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이것들 설마 그건가?
묵철은 보통 철보다 훨씬 더 단단하다.
검기로도 잘 상처가 안 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걸 무려 세 치 이상이나 흠집을 내라니?
“지금까지 수련하신 게 있는데, 이 정도는 다들 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냥 철도 아니고 묵철을…….”
“하. 십. 시. 오.”
또박또박 말을 하는 팽중호의 몸에서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을 느낀 팽가 무인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여기서 더 말을 주절거리면, 오히려 더 힘들어질 것이란 걸 잘았으니 말이다.
“자, 차례차례 줄 서서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쭉 늘어선 팽가 무인들은 팽중호가 가져온 묵철 기둥에 도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카아앙- 카가가가각-
다양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연무장.
다들 있는 힘껏 묵철 기둥을 때리는 소리였다.
그들은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묵철 기둥을 때렸는데, 예상과 다르게 막상 해 보니 가능했다.
카가각-
세 치 정도의 흔적을 계속해서 내는 팽가의 무인들.
확실히 그들은 이제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실력은 갖추게 되었다.
‘다들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군.’
수련을 게을리했다면, 결코 이렇게 흔적을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팽중호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바로바로 무림맹으로 보낼 인원들을 나누었다.
무림맹에 아무나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북팽가를 대표하는 것인데 말이다.
“자, 이쪽에 오신 분들은 무림맹으로 파견 나가실 분들입니다.”
“예!”
이미 장춘오에게 설명을 들은 무인들이기에, 팽중호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하였다.
팽중호는 그들에게 일일이 인사해 주고는, 아직까지 멀쩡히 서 있는 묵철 기둥을 향해 몸을 향했다.
모든 무인들이 묵철 기둥을 내리쳤는데도, 아직 묵철 기둥 자체는 멀쩡히 서 있었다.
뭐 애초에 꽤 크고 두꺼운 기둥이기에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 무거운 걸 다시 들고 갈 수는 없지.”
스릉-
팽중호는 무적도를 꺼내어 들었다.
이제 묵철 기둥이 할 일은 다 했으니, 고대로 들고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서걱- 서걱- 서걱- 서걱-…….
팽중호의 무적도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도갑으로 들어가는 무적도.
무인들은 그 장면을 눈을 끔뻑이면서 바라보았는데, 곧 그들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투두두두두둑-
묵철 기둥이 주먹만 한 크기로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그 크기 일정한 것은 물론이고 단면이 마치 연마라도 한 듯이 아주 매끄러웠다.
딱히 내공을 쓰지도 않은 것 같은데, 그 짧은 시간 안에 흠집을 내기도 힘든 묵철을 이렇게 조각내어 버렸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 이것 좀 날라서 저쪽에다 가져다 놔 주십쇼.”
“예, 엣!”
팽가 무인들은 입을 벌린 채로 묵철 조각들을 들어서 옮기기 시작했다.
작은 조각임에도 상당한 무게가 나가는 묵철.
그런데 이런 것으로 만든 기둥을 들고 오다니…….
정상이 아닌 건 알았지만, 매번 볼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절대로 개기지 말아야지.’
팽가 무인들의 머릿속에 다시 한번 더 각인되는 장면이었다.
* * *
종남파로 향하는 신조상단의 마차.
마차는 꽤 빠르게 종남파가 있는 섬서성에 도착을 하였다.
구파 중 가장 큰 세력이라 볼 수 있는 화산파와 종남파가 터를 잡은 곳.
사실 그 두 문파의 힘 때문에 이 섬서성에는 중소 방파나 사파들이 다른 곳들에 비해 적은 편에 속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도착인가?”
“예.”
지금 종남파로 향하는 신조상단의 상행에는 팽중호만이 함께했다.
다른 팽가의 무인들은 일절 데려오지 않았다.
팽가 무인들을 데리고 왔다가는 괜히 종남파에서 이래저래 시비를 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 이 상행을 함께하는 무인들은 전부 신조상단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오늘 가져가는 물품이 뭐야?”
