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뭐, 나름 재미있습니다.
바닥을 구르는 패중권의 목.
그런데 그 주변에 피가 좀 퍼져 있었다.
강시인 패중권에게 피가 나올 수는 없는 법.
그렇다면 이 피의 주인은 위지철이란 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소가주님.”
위지철이 입가에 피를 흘리며 팽중호에게 미안함을 표했다.
함께 싸운다고 했으면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위지철은 지금 어깨가 상하고, 내장이 다쳤다.
사실상 지금 서 있는 것도 용한 상태였다.
혈라천강시가 된 패중권을 이긴 것도 사실 천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었다.
“위 소협은 충분히 할 일을 하셨습니다. 내려가서 쉬십시오. 채령이한테 원망 듣기 싫으니 말입니다.”
“예.”
위지철은 팽중호의 말에 곧바로 비무대를 내려갔다.
자신의 상태가 팽중호에게 큰 걸림돌일 뿐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위지철이 비무대 아래로 내려가자 무림맹 사람들이 다가와 그를 곧바로 옮겨 치료하기 시작했다.
위지철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것을 안 것이다.
휘이이잉-
그렇게 위지철이 내려가고 비무대 위에 홀로 서 있는 팽중호.
지금 모든 시선이 그런 팽중호에게 향해 있었다.
과연 지금 이 대전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를 궁금해하며 말이다.
“일주. 네가 나가거라.”
“예.”
그때 혈천궁 궁주의 입이 열리고, 일주가 비무대 위로 날아들었다.
허공을 걷듯이 날아 비무대 위에 선 일주.
이 모습만으로도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허공답보(虛空踏步).
이것은 최소한 화경 초입은 벗어난 이들만이 쓸 수 있는 경지였으니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비무대에 올라서서 팽중호를 바라보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는 일주.
조금 전 팽중호의 실력을 봤음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것일 터였다.
“예. 안녕하십니까.”
팽중호는 일주가 나온 것을 보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궁주가 직접 나온다면 좋았겠지만, 그가 직접 움직일 생각은 없어 보였기에 일주가 나온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일주는 분명 혈천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인물일 테니 말이다.
그만 쓰러트려도 혈천궁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일 터였다.
“서로 긴 말은 필요 없을 것 같으니, 바로 시작할까요?”
“그러죠.”
스윽-
일주가 주먹을 앞으로 뻗어 들었다.
그저 손을 앞으로 뻗은 것뿐인데도, 주변의 공기가 일변하기 시작했다.
스으으으으으-
그리고 일주의 주먹에 검붉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과 달리 특별해 보일 것 없는 모습.
하지만 곧 그 생각은 수정해야만 했다.
스으으으으으-
주먹에 감돌던 검붉은 기운이 일주의 온몸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이내 온몸을 감싸서 마치 갑주를 걸친 것처럼 보이게끔 변했다.
검붉은 혈기의 갑주를 두른 일주.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대장군과도 같이 위엄 넘치면서도, 보는 이를 절로 위축 들게 만드는 공포스러운 모습이었다.
“호? 재밌는 무공입니다.”
“붙어 보시면 재미없을 겁니다.”
팽중호는 지금 일주의 무공과 같은 것을 처음 보았다.
아니, 아마 이곳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처음 보는 것일 터다.
기운을 몸에 둘러 갑옷처럼 만든다니?
어떻게 보자면 굉장히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저런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내공이 소모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저 정도의 무인이 그런 것도 생각하지 못할 리는 없을 터고, 분명 무언가 숨겨진 것이 있을 터였다.
쾅-
일주가 엄청난 진각과 동시에 팽중호에게 쇄도했다.
그저 달려오는 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리게 만들 정도인 일주의 쇄도.
쿠르릉-
팽중호도 일주의 기세가 지금까지의 상대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상대할 준비를 하였다.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았다가는, 아무리 자신이라도 멀쩡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콰아앙-!
콰가가가가가각-!
팽중호와 일주의 첫 부딪침.
이 한 번의 부딪침으로 비무대 바닥이 모조리 박살이 나 버렸다.
두 사람의 힘을 짐작게 할 수 있는 엄청난 광경.
이런 엄청난 격돌에도 두 사람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서로 계속 공방을 주고받았다.
일권, 일도가 모두 스치기만 해도 살이 갈라지고, 뼈가 부서질 위력.
카앙-! 콰각-! 쾅-! 콰가가가각-!
