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생각보다 좀 쉬웠습니다.
이주와 삼주의 몸에서 엄청난 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잠깐 팽중호와 위지철의 힘에 놀랐지만, 그건 방심하고 있어서 일 뿐이었다.
제대로 힘을 낸다면, 분명 해 볼 만할 터였다.
“이제 제대로 싸워 보자.”
이주(二柱)가 팽중호를 향해 자신의 병기인 창을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보통 사람보다 큰 키의 이주가 기다란 창까지 들고 있자, 그 위용이 사뭇 대단했다.
이주는 본래 창술로 유명한 세가의 소가주였다.
산동악가(山東岳家).
산동성의 패자라고 불리던 곳.
하지만 산동악가는 정과 사를 오가는 문파였는데, 그런 그들의 특징 때문에 무림맹에서 썩 취급이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산동악가에 일이 하나 터져 나왔다.
소가주의 무림맹 무인 살해사건.
술에 취한 소가주가 자신을 무시하던 무림맹 무인들을 잔혹하게 죽여 버린 것이다.
이 일로 산동악가는 대번에 무림맹에 적으로 낙인찍혔고, 결국 그들은 무림맹의 손에 멸문까지 당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수많은 산동악가의 사람들이 죽어 나갔는데, 정작 이 일을 일으킨 장본인인 소가주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때 그 일을 일으키고 몸을 숨긴 산동악가의 소가주.
그가 바로 이주(二柱)였다.
그는 산동악가가 멸문한 탓을 무림맹 때문이라 생각했고, 그 복수를 위해 혈천궁에 들어간 것이었다.
본래부터 무공에 관해서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산동악가 특유의 압도적인 신체가 있었기에 그는 순식간에 이주라는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나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이주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다.
자신이 지금 이주라는 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그것은 궁주가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였을 뿐이었다.
아니, 자신이 일부러 힘을 숨겼으니 어쩌면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이주의 목표는 일주를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혈천궁의 궁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기에 힘을 숨기고 있었다.
“오늘 내가 너에게 새로운 무공을 보여 주마. 영광으로 생각해라.”
이주는 팽중호가 범상치 않은 상대라는 것은 인지했다.
그래서 오늘 자신이 그동안 숨겨서 준비했던 것을 꺼낼 생각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필패를 직감했으니 말이다.
처억- 키이이이이이잉-
이주가 창대를 고쳐잡자 갑자기 그의 창이 괴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주 불길한 듯한 이 소리는 이주의 창이 엄청난 진동을 하며 내는 소리였다.
초진악가창법(超振岳家槍法).
산동악가의 무공인 악가창법(岳家槍法)에 교마가 전해 준 초진파령공(超振破靈功)을 더해서 만들어 낸 무공.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 밖에서 꺼낸 적 없는 무공이었다.
‘이 무공이면 나는 정상에 설 수 있다.’
자신이 오랜 시간을 투자해 만든 만큼 그 위력과 완성도 면에서는 최고라 자부했다.
이것이라면, 그 대단한 궁주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잔재주만 잔뜩 넣었네.”
팽중호는 이주의 초진악가창법을 보고 잔재주만 넣었다고 평가했다.
이 한마디에 순간 일그러지는 이주의 얼굴.
자신이 만들어 낸 이 무공을 잔재주만 넣었다고 하니, 당연했다.
“잔재주인지 아닌지 보여 주지.”
꽈악-
이주가 창을 더 강하게 움켜쥐고는 그대로 팽중호에게로 뻗었다.
키이이이이이잉-
괴이한 떨림과 함께 뻗어 나오는 창은 일견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위력을 담고 있었다.
팽중호가 가볍게 무적도를 들어서 그 창을 정면으로 막았다.
카가가가가가강-!!
창과 도가 닿는 순간 엄청난 소리와 함께, 기파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리고 순간 팽중호의 신형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호오? 그래도 아주 잔재주만은 아닌가 보네?”
팽중호는 나름 이주의 공격이 위력적임을 인정했다.
자신이 느낀 이주의 기운보다도 더 강한 힘이 전해져 왔다.
저 창에 있는 초진동이 그것을 만들어 낸 듯싶었다.