팽중호는 이제야 신조상단이 종남파에 납품하는 물품의 정체를 물었다.
종남파가 섬서성에 있는 상단이 아니라, 굳이 하북성과 산서성에 활동하는 신조상단에서 받는 물품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백운초입니다.”
“백운초?”
백운초(白雲草).
새하얀 구름을 닮아 붙여진 이름의 풀로, 이름과는 다르게 상당히 위험한 독초 중 하나였다.
백운초를 잘못 먹게 되면 그대로 몸속부터 썩어들어 가 얼마 못 가 그대로 절명하게 된다.
이만큼 위험한 독초이지만 이 백운초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반대로 몸이 괴사하거나, 몸이 썩어 가는 시신에 쓰면 몸이 썩는 것을 막고, 오히려 몸이 멀쩡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통 장례를 치르거나, 욕창 치료 등에 많이 쓰이는 것이 백운초였다.
‘흠. 백운초가 분명 하북에서 많이 나기는 하지.’
백운초가 가장 많이 나는 곳을 꼽으라면 단연 하북성이었다.
무림에 쓰이는 백운초의 팔 할 이상이 하북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신조상단은 이 백운초의 유통을 가장 크게 취급하는 상단이기에, 백운초를 다량으로 구하기 위해서는 신조상단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팽중호는 종남에서 왜 갑자기 백운초를 이리 많이 구입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정말 큰 전쟁이나, 대규모 역병이 발생한 것이 아닌 이상, 지금 신조상단이 가져가는 양만큼의 백운초는 쓸 일이 없으니 말이다.
팽중호가 알기로 최근 종남파가 어느 곳이랑 싸운 적도 없고, 그 근방에 역병이 창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다.
‘이것들 설마 그건가?’
갑자기 구입하는 대량의 백운초.
팽중호는 갑자기 하나의 생각이 퍽 들었다.
백운초를 대량으로 쓰는 하나의 이유가 더 떠오른 것이었다.
‘강시를 제조하나?’
백운초를 넣은 물에 시신을 넣으면 시신이 썩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좋아지기까지 한다.
그래서 강시를 제조할 때, 백운초는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혈천궁에 먹혀 버린 종남파의 상황과 갑자기 대량으로 사들이는 백운초.
분명 뭔가 관계가 있었다.
전생에도 혈천궁은 분명 대량의 강시를 쓴 전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조용히 좀 알아봐야겠어.’
팽중호는 지금 이 생각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종남파에 도착하면 은밀히 움직여 볼 생각을 했다.
“멈추시오!”
그때 마차 밖에서 마차를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팽중호가 마차 밖을 슬쩍 보니, 드디어 종남파에 도착한 듯싶었다.
신조상단의 행렬이 들어서자 그들은 철저히 상단의 마차를 이리저리 검사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정문을 열어 주었다.
쿠그그그그그긍-
오랜 역사만큼이나 거대하고 육중한 종남파의 정문이 열렸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는 신조상단의 행렬.
팽중호는 이세경과 함께 마차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넓고 깔끔하군.’
도가 계열의 문파답게 과하지 않으며 정갈하고 깔끔한 내부였다.
마차 수 대가 함께 지나도 될 만큼 넓은 길을 따라 안으로 쭉 들어가자, 신조상단을 기다리고 있는 종남파 무인들이 보였다.
히이이이잉- 털컥-
그들 앞에 신조상단의 마차가 멈추어 서고, 팽중호와 이세경이 마차에서 내렸다.
흠칫-
그때 팽중호가 마차에서 내리자 한 인영의 몸이 흠칫 떨리는 것이 보였는데, 바라보니 지난번 호정루에서 만났던 일대 제자 중 하나인 조한평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팽중호에게 맞은 것이 각인되어 있는지, 팽중호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부상단주님.”
“예. 안녕하십니까.”
종남파 무인 중 한 명이 가장 앞서 나와 이세경에게 인사를 건네었는데, 그는 지금 종남파에서 재정을 담당하고 있는 재정각(財政閣)의 각주인 도군호라는 자였다.
