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역시 좋지 않구나.
개파 대전의 날이 밝았다.
혈천궁의 중앙에 마련된, 정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거대한 비무대에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였다.
그렇게 정말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였건만, 그럼에도 비무대 주변이 가득 차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비무대였다.
“이야. 여기다 돈을 얼마나 쓴 거야?”
팽중호도 비무대의 규모에 감탄했다.
지금까지 이런 크기의 비무대를 본 적은 결코 없었으니 말이다.
“허…….”
주변 무림맹 무인들도 모두 조금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비무대의 규모에 뭔가 살짝 압도되는 기분이 든 것이다.
“자, 다들 이동하세.”
무각의 말에 무림맹 무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비무대 한쪽에 마련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리는 혈천궁의 무인들이 있는 자리와 정확히 마주 보고 있는 곳.
확실한 대립 구도를 만드는 자리였다.
스읏- 탓-
그렇게 무림맹 무인들은 물론 비무대 주변이 사람들로 모두 찼을 때.
비무대 위로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어제는 볼 수 없었던 백발 백미의 노인.
“안녕들 하십니까. 혈천궁의 궁주를 맡고 있는 늙은이입니다.”
혈천궁 궁주라는 말에 주변 모든 시선이 향했다.
지금까지 사람들 앞에 궁주가 나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당연했다.
베일에 싸여 있던 그의 실체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검마와 비슷한 수준이다.’
팽중호는 궁주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그의 강함을 알아보았다.
검마에게서 느꼈던 압도적인 강함.
그것이 지금 궁주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만약 궁주가 직접 대전에 나선다면……. 정말 힘들어지겠는데?’
만약 궁주가 직접 대전에 참여한다고 하면,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자신밖에 없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무림맹의 그 누구도 궁주의 상대가 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오늘 이렇게 우리 혈천궁의 개파 대전에 참여해 준 것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팽중호의 시선을 느꼈음일까?
중앙에서 담담히 말을 이어 가던 궁주의 시선이 팽중호에게로 향했다.
팽중호를 바라보고 일순 눈을 반짝이는 궁주.
지금 궁주도 팽중호의 힘을 알아본 것이다.
“특히나 무림맹의 뛰어난 영웅들과 대전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여전히 팽중호를 바라보며 말을 하는 궁주.
팽중호도 그런 궁주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 간에 보이지 않는 기 싸움.
그렇게 아주 찰나 간 이어진 기 싸움은 궁주가 먼저 시선을 거둠으로 끝이 났다.
“그럼 시간 끌지 않고, 곧바로 대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짝짝-
궁주는 곧바로 대전의 시작을 알리며, 손뼉을 두 번 쳤다.
그러자 혈천궁 쪽에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나더니, 곧바로 개파 대전의 준비가 이루어졌다.
뭐, 사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그저 개파 대전에 참여할 이들이 비무대 위로 올라선 것일 뿐이니 말이다.
거대한 비무대 위에 올라선 열두 명의 혈천궁 무인.
“저들은 우리 혈천궁의 십이혈무대라고 합니다.”
혈천궁 무인들이 올라서자 혈천궁 측의 무인 중 하나가 그들을 소개했다.
십이혈무대(十二血武隊).
혈천궁이 만들어낸 특수 무력 부대.
그들은 혈천궁의 수많은 임무를 도맡아 처리하였는데, 특히나 하나의 세력을 궤멸시킬 때 그들이 동원되었다.
한 줌의 자비도 없는 손속과 잔혹한 무공에, 그들은 이미 무림에 악명으로 자자했다.
“저희도 가죠.”
십이혈무대를 보고 무림맹에서도 열두 명의 무인이 비무대로 올라섰다.
그들은 무림맹 소속 백룡대(白龍隊)의 무인들이었다.
무림맹 무력부대 중 두 번째로 강한 힘을 가진 무력부대인 백룡대는 사실상 지금 당장 무림맹이 내보일 수 있는 최고의 무인들이었다.
