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이제 그만합시다.
하북팽가가 혈천궁에 의해 피해를 입은 후부터, 팽중호는 하북팽가에 머물렀다.
쓰러져 있는 팽자성을 대신해 세가를 이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팽자성은 다행히 의식은 찾았지만, 여전히 몸 상태가 좋지는 못했다.
갖은 영약 등으로 원기를 보충하고 있지만, 워낙에 입었던 내상이 컸기에 회복이 더뎠다.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냐?”
팽자성은 누워 있지만, 계속해서 밖의 소식은 듣고 있었다.
혈천궁의 도를 넘는 공격에 무림맹이 수많은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팽중호가 무당파에서 위지철과 함께 이주와 삼주를 쓰러트림으로 그들의 기세가 꺾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것을 기점으로 그들은 더욱더 거칠게 달려들었다.
덕분에 조금 느슨하게 대처를 하던 무림맹이 큰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었다.
“우선 일주를 쓰러트리고, 그다음에 혈천궁으로 진격할 겁니다.”
팽중호는 일을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전쟁에서 전쟁을 끝내는 가장 빠른 방도.
그것은 적의 머리를 베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팽중호는 아예 산서성에 있는 혈천궁으로 진격할 생각을 했다.
그곳에 가서 혈천궁 궁주를 쓰러트릴 생각이었다.
‘계획은 짜이고 있다.’
지금 장춘오와 사마운이 이 작전을 위한 계획을 세밀하게 짜고 있었다.
그래서 팽중호는 이 계획 전에 일주를 쓰러트릴 생각이었다.
개방에 최대한 일주의 행방을 찾아 달라고 하였으니, 아마 조만간 행방을 찾을 수 있을 터.
그렇다면, 혼자 그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괜히 누군가와 함께 움직인다면 오히려 자신의 움직임이 발각될 것이고, 그렇다면 또 일이 어떻게 틀어질지 몰랐으니 말이다.
“너무 혼자서 무리하지 말거라.”
“예. 알겠습니다.”
팽자성의 말에 팽중호는 갑자기 전생이 생각났다.
자신이 천마를 만나러 혼자 떠나기 전이 말이다.
그때는 정말로 혼자 죽기 위해 떠났다면,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정말 자신이 있기에 혼자 떠나려는 것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팽중호가 가주실을 나와 밖을 걷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다가와 팽중호에게 작은 쪽지를 건네주었는데, 그걸 보자마자 팽중호는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멀지 않은 곳에 있군.’
지금 팽중호에게 전해진 쪽지는 일주가 있는 곳이 적혀 있는 쪽지였다.
개방이 전해 준 쪽지에 적혀 있는 위치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
일주는 하북팽가에서 물러난 후, 근처에서 활동하고 있던 것이었다.
‘최근에 주변에서 있던 일이 일주의 짓이었나 보군.’
최근 하북성에서 무림맹 소속 고수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싸움에 휘말렸거나, 칩거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수가 늘어감에 따라 누군가에 의한 일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범인을 찾기 위해 무림맹이 움직였지만, 지금까지 범인을 잡지는 못했다.
그런데 지금 개방의 정보에 의해 일주가 주변에 있다는 것을 보니, 범인이 일주라는 것이 딱 느껴졌다.
파팟- 파앗-
은밀히 하북팽가를 벗어나 엄청난 속도로 내달리는 팽중호.
흐릿한 그림자마저 보기 힘든 엄청난 움직임이었다.
‘이 근처 어디일 텐데.’
팽중호가 움직임을 멈춘 곳은 어느 한 야산.
길도 없고, 인간의 흔적도 아예 없는 야산이었다.
이런 곳에 숨어 있으니, 개방이 찾는 데도 시간이 좀 걸린 듯싶었다.
스으으으윽-
팽중호는 야산의 중턱에 올라 가만히 기감을 퍼트렸다.
작은 풀벌레의 움직임 하나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기감에 하나의 거대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산의 안쪽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
“동굴이구나.”
안쪽에서 느껴지는 것을 보니, 동굴 속에 있는 듯싶었다.