‘이건 쓸 만하겠어.’
팽중호는 적이지만 이주의 이 초진동을 인정했다.
후에 분명 이것은 써먹을 때가 있을 터였다.
“어떠냐!”
“괜찮네. 혹시 다른 거 더 보여 줄 거 있어?”
“흥. 이거면 네놈쯤은 충분하다!”
이주가 다시금 팽중호에게 창을 뻗었다.
이번에는 순식간에 수십 개의 창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팽중호를 향해 쏟아졌다.
키이이이이이잉- 콰가가가가가각-!!!
팽중호의 주변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버리듯 초토화되었다.
그야말로 땅이 뒤집히는 위력.
그 어느 것 하나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위력이었다.
휘이이이이이익- 팡-…….
서걱-
주변에 자욱이 피어올랐던 먼지가 순식간에 걷히더니, 무언가 잘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볼 건 다 본 것 같네.”
“이, 이…….”
그리고 뒤이어 들리는 팽중호의 목소리와 나오다가 만 이주의 목소리.
완벽하게 걷힌 시야로 보이는 상황.
팽중호는 그 자리에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고, 이주는 몸이 갈라진 채로 바닥에 차갑게 쓰러져 있었다.
“위 소협도 끝나셨습니까?”
“예. 방금 끝났습니다.”
그렇게 가만히 서 있는 팽중호의 옆으로 위지철이 다가왔다.
위지철도 지금 막 삼주의 목을 벤 상황이었다.
“도망쳐라!”
주변에 아직 남아 있던 혈천궁 무인들이 담을 넘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팽중호와 위지철은 굳이 그들을 잡지 않았다.
“컥!”
“크헉!”
이미 주변에 무당파 무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머리를 잃은 저들은 무당파 무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생각보다 좀 쉬웠습니다.”
“그건 소가주님이 너무 강하셔서 아닙니까?”
“하핫. 뭐…….”
이주와 삼주는 팽중호의 생각보다 약했다.
자신이 오는 것을 알았는데도, 이런 자들을 보낸다니?
‘아닌가? 내가 그들 이상으로 너무 강해진 건가?’
문뜩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현경이란 지고한 경지에 오른 후로 더욱더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 성류화라는 절세의 영약까지 먹었으니, 혈천궁이 상정한 자신의 힘보다 수 배는 더 강해져 있을 터였다.
“그런데 정말 바로 돌아가실 겁니까?”
“예. 일주인가 그놈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니까요.”
팽중호는 지금 여기서 곧바로 하북성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일주가 사라졌다는 것이 찜찜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위지철은 일단 무당파에 남기로 하였다.
혹시나 아직 혈천궁의 잔존세력이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그럼. 여기서 인사를 나눠야 하겠습니다.”
“예. 다시 무림맹에서 뵙도록 하죠.”
스슥-
팽중호의 신형이 사라졌다.
마치 원래 이곳에 없었다는 듯 순식간에 존재 자체가 사라진 팽중호.
위지철은 팽중호가 사라진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움직였다.
“더욱더 열심히 노력해 소가주님의 옆에 당당히 서 보겠습니다.”
* * *
하북팽가.
본래는 상인들이 오가는 소리와 무인들이 수련하는 소리만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곳이었다.
팽중호가 있는 곳이니 감히 분란 조장을 하는 이들이 날뛸 생각조차 못 하고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콰앙-!!!
하북팽가의 정문이 마치 화탄이라도 터진 듯 거칠게 터져 나갔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일단의 무리.
“혈천궁이다!!”
하북팽가 무인들은 그들을 보자마자 소리를 치며 곧바로 싸울 준비를 했다.
지금 정문에 들어선 이들.
그들은 바로 혈천궁의 무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제일 앞에 서 있는 이.
“여기를 없애면 그가 얼마나 분노할지 기대되는군.”
바로 일주였다.
일주는 지금 무당파로 향하다가 길을 틀어서 하북팽가로 향했다.
아직 그의 힘이 모두 채워지지 못한 것도 있지만, 팽중호를 도발하게끔 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새로운 힘을 얻었을 때, 교마가 자신에게 주문한 것은 팽중호를 분노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일주는 흔쾌히 그 명을 받아들었다.