팽중호의 무적도가 연신 공세를 퍼부으며 일주를 공격했는데, 일주는 공격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 내며 역으로 팽중호를 압박해 나갔다.
파천혈라신갑(破天血羅神鉀).
혈천궁 궁주가 직접 일주에게 전수해 준 무공.
혈기를 갑옷처럼 몸에 둘러 싸우는 이 무공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완전무결한 방어였다.
검강조차 뚫지 못하는 혈기의 갑옷은, 오로지 상대를 죽일 생각만 하면 되게끔 만들어 주었고, 그것은 곧 엄청난 이점으로 돌아왔다.
퍼엉-!
후두두두둑-
팽중호의 얼굴 바로 옆을 스치는 일주의 주먹.
공격은 피했지만, 팽중호의 머리카락들이 흩날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어떻습니까? 재미있지 않습니까?”
“뭐, 나름 재미있습니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하는 일주
팽중호는 확실히 그럴 만한 자격이 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팽중호의 실력으로도 그는 분명 쉽지 않은 상대였다.
이전의 상대들처럼 손쉽게 이길 수는 없는 상대.
“그럼 이제 제 실력을 발휘해 볼까요?”
“얼마든지.”
지금까지는 가벼운 몸풀기에 지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싸움은 이제부터.
두 사람의 몸에서 순식간에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화경의 경지를 넘어서고 그다음의 경지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대결.
앞선 대결들과는 분명 차원이 달랐다.
쿠르르릉-
-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혼뢰단세(混雷斷世).
또다시 팽중호의 손에서 펼쳐진 혼뢰단세의 초식.
이전 모용정승을 베었을 때와 같은 연속 혼뢰단세였다.
“흐아아아압!”
일주는 팽중호의 이 도격을 기합과 함께 그대로 몸을 받아 내었다.
그 단단한 혈라천강시의 몸도 베어 낸 공격을 말이다.
콰카카가가가가가가각-!
일주의 몸에 작렬한 혼뢰단세.
혈기의 갑옷이 그대로 갈라져 박살 나 버렸는데, 그래도 일주는 이 공격을 버텨 내었다.
그만큼 파천혈라신갑이 단단한 것도 있었지만, 이미 팽중호의 내공이 조금 소모된 탓도 있었다.
이 연속된 혼뢰단세는 엄청난 내공을 잡아먹기에, 팽중호라도 짧은 시간에 두 번이나 펼치는 것은 무리가 있었으니 말이다.
스으으으으으으으-
다시금 원래의 모습으로 혈기의 갑옷이 돌아왔다.
그리고 일주가 그대로 팽중호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진 일주.
그리고 팽중호의 면전 앞에 일주의 신형이 다시금 나타났다.
- 파천혈라신갑(破天血羅神鉀). 혈라만천수(血羅滿天手).
그리고 엄청난 수의 손이 팽중호의 온 사방을 뒤덮기 시작했다.
나타남과 동시에 그대로 팽중호에게 작렬하는 혈라만천수.
어떻게 준비할 시간조차 없을 만큼의 찰나였다.
“흣차!”
팽중호가 기합과 함께 무적도를 휘둘렀다.
기합을 내지르는 것은 꽤 이례적인 일.
그만큼 지금 팽중호도 힘을 짜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뇌룡진천(雷龍振天).
쿠르르르르릉-
거대한 뇌성의 울림과 함께 나타난 뇌룡.
이 뇌룡이 그대로 팽중호를 감싸며 휘돌기 시작했다.
퍼버버버버버벅- 콰가가가가가각-
일주의 혈라만천수가 뇌룡에게 작렬했고, 이내 엄청난 소리를 내며 힘 싸움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콰가가가가가각-
한 마리의 뇌룡이 더 튀어나와 그대로 모든 혈라만천수를 먹어 치우고는, 일주에게로 향했다.
두 마리의 뇌룡.
뇌룡진천의 초식도 또 다른 진화를 이루어 낸 것이었다.
콰가각- 크그그그그극- 쾅-!
일주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뇌룡을 그대로 손으로 잡아채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치이이이익-
뇌룡을 막아 내기는 했지만, 일주의 두 손이 뇌기에 의해 새카맣게 타 버려 있었다.
물론 이 정도 상처에 머뭇거릴 일주는 아니었다.
아직 남은 수는 그에게도 더 있었다.