스슥-
곧바로 그곳으로 몸을 날리는 팽중호.
그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새 야산의 한 동굴 앞에 나타났다.
교묘하게 가려져 있는 동굴의 입구.
슬쩍 지나가면서 보면, 동굴이 있다는 것도 모를 듯싶었다.
“나와.”
팽중호가 동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그리고 동굴 안에서 하나의 인영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거칠고 이리저리 날뛰는 혈기를 가진 인영.
“이거, 그새 너무 달라지셨네?”
“크크큭.”
동굴 속에서 나온 인영의 정체는 일주.
팽중호가 이전에 일주를 만났을 때와는 달라도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그때는 혈기가 강하기는 했지만, 괴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만난 일주는 괴물이었다.
‘힘을 위해 괴물이 되어 버렸군.’
분명 일주의 힘은 더 강해져 있었다.
그것도 어마무시하게 말이다.
하지만 그는 힘을 얻은 대신 사람이길 포기한 것이다.
“힘은 완성되었다. 여기서 너까지 죽이고 힘을 흡수한다면……. 난 천하제일이 되겠지. 크하하하!!”
우수수수수수수-
일주의 웃음에 주변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다.
그리고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만큼의 엄청난 혈기.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의 혈기였다.
“역하군.”
팽중호는 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일주는 그야말로 역했다.
“역하다? 그건 네놈과 같은 무림맹 놈들이겠지. 나는 이 힘으로 무림맹 놈들을 모조리 죽이고, 마교마저 모조리 죽일 것이다.”
팽중호는 광기에 사로잡힌 일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상대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궁금치 않았다.
무림에 있다 보면 정말 수도 없이 많은 은원에 엮이게 되니 말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에 대해서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다만, 은원에 집착해 괴물이 되는 것은 문제이지.’
은원을 해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무림이란 곳이니 말이다.
다만, 그 은원에 집착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것은 문제다.
‘얼마나 많은 이를 집어삼킨 것이냐.’
팽중호는 지금 일주의 혈기가 온전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여러 사람의 기운이 마구 뒤섞인 느낌.
이것으로 그가 다른 이들의 내공을 흡수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흡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완성된 힘이란 걸 좀 볼까?”
“그래. 광혈흡마공으로 완성된 내 무공을 보여 주마.”
스으으으으으-
일주의 몸이 핏빛으로 물들고, 그 위로 피의 갑주가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견고하며 틈이 없어 보이는 갑주는 마치 견고한 성벽처럼 보였다.
“이제 네놈은 두렵지 않다.”
“아아. 그래. 그럼 나도 모든 힘을 다 써 볼까?”
화악-
팽중호의 몸에서 기운이 뿜어져 나와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일주의 엄청난 혈기에 비하자면 턱없이 미약해 보이는 기운.
하지만 팽중호의 기운에 거짓말처럼 일주의 혈기가 사라졌다.
스릉-
무적도가 뽑혀 나왔다.
그리고 여유롭게 자세를 잡는 팽중호.
“죽여 주마!”
일주는 팽중호의 이런 여유로운 모습을 보고 곧바로 달려들었다.
자신 앞에서 이런 여유를 취한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나도 모든 힘을 다 내 보지는 못해서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네.”
서걱- 촤아아아아악-
달려들던 일주의 오른팔이 그대로 잘렸다.
“좋네.”
* * *
일주는 하북팽가에서 물러난 후, 하북성의 한 야산의 동굴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혼자 조용히 이곳에서 힘을 키울 생각을 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생각과 지금 하북성에 수많은 고수들이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주는 하북성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고수들을 사냥하듯 잡아 그들의 내공을 흡수했다.
‘이제 힘이 완성되었다.’
그렇게 고수들의 내공을 모조리 흡수하고, 일주는 원하던 목표에 다다랐다.
끝없는 내공을 얻은 것이다.
이로 펼쳐내는 현경의 경지에 다다른 파천혈라신갑은 분명 일주가 생각하기로 무적의 무공이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이, 이게 무슨?’
팽중호가 자신을 찾아왔다.
