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무슨 일로 나를?
하북성과 산서성의 중간.
그곳에 무림맹 행렬이 멈춰 섰다.
산서성 진입 전,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노숙하기 위함이었다.
넓은 공터에 재빠르게 노숙할 준비를 하는 무림맹 무인들.
이런 노숙 경험이 많은 이들을 필두로 준비가 신속히 이루어졌는데, 대단한 고수이건 아니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니 금방 노숙할 준비가 끝이 났다.
‘쉬지 않으면, 죽는다.’
그들은 지금처럼 체력이 달리는 경험을 한 것이 처음이었다.
팔과 다리가 제대로 통제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팔다리를 이끌고, 쉬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 것이다.
지금 쉬지 않으면, 정말로 죽을 것 같았기에 말이다.
“완성되었습니다.”
“그럼 식사가 준비되기 전까지 쉬십시오.”
“예.”
팽중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인들이 그대로 모두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원래라면 호법을 서는 무인들을 나누고 운기를 해야겠지만, 지금 그들은 그럴 겨를도 없었다.
“뭐, 셋만 있어도 되니까.”
호법은 팽중호말고도 위지철과 장순학이 섰다.
이들 중 유일하게 멀쩡한 셋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이들이 호법을 서 준다면, 그 어떤 이들이 호법을 서는 것보다 안전할 터였다.
후우우우우웅-
동시에 수많은 인원이 운기를 하자, 주변에 기의 바람이 몰아치며 기운들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팽중호는 정한승과 제갈서린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정한승과 제갈서린과 함께 온 진법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툭- 툭- 툭- 툭- 툭-
그들은 재빨리 주변에 작은 나무 기둥을 박아 넣어 이내 하나의 커다란 진법을 완성했다.
축기진.
진법 덕분에 지금 이 주변의 기운들이 밖으로 흩어지지 않고, 이 자리에 머물기 시작했다.
팽중호는 지금 이런 상황이 발생할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함께 따라나선 진법가들에게 미리 축기진을 부탁했다.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인 운기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간소하게 만든 진법치고는 효과가 좋다.’
지금 진법가들이 설치한 축기진은 아주 빠르고 간소하게 만든 진법이다.
그런데도 그 효과가 상당히 좋았다.
기운들이 거의 빠져나가지 않고 제대로 모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저들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느낄 수 있었다.
“후우…….”
“후…….”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운기를 마친 그들의 두 눈에는 정광이 가득했는데, 이 짧은 운기로 생각보다 많은 내공을 얻은 탓이었다.
그리고 팽중호와 위지철, 장순학, 그리고 사천당가의 무인들이 먼저 일어난 순서대로 그들을 찾아갔다.
“잠깐 가만히 계십쇼.”
툭- 툭- 툭- 툭-
그들은 손가락으로 일어난 이들의 혈도를 두드렸는데, 이것은 그들의 몸에 아직 남아 있는 잔여 피로를 날려 주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아주 작은 단약 한 알씩을 건네주었다.
“보양단입니다.”
그들에게 건네어진 단약은 몸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보양단이었다.
이들 모두를 줄 영약은 만들 수 없었지만, 보양단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 여력이 되었다.
‘지금은 보양단으로도 충분하지.’
원래라면 무인들은 보양단을 먹어 봐야 큰 효용은 보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공은 충만하지만, 체력은 아직까지 떨어져 있는 상태.
이때 보양단을 먹으면, 충만한 내공을 그대로 모두 몸 안으로 흡수해 낸다.
운기를 통해서 붙잡지 못했던 내공을 말이다.
‘이 정도면 가는 동안에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거겠지.’
혈천궁으로 향하면서 할 수 있는 수련은 다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산서성으로 넘어가면 이렇게 수련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곳은 혈천궁의 영역이니 말이다.
“자, 식사합시다!”
“예!”
이미 가져온 재료들이 있으니, 불을 붙이고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다들 힘들었음일까?
그리 대단한 음식도 아니건만, 다들 며칠은 굶은 것처럼 음식을 게걸스레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역시 땀 흘린 뒤에 먹는 밥이 맛있는 법이지.”