어차피 자신은 팽중호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고, 그가 자신에게 분노해 그가 가진 모든 힘을 내기를 원했으니 말이다.
“전부 죽여라.”
일주의 명령에 혈천궁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되지 않는 수의 무인들이지만, 그 실력이 범상치 않았다.
순식간에 주변을 둘러싼 팽가 무인들을 쓰러트리는 그들.
이 소란에 하북팽가에 있던 모든 무인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멈추어라!”
가장 앞서 나서서 사자후를 날리며 혈천궁 무인을 막아 나서는 중년인.
바로 하북팽가의 가주인 팽자성이었다.
그는 이 소란에 대해 보고를 듣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선 참이었다.
그리고 그런 팽자성의 옆으로 팽구준과 곽채령, 곽무조, 곽종구 등이 나타났다.
지금 하북팽가에 있는 최고 고수들이 모두 나선 것이다.
캉- 캉- 서걱-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혈천궁 무인들을 상대했는데, 확실히 실력들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어렵지 않게 혈천궁 무인들을 쓰러트려 나갔다.
파죽지세로 팽가 무인들을 베어나가던 혈천궁 무인들이 주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가만히 서 있던 일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좋아. 팽중호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는데, 나름 쓸 만은 하군 그래.”
그저 그가 움직이는 것뿐인데도,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지금까지 치열하게 싸우던 모든 이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네놈은 누구냐!”
팽자성이 가주라는 자리에 걸맞게 이 숨 막히는 공기를 뚫고 일주를 향해 소리쳤다.
“일주.”
“!!”
짧은 일주의 대답.
하지만 그 대답이 가지는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가 일주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알았으니 말이다.
“오늘 하북팽가는 사라진다.”
파앙-!
말과 동시에 일주의 몸이 엄청난 굉음과 함께 튀어나갔고, 그 대상은 바로 팽자성이었다.
“하압!”
팽자성도 최근 많은 깨달음을 얻어 실력이 많이 올라온 상태였다.
그렇기에 혼원벽력도를 펼치며 일주를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파지지지지직-
뇌강까지 터져 나오는 팽자성의 혼원벽력도는 그 위력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일주라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현경의 경지를 넘어선 절대 고수.
팽자성이 막을 수 있는 수준의 무인이 아니었다.
쾅-! 콰차차차차창-
일주와 부딪친 팽자성의 도가 산산히 부서져 내렸다.
흑운철로 만든 벽력도가 단 일격에 부서지다니?
그리고 부서진 도만 문제가 아니었다.
쿠와아악- 쾅-
팽자성이 입에서 피를 엄청나게 쏟으며 뒤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바닥에 늘어져 미동도 없는 그를 보건대, 이 일격에 절명한 듯싶었다.
“가주님!!”
“가주님!!!”
주변에 있던 팽가의 무인들이 소리를 치며 팽자성에게 달려갔다.
다급한 표정의 무인들.
무인들은 팽자성을 살피더니, 아직 아주 미약하게 숨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는 곧바로 그를 들쳐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일주는 그런 그들을 그냥 가만히 놔두었다.
어차피 살아남는다고 해도, 다시금 제구실은 못 할 터니 말이다.
“뭐, 맛있는 이들이 많으니 천천히 즐겨 보자고.”
일주가 다시 몸을 움직여 주변 팽가 무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일주가 싸움에 가세하자 다시금 전세가 크게 변해 버렸다.
순식간에 줄어든 팽가 무인들의 수.
“크크크.”
사실 일주는 지금 즐기는 중이었다.
그가 제대로 힘을 쓴다면, 이들을 모두 죽이는 것은 손쉬웠다.
다만, 지금은 그저 이들의 이런 처절함을 즐기려고 일부러 손속을 조절하는 것이었다.
교마에게 새롭게 무공을 배운 이후로, 이런 잔혹한 마음이 점점 강해져 가는 일주.
일주 본인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굳이 억누르려 하지 않았다.
잔혹하게 변해 갈수록 자신이 강해진다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자. 이제 제일 맛있는 것들을 먹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