하나같이 잘 절제된 기운을 가진 백룡대의 무인들.
특히나 인상적인 것이 있다면, 그들의 눈빛이었다.
마치 죽기를 각오한 듯 형형하게 빛나는 그들의 눈빛은, 그들의 각오가 지금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끔 해 주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모든 대전은 생사결로 진행됩니다.”
혈천궁의 무인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생사결.
목숨을 건 결투.
이 비무대 위에서는 상대방을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것도 예상한 것이기에, 무림맹 무인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쿠웅-
거대한 종소리와 함께 대전이 시작되었다.
비무대 위는 지금, 스물네 명의 무인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선 형국.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며 틈을 보고 찾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대치가 지속되던 중, 십이혈무대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슥- 스슥- 스슥- 스슥-
마치 귀신처럼 움직이는 십이혈무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진 그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며 백룡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춘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짜여진 듯 움직이는 그들.
꽤 상승의 합격진임이 분명했다.
“수호진을 펼쳐라!”
“예!”
백룡대 무인들도 곧바로 합격진을 펼치며, 십이혈무대의 공세에 대비했다.
수호진(守護陣).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며, 상대의 공세를 막아 내는 이 진법은 간단하지만 상당한 효율을 보여 주는 합격진이었다.
제갈세가에서 만든 것이니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카카캉- 캉- 카아앙-!
그렇게 십이혈무대와 백룡대가 격돌을 시작했다.
서로 한치의 밀림도 없는 팽팽한 싸움.
생사결이 주는 느낌 때문이라 그럴까?
두 부대 간의 싸움은 정말 전쟁을 방불케 하는 치열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서걱- 촤악-
그때 백룡대 무인의 어깨가 베이며, 다량의 피가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일순 깨져 버린 백룡대의 수호진.
십이혈무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다시 재정비해!”
“예!”
하지만 백룡대 무인들도 이런 경험이 다수 있는 이들.
재빠르게 다친 이를 안으로 넣고, 빈자리를 다시금 메우며 수호진을 재정비했다.
카카카캉- 캉- 카아앙- 캉-!
점점 더 거세지는 소리.
그만큼 싸움이 격렬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십이혈무대는 연신 백룡대를 밀어붙이고 있었는데, 그만큼 그들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뜻.
사람들은 이 싸움의 결과가 나지는 않았지만, 이미 놀라고 있었다.
무려 무림맹의 백룡대를 쉴 새 없이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혈천궁의 힘이야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무림맹에는 못 미친다는 것이 사람들의 중론이었다.
그런데 지금 혈천궁의 십이혈무대가 무림맹의 힘을 상징하는 백룡대를 밀어붙이니, 이건 곧 혈천궁의 힘이 무림맹과 비슷한 수준이란 소리가 되지 않겠는가?
씨익-
혈천궁 무인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미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그들이 생각한 계획의 반은 성공한 것이니 말이다.
사람들에게 혈천궁이 힘이 무림맹 못지않다는 것만 보여 줘도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푹-
백룡대 무인의 가슴팍에 한 자루 검이 박혔다.
십이혈무대의 집요한 공격이 성공을 거둔 것이다.
“흐읍!”
꽈악- 서걱-
하지만 가슴팍을 찔린 백룡대 무인이 그대로 이를 악물더니, 자신을 찌른 검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에, 자신을 찌른 십이혈무대의 목을 베어 버렸다.
자신이 죽을지언정 하나를 데리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털썩-
물론 가슴팍이 찔린 만큼 살아남을 수는 없었고, 그렇게 백룡대 무인도 바닥에 쓰러졌다.
백룡대 무인들은 이 모습에 더욱 이를 꽉 물며 온 힘을 짜내기 시작했다.
서걱- 촤아악- 푸욱- 촤악-!
인원이 비고, 합격진이 깨지자 이곳저곳에서 베이고 꿰뚫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둘씩 쓰러져 나가는 백룡대와 십이혈무대.