어떻게 찾았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힘이 완성되었을 때, 그가 찾아왔음에 기뻤다.
그를 죽이고, 그의 내공까지 흡수한다면 천하제일도 가능할 터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지금 단 일 합 만에 깨져 버렸다.
너무나도 허망하고 쉽게 잘려 버린 오른팔.
‘그 어떤 공격에도 베이지 않아야 하거늘!’
상대가 검강을 휘둘렀다고 해도 잘리지 않아야 했다.
모든 공격을 막아 내야 했다.
아니, 상대가 아무리 고수라도 적어도 이렇게 단번에 잘려 나가지는 않아야 했다.
“이놈!!!”
일주는 자신이 방심했다고 생각했다.
다시금 파천혈라신갑을 정비했다.
스으으으으윽-
파천혈라신갑의 힘으로 잘린 오른팔 부분에 다시금 팔이 생겨났다.
진짜 팔은 아니고, 혈기로 만들어진 팔.
하지만 일주의 의지대로 움직이니, 진짜 팔과 다름없었다.
쾅- 콰캉-! 쾅-!!
잠깐 방심했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일주는 팽중호에게 엄청난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처음과 다르게 가만히 서서 일주의 공격을 막고만 있는 팽중호.
이 모습에 일주는 더욱더 힘을 끌어올려 팽중호를 압박했다.
‘그래. 처음은 내가 방심한 것이다.’
일주는 이 모습에 처음 팔이 잘린 건 방심한 것이 맞다고 확신했다.
다만, 일주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공격을 막고 있는 팽중호의 얼굴이 너무나 평온하다는 것이었다.
산의 지형이 바뀔 정도의 엄청난 공세에도 말이다.
“어떤 무공인지는 잘 봤으니까, 이제 그만합시다.”
“뭐, 뭣?”
파상공세를 퍼붓던 일주가 팽중호의 여유넘치는 말에 당황했다.
물론 그저 당황하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일주의 몸에 엄청난 수의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움직이던 일주의 몸이 제자리에 멈추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지금 찰나의 순간에 온몸이 베인 것이다.
파천혈라신갑을 두른 자신의 몸이 말이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그 마교의 소천마라도 자신을 쉽게 벨 수는 없을 터였는데 말이다.
“그렇게 탁한 힘으로 오른 경지로는 제대로 힘을 못 냅니다.”
일주는 이전에 나름의 노력으로 현경의 경지에는 다다랐다.
하지만 그 이후는 교마가 전해 준 광혈흡마공으로 얻은 내공을 통해 경지를 이루었다.
광혈흡마공으로 얻은 내공들은 당연히 남의 것을 강제적으로 빼앗은 것이니, 내공에 탁기가 많을 수밖에 없다.
내공은 정순할수록 많은 힘을 내지 않는가?
깨달음의 과정을 거쳐 경지에 오른다면 내공은 정순해진다.
하지만 일주는 경지에는 올랐지만 깨달음을 통한 과정이 아니었기에 정순한 내공을 가지지는 못했고, 그것이 지금 팽중호와의 현격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내가 틀렸군.”
털썩-
일주가 말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소천마 척한준.
지난번에 그와 대련을 했을 때, 일주는 넘을 수 없는 너무나 거대한 벽을 느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로 넘을 수 없을 벽을 말이다.
그래서 광혈흡마공을 통해 그 벽을 넘어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틀린 방법인 듯싶었다.
“너라면 소천마를 이길 수 있겠다.”
“물론, 내가 이기지.”
마지막에 일주는 팽중호라면, 그 거대한 벽인 소천마를 넘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때 보았던 소천마의 힘보다 팽중호의 힘이 더욱더 놀라웠으니 말이다.
물론 그 당시에 소천마가 힘을 다하지는 않았을 터였지만 말이다.
“크큭. 자만하지 마라. 그는 거대한 벽이다.”
“벽은 넘으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군. 벽은 넘으라고 있는…….”
이 대화를 끝으로 일주는 숨을 거두었고, 팽중호는 그런 일주를 땅에 파묻어 주고는 다시금 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