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일단 밖으로 나가자.
이세홍과 소린이라 불린 여인을 지켜보던 팽중호는 몸을 빼서 다시금 지붕 위로 올라섰다.
더 이상 볼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숭무문인지 순무문인지가 문제였네.’
숭무문이 모든 일의 원흉임을 알았으니, 이제는 그들을 어떻게 박살 낼 것인지만 고민하면 되었다.
스슥-
팽중호는 지체 없이 다시금 원래 있던 전각으로 몸을 날렸다.
마치 축지법이라도 쓴 듯이 순식간에 전각에 도착한 팽중호.
그때 때마침 딱 이세경도 전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에 다녀오시는 겁니까?”
“잠깐 산책 좀 다녀왔어.”
팽중호가 산책을 다녀왔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지만, 이세경은 더는 캐묻지는 않았다.
“혹시 내일 무슨 일정 있어?”
“밖에서 다른 상단을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습니다.”
“흠. 그래? 내가 같이 따라가도 될까?”
“물론입니다.”
이세홍은 분명 조만간 움직일 것이고, 그 움직임은 아마 이세경이 신조상단 밖을 나섰을 때일 확률이 높았다.
내일 이세경이 밖으로 나선다면, 그때를 노릴 공산이 매우 컸으니, 팽중호는 함께해서 이세경을 지킴과 동시에 그들의 계획을 박살 낼 생각이었다.
“좋아. 그럼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다시 보자고.”
“좋은 밤 되십시오. 가가.”
이세경과 인사를 나눈 팽중호는 다시 푹신한 이불이 깔린 방으로 돌아왔다.
털썩-
이불에 다시금 몸을 뉘자 피곤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들이마신 소혼기의 영향이 지금까지 있는 듯싶었다.
‘보통 소혼기는 아니었나 보군.’
팽중호는 누웠던 몸을 일으켜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파지직- 파짓- 파지짓-
팽중호의 몸을 따라 흐르는 미약한 뇌기.
뇌기들은 팽중호의 몸을 돌아다니며, 몸 안에 있던 소혼기의 기운들을 완전히 태워 버리기 시작했다.
보통의 소혼기였다면 이렇게 운기를 하기도 전에 알아서 사라졌을 텐데, 이 소혼기는 아직까지도 몸에 남아 있었다.
그저 보통의 소혼기는 아닌 듯싶었다.
‘음?’
그렇게 운기행공에 몰두해 있던 팽중호의 기감에 전각 밖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기척이 하나 잡혔다.
팽중호도 간신히 알아챌 수 있을 만큼의 희미한 기척.
그 기척은 빠르게 움직이더니, 팽중호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스슷-
그리고 팽중호의 등 뒤에 나타난 기척.
그와 동시에 팔이 뻗어 나와 팽중호의 등 뒤를 노리며 다가왔다.
“날 죽이려고?”
콱-
팽중호는 순식간에 뒤로 돌아, 자신에게 뻗어 오는 팔을 강하게 낚아채었다.
그리고 곧바로 습격한 인영의 목을 강하게 틀어쥐려고 하였는데, 그 인영이 팔을 빼내더니 곧바로 뒤로 물러나 실패하였다.
“오? 이걸 빼내?”
팽중호가 손을 약하게 쥐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금나수법을 이용하여 강하게 쥐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아무렇지 않은 듯 쉽게 빼내었다.
그것은 상대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
스슷-
눈동자 부분을 제외하고 모든 곳을 완벽하게 가린 복장의 습격자는 다시금 밖으로 몸을 날리더니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팽중호는 그 모습을 바라만 볼 뿐, 쫓지 않았다.
지금 쫓아가서 곧바로 죽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는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되지 않을 터였으니 놔둔 것이었다.
“흐음. 내가 왔다는 걸 알아봤다는 거지? 생각보다 실력이 있나 보네?”
습격자가 온몸을 가렸다지만, 팽중호는 누구인지 한 번에 알 것 같았다.
이세홍과 같이 있던 여인 소린.
방금 보았던 눈빛과 잡았던 팔의 두께, 그리고 몸에서 나오는 강렬한 소혼기.
모든 것이 여인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소혼기를 쫓아 온 건가?”
기척을 읽었다고 해도, 팽중호 자신이라고 특정하기는 힘들었을 터.
그렇다면 소린이 무언가 자신을 찾아온 단서가 있다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소혼기밖에는 없었다.
“이거 재밌네?”
소혼기를 역으로 추적해서 사람을 찾을 수 있는 무공.
팽중호는 이런 무공을 하나 알고 있었다.
