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역시, 말이 통합니다.
당세홍.
사천당가의 유일한 적자이자 소가주.
그는 어릴 때는 사천제일기재(四川第一奇才)라 불리며 촉망받는 인재였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을 얻은 후로 그는 무공은 펼치기는커녕, 하루하루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일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
사천당가에서는 유일한 적자인 당세홍을 살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모든 것이 무용한 상태에 반쯤은 마음을 접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때 팽중호라는 아주 실낱같은 희망이 등장했다.
어쩌면 병을 고쳐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당세홍과 사천당가는 다들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하북팽가로 향했다.
물론 병이 고쳐진다는 보장은 조금도 없지만 말이다.
쿠구구구궁-
하북팽가의 문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사천당가의 마차.
마차 두 대로 나타난 꽤 단출한 행렬.
물론 그 안에 있는 이들은 조금도 단출하지는 않았다.
끼이익-
마차의 문이 열리고 내리는 사람들.
모두 하나같이 형형한 기세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사천당가의 정예 중 정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마차에서 내리는 두 인영.
사뿐-
사뿐하게 내리는 발걸음.
한 명의 여인과 한 명의 청년.
여인은 흰 피부에 수려한 얼굴, 그리고 뒤로 질끈 묶은 머리가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청년.
너무나도 흰 피부에 가냘픈 얼굴선, 팽중호가 전에 만났던 소천마 척한준과 비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만큼의 미남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당세홍이라 합니다.”
목소리에 조금은 힘이 없지만, 그럼에도 듣기에 너무나 좋은 목소리로 인사를 해 오는 청년.
그가 바로 사천당가의 소가주인 당세홍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당조윤이라 합니다.”
당세홍의 옆에 내렸던 여인은 당세홍의 누이인 당조윤이었다.
그녀는 당세홍을 위해 함께 사천당가를 벗어나 하북팽가에 당도한 것이다.
평소 당가를 벗어나지 않는 그녀였음에도 말이다.
“어서들 오십시오.”
팽중호가 가장 앞서 그들을 맞이했다.
당정학은 팽중호에게 거듭 부탁과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당가로 돌아간 상태.
하북팽가에는 지금 당세홍과 당조윤만이 있는 것.
팽중호는 그들이 혹시나 불편해할까 봐 최대한 친절한 표정을 해 주었다.
물론, 그들이 이 표정에 편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 바로 한번 보도록 할까요?”
팽중호는 우선 당세홍을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당정학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과는 분명 다를 테니 말이다.
“아, 예.”
팽중호는 그렇게 당세홍을 포함한 당가 일행 모두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의약각(醫藥閣).
하북팽가의 의원이라고 보면 되는 곳으로, 아무래도 이런저런 약재들이 많이 준비된 곳이니 이곳을 장소로 정한 것이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당세홍의 몸에 팽중호가 손을 가볍게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내공을 천천히 흘려 보내기 시작했다.
치릿- 스으으으으-
혼원벽력신공으로 쌓은 팽중호의 내공은 뇌기를 포함하고 있었다.
뇌기를 머금은 내공이 당세홍의 상해 있는 혈도들을 자극하며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한참을 돌고 도는 팽중호의 내공.
‘흐음.’
당세홍의 몸 안을 내공으로 본 팽중호는 속으로 침음성을 살짝 흘렸다.
지금 본 당세홍의 상태가 꽤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요 혈이 모두 막혀 있고, 그곳으로 가는 길이 전부 상해 있다.’
절맥(絶脈)과 비슷하지만, 조금 달랐다.
절맥은 혈이 탁기에 막혀 있는 것이라면, 지금 당세홍의 혈은 내공에 의해 막혀 있다.
내공이 막치 탁기처럼 굳어서 혈을 꽉 막고 있다.
팽중호도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지금 당장은 힘들겠군.’
팽중호는 지금 당장 당세홍을 치료하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했다.
일단 혈도들이 너무 상해 있고, 기력 또한 너무 부족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흐음.”
팽중호가 당세홍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자 주변 모든 이들의 시선이 팽중호에게 향했다.
“어떻습니까?”
당세홍의 누이인 당조윤이 팽중호에게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녀에게 당세홍은 정말 아픈 손가락이자, 언제나 미안함을 가지고 있는 동생이었다.
‘나 때문에 세홍이가 아픈 것이다…….’
당세홍과 당조윤은 어릴 때부터 상당히 사이가 좋은 남매였다.
그래서 언제나 함께 다니며 무공 수련도 함께했는데, 그때 하나의 사달이 일어나고 말았다.
당조윤이 내공 심법을 익히던 중 갑자기 주화입마에 빠져들어 버렸고, 그런 당조윤을 구하기 위해 억지로 자신의 내공을 불어넣던 당세홍이 역으로 당조윤의 주화입마에 당해 버린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저 내상을 조금 입은 것으로 끝이 났지만, 그 후 시간이 흘러 당세홍이 병을 얻자 당조윤은 그때의 일 때문에 그런 것으로 생각해, 지금까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당가에서는 당조윤 때문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런 말이 그녀를 위로해 주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팽중호가 혹시나 당세홍의 병을 치료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렇게 당세홍과 함께 하북팽가로 향했다.
만약 당세홍을 낫게만 해 준다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로 말이다.
“지금 상태가 좋지는 않습니다.”
“아아…….”
팽중호의 말에 당조윤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고칠 수 없다는 듯 들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뭐, 고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예?”
“!!!”
하지만 뒤 이어진 팽중호의 말에 당조윤은 물론 당세홍과 사천당가의 모든 일행이 깜짝 놀랐다.
고칠 수 있을 것 같다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말.