서석- 촤아아악- 툭-
그렇게 서로를 죽고 죽이는 처절한 싸움이 슬슬 끝이 났다.
마지막 십이혈무대의 목이 떨어지는 것으로 말이다.
승자는 백룡대.
하지만 백룡대도 멀쩡하지는 못했다.
절반의 인원이 죽음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승리했음에도 백룡대의 표정을 밝지 못했다.
“다음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혈천궁은 십이혈무대가 졌지만, 다들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 십이혈무대는 그저 소모품일 뿐인 데다가, 어차피 이미 어느 정도는 성과를 낸 것이기에 아쉽지 않아서였다.
스윽- 스윽-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인영들이 십이혈무대의 시신을 들고는 사라졌고, 백룡대 무인들은 직접 쓰러진 전우의 시신을 들고 비무대를 내려왔다.
모두 함께 동고동락한 사이인 이들이 싸늘한 주검이 되었으니 당연히 표정들은 모두 침통했다.
죽음을 바로 옆에 두고 사는 무인이라도 가까운 사람의 언제나 죽음은 슬픈 법이었다.
“고생했네.”
무각이 그들에게 아주 간단한 말만 하였다.
여기서 무어라 길게 말을 해 봐야 그들의 슬픔만 가중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꾸벅 목례를 한 백룡대 무인들은 그대로 시신들을 들고 이곳을 벗어났다.
이들의 시신을 무림맹으로 보내기 위함이었다.
‘후우. 역시 좋지 않구나.’
팽중호는 아무런 말 없이 떠나는 백룡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사상자가 나올 것임을 알았음에도, 당연히 마음이 좋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많았다면 괜찮았을까?
아니다.
시간이 많았다면 혈천궁도 더 준비했을 것이고,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슬픔은 뒤로 밀어 두고, 일단 지금에 집중하자.’
아직 개파 대전은 끝나지 않았다.
여기서 슬픔에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자.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비무대 위에서 곧바로 다음 대전이 시작되었다.
이번 대전은 오 대 오의 대전.
혈천궁에서 나온 다섯 무인은 혈영오살(血影五殺)이라는 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최근에 혈천궁에 합류한 마두들이었다.
다들 무림맹에 공적으로 낙인이 찍혀 있던 이들.
이들은 무림맹을 피해 혈천궁에 몸을 담은 뒤, 혈영오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준비하세나.”
“예.”
그리고 그 혈영오살을 상대하는 무림맹 측의 다섯 무인은 매화검수(梅花劍手)들이었다.
화산파는 가장 실력이 좋은 무인들에게 붙여 주는 명예로운 이름인 매화검수.
그만큼 실력은 인증이 된 자들이란 소리.
이번 혈천궁행에 화산파는 매화검수를 보내었고, 그들 중 가장 실력이 좋은 다섯이 지금 비무대 위에 선 것이다.
“매화검수를 이렇게 대놓고 죽일 수 있다니, 이거 너무 기대되는군.”
“케케케. 그러게 말이야.”
혈영오살은 매화검수들을 보고는 저마다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혈천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매화검수를 보는 순간 도망쳤어야 할 신세였다.
하지만 지금은 당당히 맞서서 싸울 수 있었으니 아주 만족스러웠다.
“여기서 속 썩이던 마두들을 처단할 수 있으니 좋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매화검수들도 지지 않았다.
그들도 여러 마두들을 소탕하며, 많이 단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말싸움부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양쪽의 대결.
서로 말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안 양쪽은 곧바로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어 들었다.
매화검수들은 모두 화산파에서 내려준 검을 꺼내어 들었고, 혈영오살은 저마다 특이한 무기들을 꺼내어 들었다.
낫, 삼절곤, 유성추, 극, 쌍검.
무림에서 쉬이 보기 힘든 무기들.
혈영오살은 이 무기들로 기형의 묘를 살리는 자들이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보자고, 매화검수 나리들.”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