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무림맹을 여기로 옮겨 보려고.
혈천궁에 향했던 무림맹 행렬은 다시금 각자의 문파와 세가로 돌아갔다.
분명 대전에서는 이긴 무림맹이지만, 실상은 진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다들 돌아가는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팽중호도 마찬가지였다.
‘이겼지만 졌다.’
자신이 중간에 나서서 최대한 막았지만, 결국 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제 무림은 걷잡을 수 없는, 대혼란의 시대가 될 터였다.
여기서 하북팽가와 무림맹의 처신에 따라 정말 많은 것들이 변할 터였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혈천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명확치 않다는 거지.’
적을 알아야 그에 맞는 처신을 할 터다.
그런데 지금 혈천궁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무림의 전복을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무림의 양분을 원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것을 원한다기에 혈천궁의 행보가 조금 이상했다.
그들은 지금의 대혼란을 야기한 후, 큰 움직임 없이 가만히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혈천궁에 소속된 사마 세력들이 날뛰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그들의 단독적인 움직임.
혈천궁이 나서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마치 힘을 정비할 시간을 주는 것 같단 말이야.’
지금 혈천궁은 마치 무림맹에 시간을 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힘을 정비하고, 자신들을 상대할 시간을 말이다.
무림 전복이나, 이분 체재를 공고히 하려 했다면 지금이 적기인데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으니 말이다.
‘마교랑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
혈천궁 궁주.
팽중호는 그를 보자마자 검마가 떠오르며, 곧바로 마교를 떠올렸다.
그리고 혈천궁이 마교의 준동이 있기 전에 활동했다는 것도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엮어지는 것은 혈천궁과 마교의 관계였다.
‘그런가. 혈천궁은 마교의 유흥을 위한 곳일 뿐이군.’
마교가 무림에 나오는 이유는 그들의 힘을 분출시키기 위함.
그렇다면 그 힘을 마음껏 분출시킬만한 상대가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무림에서 그런 상대는 역시나 무림맹.
지금 그들은 혈천궁을 이용해 무림맹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수준까지 끌어올릴 생각인 것이었다.
한마디로 혈천궁은 마교의 유흥을 위한 장치에 불과한 곳이란 소리.
어찌 보면 지금 혈천궁에 모인 사마 세력은 마교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당장은 나쁘지는 않은 거지만.’
어찌 되었건 혈천궁이든 마교든 그들이 당장에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준비할 시간이 있다는 것이니까.
‘일단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까?’
이제는 하북팽가 뿐만 아니라, 무림맹 전체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무림맹도 상황의 엄중함을 느끼고 대비를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분명 부족한 상황이었다.
혈천궁에 이은 마교의 진격까지 막아 내려면 훨씬 더 강한 힘을 키워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계속 세가를 비워 둘 수도 없는데 말이야.’
혈천궁과 하북팽가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쉽게 말해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그런 상황에서 팽중호가 팽가를 오래 비워 두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지금이야 혈천궁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지만, 내일은 또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이럴 거면 차라리 무림맹이 여기로 왔으면…… 음? 무림맹이 여기로……?’
팽중호는 갑자기 든 생각에 조금 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무림맹을 하북성으로 옮긴다는 생각.
물론 현실 가능성은 크지 않은 생각일 수 있었다.
단순하게 그냥 옮긴다고 옮겨지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불가능한 일은 결코 아니었기에, 분명 생각해 볼 가치는 있는 일이었다.
‘쉽지는 않겠지만…….’
하남성에 무림맹이 자리를 잡음으로 그 주변으로 수많은 이권이 얽혀 있다.
그것들을 모두 버리고 하북성으로 옮긴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 엄청난 반대가 있을 터다.
무림의 큰 위기라고 해도 이권을 포기하려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들에게 이권이란 무림의 안위보다도 소중한 것일 수 있으니까.
‘일단 시도나 해 보자.’
팽중호는 일단 시도나 해 보기로 했다.
확실히 무림맹을 하북성으로 옮기면, 좋은 점이 많았으니 말이다.
“춘오야.”
“예.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라서 말이야.”
“하아. 벌써 귀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크크크크.”
팽중호는 세상 귀찮다는 표정을 하는 장춘오에게 무림맹을 하북성으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장춘오는 곧바로 머리를 싸맸는데, 그래도 성실하게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이런저런 계획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말을 할 때마다 가능성이 썩 높지 않다는 것을 앞에 붙였지만 말이다.
“춘오야 아니다. 너는 일단 다른 일부터 하고 있어라.”
“예?”
“내가 싹 다 담판 지어서 끝내고, 그 후에 다시 얘기하자.”
“설마 무림맹에 가서 힘으로 담판 지으려는 건 아니시지요?”
씨익-
장춘오의 말에 팽중호는 그저 미소로 답했다.
지금 팽중호는 무림맹 이전을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럼 무림맹이 하북성으로 왔을 때를 상정하고 계획을 짜겠습니다.”
장춘오는 팽중호라면 분명 무림맹을 이 하북성으로 옮겨 올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팽중호가 한다고 해서 못한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장춘오는 팽중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 출발하실 생각이십니까?”
“내일. 쇠뿔도 단김에 빼는 게 좋잖아?”
* * *
그날 저녁.
팽중호는 무림맹으로 떠나기 위해 간단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번 무림맹 행에는 따로 사람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 다녀올 생각이었다.
혈천궁의 혹시나 있을지 모를 공격에 대비해 말이다.
핵심 인원을 뺐다가는 그들의 공격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
“가가. 또 어디를 가십니까?”
그때 이세경이 팽중호를 찾아왔다.