모두 당세홍의 상태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만 했었으니 말이다.
“저, 정말입니까?”
당조윤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 말이 거짓이 아니길 바랐고, 이 상황이 꿈이 아니길 바라고 또 바랐다.
“예. 지금 당장은 기력이 너무 쇠해서 힘들지만, 기력만 좀 회복하시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흐으윽.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와락-
당조윤이 눈물을 왈칵 쏟아 내더니, 그대로 팽중호를 끌어안았다.
너무나도 큰 기쁨에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싶었다.
“하하…….”
갑작스럽게 끌어안는 당조윤을 보고 팽중호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나쁜 기분은 아니지만, 갑자기 여인이 끌어안으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제가 추태를…….”
다행히 당조윤이 금세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팽중호에게 떨어지며 사과를 했다.
“아닙니다.”
팽중호는 일단 당세홍에게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밥과 약을 잘 챙겨 먹으라 일러 주었다.
그리고는 슬쩍 자리를 벗어났다.
지금이 아니면 사천당가 사람들의 감사 인사에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흐음. 나도 좀 더 준비해 볼까?”
당세홍을 낫게 할 수는 있지만, 지금 아무런 지식도 없이 그냥 일을 시작하기에는 불안한 요소가 없지 않았다.
특히나 남을 치료해 본다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것이 가장 불안한 요소였다.
“오랜만에 정 선생을 찾아가야겠어.”
* * *
정한승은 하북팽가에 있는 자신의 처소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따라서 팽가의 사람들도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팽중호는 그를 위해 구할 수 있는 진법서는 모조리 구해 주었는데, 그렇게 진법서를 모두 읽은 정한승은 최근 하나의 서책들을 더 요구하기 시작했다.
‘혹시 의서(醫書)를 구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정한승은 의서를 구해 달라 하였다.
그는 이제 진법의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수많은 다른 학문을 공부하였는데, 그중 지금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이 의술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의 몸에 관한 것들이 그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의술에 몰두한 정한승은 엄청난 속도로 그것들을 흡수하기 시작했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종종 의약각에 도움을 줄 정도로 뛰어난 성취를 자랑했다.
“정 선생 계십니까?”
“들어오시오.”
팽중호는 정한승이 머무는 곳을 들어섰다.
어지럽게 이런저런 서책과 종이가 쌓여 있는 정한승의 처소.
그 사이에 정한승이 무언가를 종이에 쓰며 집중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스스슥- 스슥- 스스스슥- 탁-
쓰던 것을 멈추고 팽중호를 바라보는 정한승.
정한승의 얼굴이 꽤 초췌한 것이 최근 제대로 쉬지 못한 듯싶었다.
“무엇이오?”
팽중호는 정한승에게 당세홍의 병세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치료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 주고 말이다.
주의 깊게 팽중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정한승.
그러더니 이내 새 종이를 꺼내어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가장 빠르게 기력을 회복하는 방법과 치료를 할 때 먹으면 좋을 것들을 일러 드리겠소.”
그렇게 종이에 수많은 약재를 적어서 팽중호에게 전해 준 정한승.
그리고 또 다른 종이를 꺼내어 이번에는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혈 자리와 혈도를 모두 그려 드릴 테니 참고하시오.”
정한승이 그린 것은 사람의 몸과 그 혈과 혈 자리에 관한 그림이었다.
한눈에 보기 쉽게 일러진 그림이기에, 팽중호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각 혈 자리마다의 설명까지 거기에 추가하는 정한승.
이 정도면 의술에 문외한이라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진법을 설치해 드리겠소.”
“역시, 말이 통합니다.”
팽중호는 정한승에게 치료를 하는 동안 도움이 될 만한 진법을 설치해 달라고 말하려 했는데, 정한승이 미리 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까 무얼 그렇게 열중하고 계셨던 겁니까?”
팽중호가 정한승의 처소에 들어왔을 때 정한승이 열중하고 있던 것.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진 팽중호였다.
“하북팽가 전체의 진법을 새롭게 손볼 생각이오.”
“진법을 말입니까?”
“새롭게 많은 이들이 왔으니, 당연히 수정이 필요하오.”
지금 하북팽가는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그 규모가 커져 버렸다.
그래서 애초에 정한승이 계획했던 것이 조금 뭉그러져 버린 것이다.
정한승은 이번에 새롭게 깨달은 것들을 적용시켜, 새롭게 하북팽가에 진법을 설치할 생각이었다.
다만 규모가 커지고, 진법 자체가 더욱 복잡해지면서 정한승 혼자서 하기에 꽤 벅찬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정한승은 지금 밤을 새워 가면서 이것을 수정하고 또 수정하는 중이었다.
“혼자 하시기에 힘드시면, 제가 사람을 한 명 소개시켜 드릴까요?”
“누구를 말이오?”
지금 정한승에게 도움이 되려면 웬만한 진법에 대한 이해로는 안 되었다.
진법에 대한 깊이와 이해가 있는 자여야만 하였다.
“제갈세가의 분이면 괜찮지 않습니까?”
팽중호의 머리에 떠오른 사람 한 명.
그것은 바로 제갈세가의 제갈서린이었다.
제갈세가가 최근 하북성으로 그 터를 옮겼고, 하북팽가는 그런 제갈세가와 이런저런 왕래를 하며 우호를 다지는 중이었다.
그런 중에 제갈서린은 가끔씩 팽중호를 찾아오고는 하였는데, 그때마다 자꾸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그녀였다.
그래서 팽중호는 아예 그녀의 바람대로 일을 하나 주면 어떨까 싶었다.
‘그리고 아예 이참에 정 선생이랑 잘되면 좋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