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거, 뭐 눈치를 보고 그러십니까?
곽종구는 팽중호를 보자 몸을 벌벌 떨며, 말까지 더듬었다.
전보다는 많이 괜찮아졌지만, 아직까지 곽종구는 팽중호를 두려워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왔는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곽종구를 대신해 곽무조가 팽중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팽중호가 그냥 얼굴이나 보러 왔을 리는 없을 터.
분명 무슨 용무가 있어서 왔을 터라는 걸 알았다.
팽중호가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아니 말이다.
“예전에 제가 검을 부러트리지 않았습니까?”
“아, 그런 일이 있었지.”
예전 하북지회에서 팽중호가 적검문의 신물인 적혈검을 박살 냈었다.
곽종구는 그때의 기억이 나는지 갑자기 몸을 흠칫 떨었다.
“그래서 제가 선물을 하나 드리려고 왔습니다.”
스윽- 탁-
팽중호는 칠주의 검을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팽중호가 탁자에 검을 탁자에 올리자, 곽무조가 이게 무엇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선물을 준다더니, 갑자기 무슨 검이란 말인가?
“한 번 빼서 보십시오.”
“알겠네.”
곽무조는 팽중호의 말에 일단 검을 잡았다.
검을 잡자 느껴지는 익숙하면서도 요상한 기운에 곽무조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절대 평범한 검이 아님을 느낀 것이다.
스릉-
요사스러운 검붉은색의 검신.
마치 사람의 피를 빨아먹은 듯한 자태의 검.
“보통 검이 아니군.”
“뭐, 혈천궁에 있던 놈이 쓰던 거니 그럴 겁니다.”
“……!! 그런 것을 우리가 써도 되겠나?”
“검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잘못이지.”
검은 사용하기 위한 도구일 뿐.
그 검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신검이니 마검이니 하며 불릴 뿐이다.
“어떻습니까? 적호각에 딱 어울릴 것 같은데.”
“분명…… 잘 어울리긴 할 것 같네.”
곽무조는 지금 이 검이 부러진 적혈검보다 훨씬 좋은 검이란 걸 느꼈다.
그리고 새롭게 익히게 된 적호검법과도 너무나 잘 어울릴 것이란 것도 느꼈고 말이다.
“그럼 이건 내 아들놈에게 줘도 되겠나?”
“마음대로 하십시오.”
곽무조는 검을 옆에 있던 곽종구에게 건네주었다.
아직 얼떨떨한 표정으로 검을 받아드는 곽종구.
“적호각의 각주는 너이니,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나을 것 아니냐.”
“제,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곽종구는 팽중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얼마든지.”
팽중호는 그런 곽종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 주었다.
어차피 이미 곽종구가 쓰게 될 것이라 예상했으니 말이다.
“감사합니다!”
검을 받아든 곽종구가 꾸벅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였다.
사실 그는 팽중호가 아직까지 자신에게 원한이 남아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팽중호는 예전의 원한은 이미 다 날려 버린 듯했다.
괜히 두려워하고 숨어 있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못나 보이는 곽종구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정말 고맙네.”
“뭘요. 제가 감사하지요.”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적호각을 잘 부탁드립니다.”
팽중호는 전해 줄 것은 다 전해 주었으니, 적호각을 벗어났다.
다시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팽중호.
그런데 팽중호의 처소에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무슨 일이야?”
“가가를 뵈러 왔습니다.”
팽중호의 처소에 먼저 와 있던 손님은 바로 이세경이었다.
해가 져 가는 살짝 늦은 시간.
평소 이세경이 찾아오는 시간은 아니었다.
“나를?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아니고…… 낮에 일이 생각이 나서 왔습니다.”
“낮?”
낮에 일이라니?
이세경이 찾아올 만한 일이 있었던가?
팽중호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이세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하아. 그…… 제갈세가의 소저와 하신 말씀 때문에 왔습니다.”
“아!”
팽중호는 그제야 왜 이세경이 찾아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질투가 났어?”
“예? 그, 그것이 아니라…….”
