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거기선 뭐라던?
“으아아아악!”
“살려 줘어어!!”
“그냥 죽여!!”
하북팽가에서 오랜만에 밤낮없이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무슨 고문이라도 당하는 듯한 비명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지금 하북팽가에서 숭무문 사람들을 잡아다가 고문한다고 생각할 터였다.
“겨우 이 정도에 엄살떨지 마십쇼.”
물론 당연히 잡아다 고문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조금(?) 힘들게 수련을 시키고 있는 것일 뿐.
조금 힘든 수련을 받는 이들은 적검문…….
아니, 이제는 ‘적호각’의 무인들이라고 불러야 할 터인 무인들이었다.
이번에 새롭게 체계를 잡으며 적검문 무인들은 모두 ‘적호각(赤虎閣)’이라는 새로운 곳으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진짜 이러다가 죽습니다!”
“맞습니다! 이건 도저히…….”
“어허. 안 죽습니다. 저기 멀쩡히 다들 살아 있지 않습니까?”
직접 수련을 지도하던 팽중호는 손가락으로 한쪽에서 수련하는 맹호각의 무인들을 가리켰다.
저들은 이미 팽중호의 이 지옥 같은 수련을 모두 견디고 살아남은(?) 이들이다.
그러니 적호각 무인들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시 시작해 보겠습니다.”
“으어어어…….”
“크흑. 어머니.”
다시 시작된 수련에 적호각의 무인들이 죽는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팽중호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무시하며 수련을 계속했다.
그때 적호각 무인들에게 한 줄기 빛과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소가주님.”
“왜? 춘오야.”
“잠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알았어. 갈게.”
무언가 이야기가 있다며 다가온 장춘오 덕분에 팽중호가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된 것이다.
적호각 무인들은 장춘오를 무슨 구원자를 만난 듯 바라보았다.
그가 아니었으면 지금 정말로 수련하다가 죽기 일보 직전이었으니 말이다.
“저 없다고 쉬지 마십쇼. 만약 쉬다가 걸리면…… 아시죠?”
팽중호는 말에 살짝 살기를 담아 말했고, 쉬려던 적호각 무인들은 그 말에 대번에 얼굴이 핼쑥해지며, 결국 쉬지도 못한다는 것에 절망하며 스스로 수련을 이어 나갔고, 팽중호는 그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장춘오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무슨 일인데?”
팽중호는 집무를 보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이유를 물었다.
장춘오가 자신을 이렇게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무언가 중차대한 문제라는 것.
당연히 무슨 이유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무림맹과 오대세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무슨 연락?”
“혈천궁의 발호를 막기 위해 자신들에게 와 달랍니다.”
무림맹과 오대세가 모두 하북팽가에 자신들에게 와 달라고 서신을 보내온 것이다.
무림맹은 위지철과의 관계 그리고 숭무문과 청룡대와의 관계를 언급하며 서신을 보내왔고, 오대세가는 새로운 오대세가의 자리와 과거 하북팽가가 오대세가였다는 것을 언급하며 서신을 보내왔다.
“오대세가가 무림맹에서 나왔어?”
“예. 이번에 무림맹을 나와서 정우맹을 만들었습니다.”
“정우맹? 아주 가지가지 하네.”
정우맹(正友盟).
오대세가와 그들을 따르는 중소방파들이 모여 새롭게 만든 곳이었다.
무림맹의 부패와 무능을 꼬집으며 만든 정우맹은 무림에 꽤 큰 호응을 얻었고, 무림맹에 속해 있던 문파들 중 상당수가 정우맹으로 둥지를 옮겼다.
덕분에 가뜩이나 단합이 안 되던 무림이 이제는 두 세력으로 나누어져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둘 중에 어디랑 함께하시겠습니까?”
“꼭 선택해야 하는 건가?”
“아무래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래야 귀찮게 안 할 테니 말입니다.”
“흠…….”
장춘오의 말처럼 어느 한쪽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양쪽에서 계속해서 귀찮게 굴 것이 뻔했다.
‘하지만 지금 한쪽을 선택하면, 일이 좀 틀어지는데…….’