그는 이세경을 향해 인사를 한 후에 옆에 있는 팽중호를 바라보고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범상치는 않은 자인데,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니 말이다.
타탓- 속닥속닥-
그때 한 무인이 재빠르게 다가와 도군호에게 뭐라 속닥이기 시작했고, 이야기를 들은 도군호의 눈이 미묘하게 빛이 났다.
“하북팽가의 소가주님이셨군요.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저는 도군호라 합니다.”
“아, 괜찮습니다. 기별도 없이 온 제 탓이니 말입니다.”
아무래도 방금 다가온 무인이 팽중호의 정체를 도군호에게 알려 준 모양이었다.
“그런데 종남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것인지요?”
명백히 팽중호를 경계하는 듯한 말투로 묻는 도군호.
팽중호가 무림맹에서 종남파에 꽤 큰 굴욕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씨익-
팽중호는 도군호의 질문에 세상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정인이 먼 길을 떠난다는데, 어찌 혼자 보낼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살면서 종남산에는 한 번도 와 보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종남산에 한번 들러 보고자 왔습니다.”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팽중호.
도군호는 당연히 팽중호가 단순히 저런 목적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란 건 알았지만, 하북팽가의 소가주인 그를 더 이상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팽중호를 또 종남파에 둘 수도 없지 않은가?
괜한 변수를 품 안에 둘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도군호가 팽중호를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내 손님이니, 내가 모셔 가겠네.”
멀찍이서 목소리와 함께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아. 정혼검신을 뵙습니다.”
팽중호가 그 인영을 보며 밝게 인사했는데, 그 인영의 정체는 바로 장순학이었다.
장순학은 지금 종남파 주변을 거닐던 중에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 곧바로 다가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잠시 듣다가 도움을 주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 내가 머무는 곳으로 초대할 테니 가세.”
“예.”
이세경은 아직 종남파와의 거래가 남아 있기에 팽중호만이 먼저 장순학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종남파에서 조금 떨어진 장순학의 거처로 향한 두 사람.
“자, 자리에 앉게. 내가 차를 내어 오지.”
장순학은 거처에 도착하자 자리를 권하며, 직접 차를 끓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동안 팽중호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정혼검신이라는 별호를 가진 이의 방치고는 지나치게 검소한 모습.
‘뭐, 있는 게 없군.’
지금 이 정도 방이면, 팽가에 있는 하급 무사들이 머무는 곳보다도 안 좋다고 할 수 있었다.
본래 장순학의 성품이 검소한 것도 있겠지만, 이것은 분명 종남파가 그를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아무리 그가 싫다고 해도 누가 종남제일고수를 이렇게 둔단 말인가?
“자. 여기 차일세.”
“감사합니다.”
일단 장순학이 내어 온 차를 마시며, 두 사람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슨 일로 종남에 온 것인가?”
“지난번에 무림맹에서 하셨던 말씀 때문에 왔습니다.”
“종남파에 혈천궁이 있다고 한 것 말인가?”
“예. 독이 더 퍼지기 전에 잘라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팽중호의 말에 장순학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사실 무림맹에서 팽중호에게 종남파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후에, 장순학은 종남파가 혈천궁 때문에 변한 것이란 걸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손을 써야 할까 혼자 고심하고 있던 차인데, 이렇게 팽중호가 나타나 주니 마치 든든한 원군이 도착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허나, 자네와 나 둘뿐인데다가, 아직 확실한 물증은 잡지 못했네.”
지금 종남파가 어디까지 썩어 있는지 모르는 상황.
이런 상황에 확실한 물증이 없이 급작스럽게 움직이다가는 분명 탈이 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지금 이 종남파에서 신원이 확실한 무인이라고는 팽중호와 장순학 두 사람뿐.
이 거대한 종남파의 썩은 부분을 잘라 내기에는 절대적으로 수가 모자라지 않겠는가?
“아아, 걱정 마십시오. 제 말만 좀 들어 주시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