예전에는 이세경이 팽중호를 당황하게 하였는데, 최근에는 팽중호가 이세경을 당황케 했다.
관계가 역전이 된 것이다.
“걱정하지 마. 너랑도 혼인을 안 했는데, 내가 다른 누구랑 할까.”
팽중호는 정말로 첩을 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지금 이세경과도 혼인하지 않았는데, 첩은 무슨 첩이란 말인가?
“그래도 괜히 걱정됩니다. 가가는 분명 너무나 매력적인 분이니 말입니다.”
“하하. 말이라도 기분 좋은걸?”
“…….”
이세경은 자신 혼자서 팽중호를 독차지하기는 힘들 것이란 걸 머리로는 분명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마저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내일이 되면 아마, 그 제갈 소저도 분명 날 포기할걸? 나 같은 망나니는 싫을 테니까.”
팽중호는 아직까지 조금 불안하다는 표정을 하는 이세경에게 내일 자신이 할 일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깜짝 놀라는 이세경의 표정.
“반발이 꽤 심할 겁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 아니겠어?”
“그렇지만…… 절대로 쉽지 않을 겁니다. 특히나 그들은 이번에 우리가 조금만 틈을 보이면 물어뜯으려 할 테니 말입니다.”
“괜찮아. 틈을 안 보여 주면 되니까.”
자신감 넘치는 팽중호의 목소리와 표정.
이세경은 그 모습을 보고 팽중호를 믿기로 했다.
그라면 방금 한 말을 분명 이룰 테니 말이다.
다만, 그 일이 팽중호의 말처럼 흘러간다면…….
‘오히려 더 많은 경쟁자가 생길 것 같다.’
팽중호는 내일의 일로 정이 떨어져 나갈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세경의 생각은 그 반대였다.
내일 일이 팽중호가 말한 대로 흘러간다면, 제갈서린 뿐만 아니라 다른 세가의 여식들을 모두 경쟁자로 두게 될지도 몰랐다.
‘내가 더 노력하는 수밖에.’
이세경은 굳은 다짐을 하며 팽중호를 바라보았고, 팽중호는 그런 이세경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다음 날.
하북팽가는 아침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오대회합의 꽃인 비무회를 위해 모여 있는 다른 세가를 향한 팽중호의 선전포고 때문이었다.
“어차피 다들 이렇게 시시하게 비무나 하려고 오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음?”
“그게 무슨 말인가?”
“하북팽가를 정우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오신 것 아닙니까? 설득이 안 되면 힘으로라도 말입니다.”
팽중호의 말에 다른 세가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확실히 그들은 이번 오대회합에서 만약 하북팽가와 이야기가 잘 흘러가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하북팽가를 정우맹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무림맹에 빼앗길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제가 제안을 하나 할까 합니다.”
팽중호의 말에 주변 모두가 집중하기 시작했다.
“비무는 저와 다른 네 세가의 가주님들만 하는 것으로 하죠.”
가주가 비무에 나선다?
오대회합의 비무회에서 가주가 직접 비무에 나선 일은 지금까지는 없었다.
“어떻게 비무를 하자는 것이지?”
“일 대 사의 비무입니다.”
“혼자 우리 넷을 모두 상대하겠다는 건가?”
“예. 한꺼번에 덤비셔도 되고, 따로따로 덤비셔도 됩니다.”
“하!”
“선을 넘는군!”
팽중호의 말에 가주들은 물론, 각 세가의 무인들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지금 팽중호의 발언은 분명 선을 크게 넘는 것이자, 자신들을 완전히 밑으로 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가주 한 명도 아니고, 네 명을 혼자 상대하겠다니?
이건 분명 무림의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이 비무에서 제가 이기면, 정우맹인지 뭔지를 당장 없애고, 무림맹으로 합류하십쇼.”
“자네가 지면 어쩔 건가?”
“하북팽가가 정우맹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제가 그쪽에서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팽중호의 말에 가주들이 고민을 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대로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에는 자존심은 상하지만, 제안 자체는 분명 거절키 힘들 만큼 매력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때 팽중호의 입에서 그들의 결정을 도와줄 말이 흘러나왔다.
