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다들 힘들겠지만, 움직입시다.
혈운잔살검(血雲殘殺劍).
칠주가 익힌 무공의 이름이었다.
원래는 다른 이름의 무공이었지만, 혈천궁에서 새롭게 다시금 만들어 낸 무공이었다.
혈공에 최적화시켜서 말이다.
혈운잔살검은 내공을 마치 안개처럼 퍼지게 하는, 이른바 혈무(血霧)를 이용해 상대를 죽이는 무공.
지금 장순학의 주변을 장악한 이 안개가 바로 혈운잔살검으로 만들어 낸 혈무였다.
스윽-
서걱- 촤악-
그리고 칠주가 검을 움직일 때마다 이 혈무가 함께 움직이며 상대를 베어 간다.
혈무 안에만 있다면, 거리가 얼마가 되든 상관없이 벨 수 있었다.
완전무결한, 사각이 없는 무공.
그것이 바로 이 혈운잔살검이었다.
“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칠주는 지금 장순학이 이 혈운잔살검을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가 화경을 넘어선 무인이더라도, 이런 무공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휘이익- 휙- 휙- 휘이이이익-
장순학은 이 혈무를 없애기 위해 사방으로 검을 휘둘러 보았는데, 잠시간 흩어지는 듯하다가 이내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왔다.
“흠.”
카캉- 카가각- 카칵-
장순학은 이제 어느 정도는 칠주의 공격을 막아 낼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더 나아지고 있지는 않았다.
혈무는 여전히 자욱했고, 자신은 칠주의 근처로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대로라면 힘만 빼다가 그대로 이 혈무의 먹이가 되고 말 터였다.
지금의 상황을 반드시 타개해야 했다.
번쩍-
슈와아아아아악-
장순학의 기운이 거세지고, 그의 두 눈에 시퍼런 안광이 터져 나왔다.
장순학 주변의 기운이 순간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주변의 공기가 그에게 빨려 들어갈 듯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잔재주에 종남의 검이 꺾일 수는 없지.”
장순학은 지금 그가 화경의 경지에 다다르면서 새롭게 정립한 그만의 천하삼십육검을 펼치려는 것이었다.
-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 천하멸멸(天下滅滅).
천하멸멸의 초식.
사실 이 초식은 장순학이 잘 펼쳐 내는 초식은 아니었다.
그가 만들어 내었지만, 너무나도 살기가 짙고 위험한 초식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이 초식보다 확실하며 적절한 초식은 없었기에, 장순학은 이 초식을 펼쳐 내는 것이었다.
파아아아악-
장순학의 검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냥 봐서는 조금 전과 크게 달라 보일 것 없어 보였지만, 칠주는 한눈에 이 공격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느꼈다.
그것을 보여 주듯 칠주의 혈무가 지금 완전히 소멸당하고 있었다.
“끝났다.”
철컥-
아직까지 칠주가 멀쩡했는데, 장순학은 검을 다시금 검집에 넣었다.
“아직 끝나지…….”
칠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다시금 장순학에게 달려들려고 했는데, 그의 이런 움직임은 얼마 못 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몸이 그의 명령을 거부했으니 말이다.
“무슨……?”
피핏- 핏- 핏- 피핏-
칠주의 몸에 금이 그어지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그의 신형이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칠주.
장순학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그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커억!”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장순학이 입에서 붉은 피를 거하게 토해 내었다.
크게 내상을 입었다는 증거.
이미 혈운잔살검에 이래저래 상처를 입은 데다가, 방금 펼친 천하멸멸의 초식에 너무나 많은 내공을 끌어다 썼기에 입은 내상이었다.
아마 치료하는 데에만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터였다.
“잠깐 쉬고 계시죠. 제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미안하네.”
“뭘요.”
팽중호가 장순학의 옆에 나타났다.
팽중호는 장순학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아직 남은 혈천궁의 무인들을 정리하는 동안 쉬라고 하는 것이었다.
장순학은 그런 팽중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는 종남파의 사람도 아니고, 종남파와 좋은 연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종남파를 위해서 가장 헌신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당연히 미안할 수밖에.
파직-
팽중호의 신형이 사라지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종남파 무인들과 혈천궁 무인들 사이 한복판에 나타났다.
그리고 거침없이 전장을 휘젓는 팽중호의 움직임.
감히 그의 일도를 막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혈천궁 무인들.
칠주와 오랑이라는 절대 고수를 잃은 혈천궁의 무인들은 속절없이 쓰러져 나갔고, 이내 금방 정리가 되었다.
“후우.”
팽중호는 상태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날뛴 것이기에 거친 숨을 내쉬었다.
스윽-
팽중호는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수많은 시신들 그리고 지치고 힘든 표정으로 서 있는 무인들.
이겼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피해.
하지만 그럼에도 이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겼습니다.”
“이겼……. 다…….!”
“이겼어!”
“종남파를 되찾았다!”
팽중호의 말에 종남파의 무인들이 가진 힘을 짜내어 비명을 지르듯 외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것으로 지금의 고통과 괴로움을 털어 내려는 것이었다.
우르릉- 쏴아아아아아아-
그때 때마침 하늘에서 갑자기 비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다들 비를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비를 맞았다.
오늘따라 너무나 시원한 빗방울.
그렇게 한바탕 쏟아져 내린 비에 종남산에 가득했던 핏물도 씻겨 내려갔다.
“자. 여러분. 다들 힘들겠지만, 움직입시다.”
팽중호의 말에 종남파의 무인들은 저마다 움직이며, 어지러운 종남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혈천궁의 무인들의 시신은 따로 모아 태워 버렸고, 종남파 무인들의 시신은 하나로 모아 합동 장례를 치렀다.
* * *
종남파 대회의실.
