후에 팽중호가 이 하북팽가를 물려받을 때, 짐은 되지 않아야 하니 말이다.
* * *
다음 날.
팽중호가 아침부터 찾아간 사람.
그것은 이세경이 아니었다.
하북팽가의 각주들을 먼저 찾아갔다.
그들을 만나서 각자 다들 간단하게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가 마교는 막아 낼 테니까, 그 후에도 힘을 낼 수 있도록 힘을 내주십쇼.”
팽중호가 각주들에게 공통적으로 말한 이야기였다.
정마대전 그 후를 준비해 달라는 부탁.
각주들은 이 부탁에 저마다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들은 지금 팽중호의 말이라면, 죽으라면 죽을 정도의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팽중호가 그들에게 지원해 준 것이 많았으니 말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말이다.
“도수, 구준 너희 둘이 맡은 일이 크다.”
각주들 중 마지막으로 만난 이들은 팽구준과 도수.
두 사람은 지금 텅 비어 버린 하북팽가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지금 이 정마대전의 틈을 이용해서 사파들이 횡행을 하고 있었다.
비어 버린 곳이나 전력의 공백이 생긴 곳을 그들이 접수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감히 팽중호가 있는 하북팽가를 건드리려는 이들은 없었지만, 간혹 정신 나간 이들은 있는 법이다.
몇 차례 그런 이들이 하북팽가에 나타난 적들이 있었는데, 팽구준과 도수가 모두 정리하였다.
그러니 지금 이런 중요한 결전에 앞서 둘이 맡은 일이 꽤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집안이 평안해야 밖에서 편하게 일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정마대전이 끝나도 너희가 할 일이 많으니까……. 자.”
팽중호가 두 사람에게 책 한 권씩을 건네었다.
‘혼원벽력신공.’
“이, 이건…….”
“이걸 왜 저희에게…….?”
하북팽가의 직계들에게만 전해지는 무공인 혼원벽력신공이다.
그런데 그것을 왜 자신들에게 준단 말인가?
“너희가 이제 하북팽가의 기둥이니까 주는 거다.”
팽중호가 두 사람에게 혼원벽력신공을 전하는 이유.
사실 지금 팽중호말고는 혼원벽력신공을 이을 사람이 없다.
그 상황에서 만약 정마대전에서 잘못된다면, 혼원벽력신공의 맥이 끊어질지도 모르는 일.
그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도수와 팽구준이라면 훌륭하게 이 맥을 이어 줄 것이고, 또한 두 사람이라면 이것을 전해 주어도 무리는 없었다.
둘은 하북팽가의 직계와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감사합니다! 주군!”
“감사합니다!”
“그래. 열심히 해라.”
그렇게 도수와 팽구준까지 만난 팽중호.
이제 하북팽가에서 만날 사람은 딱 한 명이 남았다.
“기다렸지?”
“예. 아주 목이 빠지라 기다렸습니다.”
“하하…….”
마지막으로 만날 이는 이세경.
팽중호는 일부러 그녀를 가장 마지막으로 두었다.
“제일 오래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이해해 줄 거야?”
“……알겠습니다.”
팽중호의 말에 이세경이 얼굴을 조금 붉힌 채로 대답했다.
사실 그녀도 팽중호가 자신과 시간을 오래 보내고 싶어 제일 마지막에 만나러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직접 들으니, 기분이 조금 들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 그럼 우리 떠날까?”
“예? 어디를?”
“항주.”
“예?”
항주는 절강성에 위치해 있다.
절대로 가까운 거리가 아닌 곳.
마교와의 전쟁이 보름도 남지 않은 지금 다녀오기에는 분명 먼 거리였다.
아무리 마차로 빠르게 달린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래 말래?”
“가, 가고 싶습니다.”
“좋아. 그럼. 간다.”
“예, 옛?”
와락-
팽중호가 이세경을 번쩍 안아 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란 이세경.
하지만 놀라움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팟- 파아아아아앗-
“어맛!”
주위의 풍광이 엄청난 속도로 바뀌고 있었다.