그녀는 팽중호가 짐을 꾸리는 것을 보고는 또 어딘가를 가려 한다는 걸 알았다.
“무림맹에 좀 가려고.”
“너무 바쁘신 것 아닙니까?”
확실히 최근 팽중호는 그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였다.
하북팽가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나가서 일하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세경은 팽중호가 스스로를 너무나 혹사하는 것 같아 걱정되었다.
팽중호는 분명 대단한 사람이지만, 그런 그도 결국 사람이다.
사람은 분명 쉴 때는 쉬어 줘야 했다.
턱-
팽중호는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이세경에게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에 손을 탁 올렸다.
오랫동안 도를 쥐어 투박하고 단단한 그의 손.
하지만 그 어떤 손보다도 따뜻한 손이었다.
“내가 항상 말하잖아.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모든 일만 끝내면 제발 움직여 달라고 해도 쉴 거야.”
“저는 무얼 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이세경은 팽중호의 마음을 알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를 물었다.
무언가라도 조금 더 도움이 되고 싶었으니 말이다.
“지금처럼만 해 주면 돼.”
“……알겠습니다.”
팽중호는 이세경이 지금 아주 잘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실 팽중호 못지않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최근 그녀는 태도상단까지 신조상단으로 품으면서, 지금 이 주변 성도의 상권을 쥐고 흔드는 가장 큰손이 되어 있었다.
‘태도상단과 신조상단의 합병.’
혈천궁의 일 때문에 무림에 큰 파문이 일지는 못했지만, 사실 이 주변 상단과 상인들에게는 혈천궁만큼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일이었다.
하북성을 이분하던 거대 상단인 두 곳이 하나로 합쳐졌으니 말이다.
물론 두 상단 모두 하북팽가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하나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지만, 실제로 하나가 되는 것과는 분명 다른 것.
신조상단의 이름으로 하나가 된 두 상단은 지금 하북성을 넘어 섬서, 하남, 산동, 산서까지 그 세력을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초거대 상단이 된 신조상단을 이끄는 실질적인 실세.
‘천안화(天眼花) 이세경.’
하늘의 눈을 가졌을 만큼 안목이 뛰어나고, 꽃보다도 아름다운 그녀의 미모를 보고 사람들이 부르는 별호가 바로 천안화(天眼花)였다.
이세경은 이 거대해진 신조상단을 지금 그 누구보다 완벽하게 이끌고 있었다.
이런 그녀가 무언갈 더 해 줄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처럼만 있어 주어도 팽중호에게는 더없이 큰 힘이 되었다.
“그것보다 어때? 우리 무인들은 잘해 주고 있지?”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다들 팽가의 무인분들과 함께 상행을 하고 싶다고들 아우성입니다.”
신조상단의 중요한 상행에는 항상 하북팽가의 무인들이 함께했다.
팽가의 무인들과 함께하는 상행에서는 언제나 단 한 명의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기에, 신조상단의 상인들은 다들 팽가의 무인들과 상행을 하기를 원했다.
그만큼 지금 팽가의 무인들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소리였다.
“그래? 잘됐네.”
팽중호는 팽가 무인들이 잘하고 있다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런 하수상한 시국에 상단의 호위는 중요했다.
사마 세력이 날뛰며 상행을 습격하는 일이 굉장히 빈번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팽가의 무인들을 신조상단의 상행에 항상 동행하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잘 되고 있다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무림맹에는 무슨 일로 가십니까?”
이세경은 왜 팽중호가 무림맹으로 향하는지를 물었다.
지금 당장 팽중호가 무림맹으로 향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무림맹을 여기로 옮겨 보려고.”
“예?”
장춘오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이세경.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무림맹 이전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물론 그렇다고 팽중호가 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해냈으니 말이다.
“혼자서 하시려는 겁니까?”
다만, 모든 일을 혼자서 하려고 한다는 것이 걱정되었다.
지금의 무림맹은 팽중호에게 매우 호의적이지만, 무림맹을 옮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직접적인 그들의 이권에 개입하게 되니 말이다.
무림맹 이전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분명 그들의 반대에 부딪혀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팽중호는 많은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을 온전히 혼자서 감당하기란 아무리 팽중호라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왜 혼자야? 무림맹에 도수랑 대장로님이 계시는데.”
지금 무림맹에는 대장로 팽조운과 도수가 머물러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팽중호 혼자는 아닌 것이다.
“그래도 너무 적습니다.”
“아니, 이 정도가 딱이야.”
팽중호는 이번 일에 인원이 많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일은 자신이 혼자 다 처리할 것이니 말이다.
“아, 그보다 세경은 무림맹 건물이 세워질 자리를 좀 알아봐 줄래? 이왕이면 실력 좋은 장인들도 많이 봐 주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단!”
팽중호의 부탁에 알았다고 대답하는 이세경.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단’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무언가 조건이 있다는 것.
팽중호는 말해보라는 눈빛을 이세경에게 보내었다.
“오늘은 저와 함께 보내 주셔야겠습니다.”
“하하! 알았어.”
최근 팽중호와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한 그녀였다.
그렇기에 오늘은 온전히 팽중호와 함께 보내고 싶었다.
사실 이러기 위해서 요 며칠 업무를 미리미리 처리한 그녀였다.
‘좋았어.’
그녀는 팽중호가 제갈세가의 제갈서린과 이야기가 오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확실하게 팽중호를 자신의 것(?)으로 먼저 점찍어 둘 생각이었다.
“좋아. 그런데 일단 그 전에 위 소협한테 좀 다녀와도 될까?”
“물론이죠. 안 그래도 저도 한 번 뵈러 가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