“거, 뭐 눈치를 보고 그러십니까? 어차피 여기서 여러분들 다 좋게 웃으면서 나갈 수 없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그러니 선택하십쇼. 그냥 저랑만 싸우고 깔끔하게 끝낼 건지, 아니면 그냥 아주 서로 물고 뜯고 대판 싸울 건지 말입니다.”
번쩍-
파지지지지지지직-
팽중호의 몸에서 엄청난 뇌기가 폭풍처럼 몰아쳐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을 장악하며 모두를 찍어 누르는 기운.
이 기운에 주변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랐다.
심지어 하북팽가의 사람들도 말이다.
“이, 이게…… 정녕 사람이란 말인가…….”
분명 똑같은 사람이건만, 이 압도적인 기운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들의 시선이 남은 사대세가의 가주들에게 향했다.
그들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궁금했기에 말이다.
“지금 우리를 협박하는 것인가?”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태선이 팽중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금 굳어 있는 그의 표정이 지금 그가 팽중호의 말에 꽤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어쩌면 지금 팽중호의 말은 사대 세가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소가주가 사대세가의 가주들을 상대로 말이다.
보통 상황이었다면 분명 크게 경을 칠 상황.
하지만 지금은 보통 상황도 아닐뿐더러, 이 말을 한 자가 팽중호라는 것이 문제였다.
팽중호는 남궁태선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절대 고수였으니 말이다.
“아니죠. 협박이라기에는 제가 좋은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저 선택을 하시라는 것일 뿐입니다.”
“재미있군. 좋아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남궁태선이 팽중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니, 어차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여기서 꼬리를 말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정우맹의 이름이 땅바닥에 추락하게 될 테니 말이다.
“잘 선택하셨습니다. 제안을 받지 않으셨으면, 직접 개망나니가 뭔지 보셨을 테니 말입니다.”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하는 팽중호.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니 어찌 미소가 안 지어질 수 있겠는가?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번에 하시겠습니까?”
“따로 하지.”
“알겠습니다.”
이것도 팽중호가 예상한 대로였다.
그들은 자존심이 있으니 절대로 합공해서 싸우겠다는 말은 하지 않을 터였다.
사실 만약 저들이 합공하겠다고 했으면, 아무리 팽중호라도 상당히 곤란했을 텐데, 그들의 사대세가라는 자존심이 그 곤란한 상황을 막아 주었다.
“그럼 누구부터 하시렵니까?”
“내가 나서지.”
누구부터 비무를 하겠냐는 말에 누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하얀 백의에 손에 들고 있는 섭선이 인상적인 중년인.
바로 제갈세가의 가주였다.
“비령신조다!”
현 제갈세가의 가주 비령신조(飛靈神爪) 제갈신.
제갈세가는 전에는 무공에 관해서는 다른 세가들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 평을 받고는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장기인 머리를 바탕으로 그들에게 가장 최적화된 무공을 만들기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결코 다른 세가들에 비해 밀리지 않는 힘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 제갈세가의 힘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바로 비령신조 제갈신이었다.
빠르면서도 신묘한 조법을 구사하는 제갈신의 조법은 무림 일절로 이미 명성이 자자했고, 사람들은 그가 화경의 경지를 넘어섰으리라 추측할 정도의 강자.
분명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일단 내가 힘을 가늠해 봐야겠다.’
제갈신은 어차피 자신이 팽중호를 이기지 못할 것이란 건 느꼈다.
다만, 그가 먼저 나선 것은 팽중호의 힘을 가늠해 보기 위함이자, 그의 힘을 빼놓기 위함이었다.
치사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무림은 본래 이런 곳이 아니겠는가?
정의와 협의, 그리고 정직함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무림은 낭만적인 곳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타탓-
가벼운 몸놀림으로 팽중호의 앞에 나타난 제갈신.
팽중호는 그런 제갈신을 보고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한 표정을 하더니, 입가에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나 미리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는데, 조금 다쳐도 불평하시지 않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