물론 팽중호는 별로 땀을 흘리지 않았지만, 음식은 아주 맛있게 먹어 치우고 있었다.
그렇게 얼추 무인들이 모두 식사를 끝마치자, 밤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히 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아주 맑은 밤하늘이기에 수많은 별 무리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하늘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가만히 바라보는 밤하늘은 꽤 정취가 있었다.
전생에는 노숙을 자주 했기에 이렇게 밤하늘을 올려다볼 일이 많았는데, 이번 생에는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볼 일이 많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오랜만에 본 하늘은 팽중호를 아련한 추억에 빠지게끔 하였다.
‘흠. 일이 다 끝나면, 여행을 좀 다녀야겠어.’
그렇게 팽중호가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
그의 기감에 걸리는 무언가가 하나 있었다.
아주 농도 짙은 살기.
‘음?’
슬쩍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아무도 이 살기를 느낀 이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자신을 향해서만 쏘아 보냈다는 이야기.
‘고수군. 근데 누굴까?’
살기를 쏘아 보낸 상대는 분명 하나다.
혹시나 함정일 수 있으니, 기감을 아무리 끌어올려 보았지만 역시나 하나.
홀로 자신을 찾아와 살기를 쏘아 보낸다니?
‘가 보면 알 수 있겠지.’
짐작이 가는 이는 딱히 없었으니, 직접 움직일 수밖에.
스슥-
팽중호는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움직였다.
다른 이들을 깨울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팽중호가 잠시간 달리자, 한 공터에 도착했고, 공터에는 하나의 인영이 가만히 서 있었다.
“역시 제대로 왔군. 뇌성도제 맞지?”
“맞습니다만…… 누구신지요?”
팽중호는 일단 어느 정도의 예의는 갖춰서 말을 하였다.
상대가 아직은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니 말이다.
“마교 서열 오십일 위. 악준이다.”
마교 서열 오십일(五十一)위(位) 악준.
오십일 위라면 결코 낮은 서열이 아니었다.
무림에 나온다면 단숨에 최고 고수 대접을 받을 실력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크크크. 너와 싸우기 위해서다.”
팽중호는 악준을 보고 곧바로 지금 상황을 이해했다.
지금 눈앞의 악준은 먼저 자신과 일 대 일로 싸우기 위해서 온 것이다.
싸움에 미쳐 있어서 말이다.
‘마교는 도대체 어떤 곳일까?’
강해지는 것과 싸우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집단.
팽중호는 문뜩 마교는 도대체 어떤 곳일지 직접 가서 경험해 보고 싶었다.
“자! 도를 꺼내라.”
스으윽-
악준이 팽중호를 향해 그의 무기인 언월도를 겨누었다.
거대한 언월도를 가볍게 든 그의 모습을 보니, 어떤 무공을 쓸지 짐작이 갔다.
스릉-
팽중호가 무적도를 꺼내어 손에 쥐었다.
상대가 싸움을 걸어왔는데, 피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건 기회였다.
혈천궁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자. 싸워 보자!”
* * *
“악준이 사라졌습니다.”
“그새를 못 참고 뛰쳐나갔군.”
혈천궁의 궁주실.
그곳에는 지금 교마를 비롯한 세 명의 마교 무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갑자기 사라진 악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 온 이들 중 가장 호전적인 이가 바로 악준이었다.
호전적이며 참을성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어느 정도 악준의 이런 돌발 행동을 예상했다.
“아까운 전력이 하나 줄었군 그래.”
“그래도 그놈은 아주 좋아할 겁니다.”
“흘흘. 그렇겠지. 그 아이라면 말이지.”
악준은 교마가 가르친 무인 중 하나이다.
아니, 여기 있는 이들 모두가 교마가 가르친 이들이다.
그렇기에 교마도 악준이 어떤 성향인지 잘 알았다.
악준은 자신이 질 것을 알고, 죽을 것을 알아도, 강자와 싸운다면 좋아할 놈이었다.
“어차피 여기서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지. 살아서 돌아가는 것은 수치지.”
교마도 다른 마교 무인들도 살아서 마교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물론 이긴다면 돌아가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싸우다 죽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자존심이었으니 말이다.