팽중호는 입가에 미소까지 지은 채로 가볍게 달리는 것인데도 말이다.
이세경은 이것이 정말 축지법이 아닐까 싶었다.
‘따뜻하다.’
이렇게 빠르게 달리는 중임에도 이세경에게는 조금의 맞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팽중호가 지금 그녀를 안은 채로 기의 막을 쳐서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엄청난 거리를 이동한 팽중호.
품에 안겨 있는 이세경은 그런 그가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가가.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응? 전혀 안 힘들어.”
“하지만 지금 저를 안고…….”
“가벼워서 안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정말로 지금의 팽중호에게 이세경의 무게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자. 오늘은 저기서 쉬어 가자.”
“네.”
출발한 시간 자체가 늦었기에 해가 떨어져 중간에 잠깐 쉬어 가야만 하였다.
거침없이 달리던 팽중호가 멈춘 한 마을.
그리 크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다.
끼익-
마을의 객잔에 들어선 팽중호와 이세경.
두 사람은 우선 식사를 먼저 시작했다.
달리는 동안 식사를 하지 못했으니, 꽤 배가 고픈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쯤일까요?”
이세경은 갑자기 지금 이곳이 어디쯤인지 궁금해졌다.
엄청 빠르게 달려왔다는 것은 느꼈지만, 얼마나 빠른지에 대해서는 감이 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세경은 점소이에게 이곳이 어디인지를 물었다.
“혹시 여기가 어느 성인지 알 수 있습니까?”
“예? 여기는 강소성입니다만…….”
“?!”
강소성?
계속해서 달린 것은 맞지만, 아주 오래 달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벌써 강소성에 올 수 있단 말인가?
이세경은 팽중호를 바라보았다.
“내가 조금 빨라졌어.”
조금?
이게 조금이란 말인가?
이미 인간의 한계라는 것을 벗어난 것이 아닌가?
“가가께서 등선할까 걱정됩니다.”
“하하하. 그럴 리는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물론 팽중호가 갑자기 등선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솔직히 지금 너무나 높은 경지에 다다른 것은 맞았다.
생사경이라는 전인미답의 경지에 다다른 팽중호는 지금 사실, 평범한 인간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세경이 걱정을 할 정도로 말이다.
최근에 꽤 자신감이 올랐었는데, 그 자신감이 옅어졌다.
‘놓쳐서는 안 돼.’
이세경은 이대로는 까딱 잘못했다가는 팽중호를 놓칠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더 분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떠나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 팽중호를 노리는(?) 이들도 아주 많았으니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잠을 잠깐 자야 하니까……. 여기 방 두 개만 주십쇼.”
식사가 끝이 났으니, 이제 잠깐 잠을 취해 체력을 보충할 시간이었다.
팽중호는 점소이에게 방을 두 개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죄송한데, 방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객잔에 남은 방은 단 하나뿐.
그렇다고 다른 객잔으로 향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이 작은 마을에 객잔이 많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럼 세경이 방에서 쉬어, 나는…….”
“아니요. 같이 쉬어요.”
“괜찮아. 나는 밖에서 쉬어도.”
“절대로 안 됩니다.”
“그, 그럼 알았어.”
팽중호가 방을 양보하고 밖에서 따로 쉬려고 하였지만, 이세경이 완강히 반대하였다.
그렇게 팽중호와 이세경이 한방에 들어섰다.
“어……. 저기 침상에서 자. 나는 여기서…….”
“가가께서 침상으로 가시지요. 오늘 피곤하셨을 터인데…….”
꽤 오랫동안 서로를 알았지만, 이렇게 단둘이 방에 들어서자 어색한 공기가 주변을 휩쌌다.
서로 어쩔 줄 모르는 두 사람.
그렇게 한참을 자리를 양보하던 두 사람은 결국, 한 침상에 같이 눕기로 하였다.
“자, 잘자.”
“예, 예……. 가가도…….”
서로의 등을 맞댄 채로 누운 둘은 눈은 감고 있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고 결국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