지금 무림맹을 선택하면 오대세가에 들어간다는 일이 틀어져 버리게 되고, 정우맹을 선택한다면 앞으로 혈천궁과 마교를 상대하는 것에 대한 전체적인 일이 틀어져 버린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손해가 막심한 상황.
“춘오. 네 생각은 어디가 낫냐?”
“무림맹을 선택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무림맹을?”
“예. 저희에 대한 대우가 다를 테니 말입니다.”
지금 하북팽가가 정우맹에 들어간다면 오대세가라고 인정은 해 주지만, 필히 다른 사대세가들의 무시가 기본적으로 깔릴 터였다.
이미 지난 오대회합에서 그들의 태도를 확인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림맹은 달랐다.
그들은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
여기서 하북팽가가 무림맹에 손을 내민다면, 그들은 두 팔을 벌려 환영하며 귀빈 대접을 해 줄 터였다.
“게다가 저희에게는 위 소협도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하북팽가에는 위지철이 식객으로 머물고 있다.
위지철은 무당파의 제자.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명 무림맹 내에서 무시는 받지는 않을 터다.
“좋아. 그럼 무림맹에 합류하는 것으로 하자고.”
팽중호는 장춘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따라 주었다.
오대세가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쉬울 수 있었지만, 그것은 그저 조금 뒤로 미루면 되었다.
지금 더 중요한 일은 하북팽가의 안위와 무림의 안위였으니 말이다.
“예. 그럼 무림맹에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 * *
무림맹에 하북팽가의 합류를 알리자마자 무림맹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며 곧바로 하북팽가를 무림맹으로 초대했다.
하남성에 위치한 무림맹.
하북팽가에서는 무림맹 행을 위해 사람을 선별했다.
많은 인원이 갈 필요는 없는 일이기에 팽중호는 최소한의 인원만을 차출했다.
위지철, 장춘오, 도수, 이세경, 팽조운 그리고 팽중호.
이렇게 여섯 사람.
다른 이들을 더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팽가를 비워 둘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혈천궁이 움직이는 이상 항상 조심해야 했으니 말이다.
“정우맹인가 거기선 뭐라던?”
하북팽가를 떠나기 전.
팽중호는 장춘오에게 정우맹의 반응에 관해서 물었다.
자신들이 무림맹을 선택했으니, 당연히 좋은 소리를 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아주 실망했다면서 하북팽가를 오대세가로 인정치 않겠답니다.”
“뭐, 딱 예상했던 대로네.”
딱 팽중호가 생각했던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다행이라면 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해코지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란 거였다.
그들도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하북팽가를 건드린 곳들이 지금 어떤 꼴이 되었는지 말이다.
“주군.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때 도수가 출발 준비가 끝이 났다는 것을 알려 왔다.
그 이야기에 처소 밖으로 나서자, 마차 세 대가 늘어서 있었다.
여섯이 가는데 마차를 세 대를 쓴다는 것은 분명 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적은 인원이라도 무림맹에 처음으로 하북팽가가 가는 것이니, 협소하게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일부러 이렇게 마차를 세 대나 쓰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세가 밖으로 나가보는 것 같소.”
이번 무림맹으로 가는 행렬에는 대장로 팽조운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젊은 무인들만 가는 것보다는 그래도 대장로격인 팽조운이 함께해야 무림맹에서도 나이만 보고 하북팽가를 얕보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팽조운은 오랜만에 하북팽가를 떠나 밖으로 멀리 움직이는 것이기에 나이를 잊고 조금 마음이 들뜬 상태였다.
“가가. 타시죠.”
“응. 그래.”
팽중호는 이세경과 함께 마차에 올라타려는 그 순간.
팽중호가 잠깐 몸을 멈칫했다.
그리고는 주변에서 자신들을 배웅하는 무인들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꺼내었다.
“저 없다고, 수련을 게을리했다가는…… 돌아와서 다들 죽을 준비들 하십쇼. 아시겠죠?”
“하하……. 물론입니다.”
“믿겠습니다.”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살기 가득한 경고와 함께 팽중호가 마차에 올라탔고, 그렇게 장춘오는 팽조운과 위지철은 도수와 함께 마차를 타고 하북팽가를 벗어났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움직이는 마차.