지금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수가 전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였다.
전에는 이 대회의실이 꽉 찰 정도였는데, 지금은 채 반도 차지 않았으니 말이다.
“우선 팽 소가주에게 감사의 인사를 종남을 대표해서 하겠네.”
“어이쿠. 아닙니다.”
지금 종남파의 살아남은 무인 중 가장 배분이 높은 이는 장순학.
장순학은 임시로 장문인의 자리에 앉았다.
그는 지금 종남파의 앞날을 위한 회의에 팽중호를 초대했는데, 회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다.
팽중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종남파는 혈천궁의 손에 의해 역사에서 사라졌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저희도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다른 종남파의 무인들도 모두 팽중호에게 머리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해 왔다.
그들도 모두 팽중호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니 말이다.
“그런데 제가 이 회의에 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팽중호는 인사가 끝나고 나서야, 생각하고 있던 의문을 물었다.
지금 이 회의는 종남파의 향후를 위한 회의.
그런 곳에 지금 외부인인 자신이 있는 것이 맞는 것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팽 소가주는 은인이니 조금도 문제 될 것이 없네.”
장순학이 괜찮다고 하니, 팽중호는 일단은 가만히 회의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보고 싶었으니 말이다.
“일단 피해 정도와 남은 것들에 대해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혈천궁에 의해 입은 피해와 지금 종남파에 남은 것들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가만히 듣고 있던 팽중호는 속으로 꽤 놀랐다.
‘역시 구파는 구파다.’
피해 규모도 어마어마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남은 것도 어마어마했으니 말이다.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더니, 그 말이 지금 딱 맞았다.
종남파가 다시금 일어설 수 있을까 생각했던 팽중호가 다 민망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다음은 새로운 조직의 개편에 대해서입니다.”
수많은 종남파 무인들이 죽었기에, 지금 종남파의 이곳저곳에 공석이 많이 생겼다.
그 공석을 채우기 위해 최대한 필수적인 곳만 우선적으로 개편을 시작했다.
종남에 혈사가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정말 빠른 속도로 다시금 체계를 잡아가는 종남파.
이것이 어쩌면 지금까지 구파가 이 무림에 버티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구파의 저력.
팽중호는 이 회의에서 확실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그리고 팽 소가주님.”
“예?”
보고를 듣고 일을 처리하던 장순학이 갑자기 팽중호를 불렀다.
팽중호는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약간 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회의 중에 왜 갑자기 자신을 부른단 말인가?
“이번에 하북팽가와 종남파가 굳건한 동맹을 맺었으면 하는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장순학이 동맹의 제안을 해 왔다.
무림맹으로 묶인 동맹이 아니라, 두 세력 간의 더욱 긴밀한 동맹의 제안.
한마디로 친우가 되자는 소리였다.
이건 분명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종남파에서 혈천궁을 싹 다 제거했으니, 조금도 나쁠 건 없지.’
종남파에 혈천궁을 이번에 축출했으니, 이들과 긴밀해지면 분명 득이면 득이지 실은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방금 이들의 재력도 다 들었으니, 오히려 이쪽에서 부탁하고 싶을 정도였다.
종남파에 이래저래 빼먹을(?) 것들이 많을 터이니 말이다.
“아, 저희야 대환영이지요.”
“고맙네.”
팽중호의 수락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장순학.
사실 팽중호가 더 고마웠지만, 뭐 그런 걸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리고 이건 종남파에서 은인에게 주는 것이니 받아 주게나.”
장순학의 말에 한쪽에 있던 종남파 무인이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보자기 하나와 목갑 하나, 그리고 검 한 자루.
“이것은 종남파의 무공인 태을신공이 쓰인 무공서이네.”
“!!”
태을신공(太乙神功)?
종남파의 내공심법 중 육합귀진신공과 함께 종남파의 가장 중추적인 내공 심법.
그것을 지금 준단 말인가?
“그리고 이건 태을선단이란 것이네. 소림의 대환단에 비하면 부족할지 몰라도, 꽤 쓸 만한 것일세.”
게다가 태을신공과 함께 전해진 것은 태을선단이라는 종남파 고유의 비법으로 만들어 낸 단약이었다.
가장 순수한 기운을 얻게끔 해 주는 영약으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가 먹으면 병에 걸리지 않고 평생을 건강하게 살 수 있으며, 무인이 먹으면 수련으로는 쌓을 수 없다는 선천지기를 증진시켜 주었다.
장순학은 대환단에 비하면 부족하다 했지만, 대환단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자네가 말했던 그 칠주의 검일세.”
“아!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장순학이 건넨 것은, 칠주가 들고 있던 검붉은 색의 그 검이었다.
요사스러운 검붉은 색의 검은 절로 사람을 현혹했는데, 팽중호는 이것을 자신이 가져가도 되겠냐고 미리 장순학에게 말해 놓은 상태였다.
이 검을 전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니 말이다.
“다 자네를 위한 것이니, 받아 주게나.”
“거절치 않겠습니다.”
“당연하네. 오히려 받아 주지 않았다면, 실망했을 것이네.”
팽중호는 종남파가 건넨 세 가지 모두를 받아 들었다.
준다고 하니, 당연히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것을 노리고 종남파를 구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바로 돌아갈 생각인가? 조금 더 머물다가 가지 그러나.”
“조만간 또 세가에서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이래저래 준비할 것들이 많습니다.”
팽중호는 곧바로 하북팽가로 떠날 생각을 했다.
이제는 하북팽가로 가서 오대회합을 준비해야 했다.
종남파에서의 일이 생각보다 빠르게 마무리 지어졌지만, 그렇다고 시간에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으니 말이다.
“그럼. 마차를 준비해 주겠네.”
“감사히 타고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