다만, 그것은 팽중호도 마찬가지일 것이란 게 문제지만 말이다.
“계속 가 봅시다.”
팽중호는 얼굴에 땀을 조금 흘렸을 뿐, 아직까지도 꽤 멀쩡한 상태.
이대로 이 싸움의 끝을 볼 생각이었다.
여기서 끝을 내야 무림맹에게 이야기가 유리하게 흘러갈 테니 말이다.
짝짝짝짝짝-
“대전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갑자기 난데없는 박수 소리와 함께 혈천궁 궁주의 목소리가 주변에 퍼졌다.
덕분에 팽팽한 긴장감이 팽배하던 주변의 긴장이 깨졌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이만 다들 편히 쉬시기를 바랍니다.”
궁주가 주변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팽중호는 그런 궁주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속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쯧. 여기서 끝내면 자신들에게 나쁠 것 없다는 거군.’
여기서 이 대전이 끝나면 혈천궁이 나쁠 것이 전혀 없었다.
이미 무림맹을 상대로 힘은 충분히 보여 주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여기서 자신과 일주가 더 싸우게 되면 일주가 당했을 수도 있었지만, 여기서 싸움을 멈춤으로 일주는 지금 자신과 비등한 힘을 보여 준 무인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럼. 이만.”
팽중호는 아쉬웠지만, 그대로 몸을 돌렸다.
저들이 여기서 끝을 낸다고 하면,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도는 없었으니 말이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비무대를 내려가는 팽중호를 가만히 바라보는 궁주.
그의 두 눈은 지금 온통 즐거움이란 감정으로 가득했다.
팽중호의 손에 여러 가지 패를 잃은 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눈이었다.
‘흐으음. 좋아. 확실히 저자가 분명 우리의 즐거움이 되어 주겠구나.’
* * *
무림에 혈천궁의 개파 대전에 대한 이야기들이 쫘악 퍼졌다.
아니 어쩌면 이야기가 퍼지는 것이 당연했다.
앞으로의 무림의 정세가 뒤바뀔 수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혈천궁이 무림맹과 비교해도 크게 뒤처지지 않았다.’
지금 무림에 퍼진 가장 뜨거운 이야기였다.
분명 무림맹이 싸움에서는 모두 승리했지만, 큰 상처를 입었고 그것은 곧 혈천궁의 힘이 무림맹 못지않다는 뜻이었다.
이제 막 기지개를 켠 혈천궁의 힘이 무림맹 못지않다?
이건 분명 무림을 달아오르게 할 만하지 않겠는가?
‘뇌신도성(雷神刀星) 팽중호와 호각으로 싸운 무인이 있다.’
그리고 무림을 달아오르게 하는 또 하나의 소문.
그것은 바로 일주와 팽중호의 대전에 관한 것이었다.
혈천궁 궁주가 싸움을 멈추기 전까지 일주는 팽중호와 나름 호각으로 싸웠고, 그것은 일주의 실력이 팽중호 못지않다는 뜻.
현재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무인으로 손꼽히는 팽중호와 호각으로 싸우는 무인이 혈천궁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혈천궁의 위세가 올라갈 만한 소문이었다.
‘앞으로의 무림은 이제 혈천궁과 무림맹이 이분해서 나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이번 개파 대전 이후로 내린 결론.
그것은 무림의 이분(二分)이었다.
전에 무림맹과 정우맹의 이분과는 사뭇 다른 이분.
그때는 서로 정도 세력 간의 이분이었다면, 지금은 정도 세력과 사마(邪魔) 세력의 이분이었다.
정도 세력에 탄압받던 수많은 사도 문파들과 마두들이 혈천궁으로 향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대(大) 혈천궁.’
혈천궁의 힘에 대해 눈치를 보던 이들이 모두 합류하자, 혈천궁의 세력은 이제 무림맹을 뛰어넘을 정도로 거대해졌고, 혈천궁의 힘을 업은 사마 세력들이 날뛰며 무림은 이제 더없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칼부림이 무림에서 일어났고, 그때마다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다.
자기의 배를 불리기 위해 나태해졌던 정도 세력들은 사마 세력의 공격에 손쉽게 쓸려 나가기 시작했고,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리고 힘을 합쳐 간신히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내며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이게 진정한 약육강식의 무림이다.’
진정한 약육강식의 무림.
이제는 정말 힘이 없으면 모든 걸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는 무림이 펼쳐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