팽가와 멀어지는 풍경을 보며 팽중호는 오랜만에 사색에 잠겼다.
‘이번에 무림맹의 역량을 알아볼 기회겠어.’
팽중호는 이번에 무림맹에 가서 무림맹의 역량을 한번 알아볼 생각이었다.
과거에 비해 어떤지를 알아야, 훗날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마교 때문에 아주 일이 복잡해졌어.’
검마를 만난 후로 지금 팽중호의 모든 신경의 끝에는 마교가 자리를 잡아 버렸다.
마교를 막아 내지 못하면 지금까지 팽중호가 하북팽가를 다시금 세우기 위해 했던 노력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니 말이다.
절대로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고민이 많아 보이십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에 빠져 있던 팽중호를 부르는 이세경.
그녀의 말에 팽중호가 끝없는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높은 자리가 좋기만 한 자리는 아니란 걸 깨달아서 말이지.”
“호호, 높은 자리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게. 예전에는 왜 그런 걸 외면하고 살았는지.”
“어릴 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
이세경의 질문에 대답하지도 못하고, 팽중호는 다시금 전생의 기억으로 빨려들어 갔다.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망나니가 맞았구나.’
전생의 자신은 사실 하북팽가의 직계의 핏줄이 아니었다.
아주 어릴 때 그 당시 팽가의 가주였던 팽주천에게 주워져 그의 아들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팽중호는 그 당시 알게 모르게 팽가 사람들에게 많은 눈총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 눈총은 당연히 팽주천에게도 향했고 말이다.
‘내가 소가주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팽중호는 그것이 자신을 키워 준 팽주천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의 진짜 아들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갖췄음에도, 소가주의 자리에 앉지 않으려고 일부러 망나니의 삶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크게 잘못된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자신이 옆에서 팽주천의 무거운 짐을 덜어 주었어야 했던 것인데 말이다.
지금 소가주라는 위치에 앉아 팽가를 이끌어 보니 그때의 잘못들이 너무나 눈에 훤하게 보였다.
“가가.”
“응?”
이세경이 과거에 젖어 있던 팽중호를 나지막이 불렀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가가 곁에는 좋은 사람들이 함께한다는 것을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과거에 아무것도 모르는 망나니로 살았던 것은 지금 갚으면 되는 것이었고, 지금의 자신은 과거처럼 주변에 아무도 없는 외톨이도 아니었다.
무거운 짐을 나눌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으니 말이다.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십시오.”
“하하, 당연하지. 내가 그런 걸 혼자 지고 다닐 놈으로 보여? 당연히 힘든 건 나눠 줘야지.”
“꼭 입니다.”
이세경은 짐짓 과장되게 웃으며 말하는 팽중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팽중호는 지금 모든 짐을 혼자 지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 짐을 모두 짊어질 정도로 강인한 팽중호지만, 그래도 혼자 모든 짐을 짊어지다 보면 아무리 강인한 그라도 쓰러질 수가 있었다.
이세경은 그런 팽중호가 걱정되었기에, 꼭 짐을 나눠 달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 꼭 그렇게 할게.”
* * *
하북팽가를 떠난 지도 며칠.
이제 하남성에 발을 들인 하북팽가 일행이었다.
계속해서 무림맹으로 향하는 마차.
“오늘은 여기서 쉬어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밖에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하늘에는 해가 떠 있었지만, 지금 이 마을을 지나면 다음 마을까지는 한참이나 가야 했기에 여기서 묵으려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마차는 마을에서 가장 큰 객잔으로 이동했고, 마차 세 대를 모두 객잔에 맡기 하북팽가 일행은 곧바로 객잔에 짐을 풀었다.
“나이가 드니 긴 여행은 힘들 줄 알았는데, 마차가 좋아서 그런지 힘들지는 않소이다.”
객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팽조운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일행에게 하기 시작했다.
팽가 밖으로 나온 것이 꽤 즐거운 모양이었다.
“아까 점소이에게 물어보니, 이 근방에 유명한 명승(名勝)이 있다고 하니, 가실 분은 구경하러 다녀오시는 게 어떻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