싸움에 졌는데, 살아서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수치였다.
“그래도 마뇌님의 계획대로 악준이 움직였다면, 더 재밌는 싸움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흘흘. 마뇌의 계획에는 아마 악준이 혼자 뛰쳐나가는 것도 있었을 거다.”
마뇌의 계획에 아마 악준은 애초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악준이 어떤 성향인지 이미 알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보다 다들 잘 위치시켰지?”
“예. 모두 다 위치시켜 두었습니다.”
“그래. 이제 그들을 기다려 보자꾸나.”
* * *
악준과의 싸움.
확실히 악준은 팽중호가 지금까지 싸워 왔던 여타의 무인들과는 달랐다.
거대한 언월도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엄청난 힘으로 들어오는 공격은 그 궤가 여타 무공들과 달리했으니 말이다.
도저히 예측이란 것을 하기 힘들었다.
‘재밌네.’
검마와 소천마.
그들은 사실 규격을 벗어난 절대 강자들.
그런 자들을 상대할 때와는 또 달랐다.
마교의 무인들의 무공은 확실히 재미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이런 공격이 들어올까 싶은 공격을 했으니 말이다.
이것은 팽중호에게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끔 해 주었다.
“자! 본 힘을 보여라!”
“그러죠.”
슬슬 팽중호도 이 싸움을 끝낼 생각이었다.
악준의 무공의 견식은 끝이 났으니 말이다.
-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무뢰(無雷).
악준은 팽중호가 무뢰를 펼치자마자 눈이 불처럼 타올랐다.
지금 자신의 주변 공기가 바뀐 것을 느낀 것이다.
“좋아!!!”
콰아아아아아아아-!!
악준이 엄청난 양의 내공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혈천궁의 무인들이 내뿜는 혈기와는 완전히 다른, 너무나도 정순한 내공.
사람들은 마교도들이 마기나 혈기 따위를 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정통 정도 문파의 내공심법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아니 어쩌면 더 정순한 내공을 쓴다.
‘그게 마교의 힘이지.’
물론 워낙에 다양한 무인들이 있는 마교이기에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위 서열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이 정순한 내공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교 무인들은 같은 경지에 다다랐다고 해도 더욱 강한 힘을 내는 것이었다.
팽중호는 이 사실을 천마, 검마, 소천마를 만나고 깨달았다.
쾅-!
땅이 움푹 파일 정도의 진각과 함께 팽중호에게 쇄도하는 악준.
그의 언월도에서 푸른 강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는데, 순간 팽중호의 전면을 모두 뒤덮을 정도였다.
가공할 정도의 공격.
‘오십일 위가 이 정도란 말이지? 미치겠군.’
악준의 공격을 본 팽중호는 속으로 인상을 썼다.
악준이 오십일 위라면 지금 눈앞의 악준보다 강한 이가 최소한 오십 명은 더 있다는 소리 아닌가?
지금 무림맹에는 눈앞의 악준을 이길 이가 열이 채 되지 않는다.
이건 분명 꽤 큰 문제였다.
‘혈천궁의 일이 끝나면 곧바로 대책을 세워야겠어.’
팽중호는 생각은 여기까지로 하고, 일단 지금에 집중하기로 했다.
화아악-
무적도가 휘둘러졌다.
그리고 악준이 펼친 강기의 파도가 반으로 갈라졌다.
너무나 손쉽게 갈라진 파도.
악준의 눈이 부릅떠졌는데, 이내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다시 간다!”
“끝이 났습니다.”
철컥-
팽중호는 무적도를 도갑에 다시 넣었다.
재차 팽중호에게 달려들려던 악준의 신형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손에 들린 언월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걱-
반으로 잘려 나간 언월도.
그리고 잘려 나간 것은 언월도만이 아니었다.
악준의 몸도 베인 것이다.
“강하군!”
“그렇지.”
“하하하!! 최고의 마지막이었다!”
털썩-
마지막 외침과 함께 바닥에 쓰러지는 악준.
팽중호는 그런 악준을 잠깐 내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미친놈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