‘소혼흡정마공(消魂吸情魔功)’
한때 무림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절세의 마공.
특수한 소혼기로 상대방의 혼을 포로로 만들어 그 상대방을 조종하며 이용한 뒤, 마지막에는 내공을 모조리 흡수해 버리고 흡수한 내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엄청난 힘을 얻는 마공이었다.
내공이 흡수당한 이들은 그대로 목내이가 되어 죽어 버림은 물론, 혹여나 살아남았다고 하여도 다시는 무공을 익힐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리기에, 무림맹에서 가장 악독한 마공 중 하나로 지정할 정도였다.
소혼흡정마공이라면 몸 안에 소혼기가 남아 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고, 이세홍이 변한 것도 이해가 갔다.
‘혹여 이걸 들키지 않기 위해 그렇게나 삼엄하게 경비를 세워 둔 거군.’
혹여 숭무문의 여식이 이 소혼흡정마공을 익혔다는 것이 밝혀지면, 숭무문 전체가 무림 공적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상태이니 경비를 삼엄하게 둘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아직 성취가 아주 높지는 않은 거 같긴 한데…….”
만약 성취가 대성에 다다랐다면 조금 전에 그렇게 쉽게 물러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 성취가 부족했기에 곧바로 도망을 친 것일 터.
성취가 높지 않다는 것은 팽중호에게 여러 가지로 호재였다.
잘하면 이세경의 오라비인 이세홍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이왕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제대로 도와줘서 빚을 좀 지어 둬야겠어.”
* * *
다음 날 아침.
팽중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이세경과 함께 신조상단을 벗어나, 그녀의 용무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목적지는 신조상단에서 마차로 반 시진 정도 떨어진 곳.
그렇게 마차를 타고 도작한 곳은 한적한 마을의 비어 있는 전각 앞이었다.
“가가는 여기서 기다리셔도 됩니다.”
“아니, 나도 옆에 있을게. 혹시 모르거든.”
이세경은 다른 상단과의 거래를 마무리하기 위해 그들과 대화하는 동안 팽중호가 지루할까 싶어 마차에서 쉬라고 하였지만, 팽중호는 이세경의 옆에 붙어 있겠다고 하였다.
‘흐음. 작은 마을이라지만,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게 이상하단 말이지.’
이세경은 이미 몇 차례 이 마을에서 거래했었기에 크게 경계하지 않는 것 같지만, 팽중호는 달랐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이런 대낮이면, 사람들의 인기척이 다분히 들려와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마을은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인 것처럼 인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주 약하지만 살기도 느껴지고 말이야.’
게다가 주변에서 느껴지는 이게 살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미약한 살기.
보통이라면 그냥 넘어갈 정도의 살기지만, 팽중호는 이런 살기를 내뿜는 이들을 알고 있었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돈 좀 썼나 보네. 어디 살문이려나?’
이런 살기를 내뿜는 이들은 열에 아홉은 살문(殺門)의 살수들이다.
살문의 살수들은 보통 무림에서 활약하는 살수들과는 다르게, 정말로 암살을 업으로 하는 아주 전문적인 이들.
지금 팽중호 정도의 실력이 아니라면, 살기를 느끼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의 살수들.
이 정도면 분명 상당한 고액을 지불하고 고용한 살수들일 터였다.
다만, 이 정도 수준의 살수를 보유한 살문이 무림에 많지는 않을 터인데, 팽중호는 도대체 어느 살문에서 고용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럼. 거래는 이렇게 하는 것으로 하고, 이만 돌아가 보겠소이다.”
“예. 그러시지요.”
팽중호가 주변을 파악하는 사이에 이세경의 거래가 마무리되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지는 거래처.
이세경도 잠깐 서류를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죠. 가가.”
“그래.”
그렇게 이세경과 팽중호가 막 발을 떼려는 순간.
슉- 슉- 슉- 슉- 슉-
갑자기 사방에서 암기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아주 얇은 침과 같이 생긴 암기.
티티티티티팅-
이세경을 호위하는 무인들이 재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암기들을 쳐 내었지만, 비처럼 쏟아지는 암기를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의 몸에 하나씩 암기가 박히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갑자기 그들의 움직임이 딱 멈추어 버리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눈을 부릅뜨고, 멀쩡히 숨은 쉬는 것은 보니 마비독이 발린 암기인 듯싶었다.
파지지지지직-
팽중호의 무적도에 뇌기가 내뿜어져 나오며 사방에서 쏟아지는 암기를 모조리 날려 버렸다.
일순 조용해진 주변.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닐 것임은 팽중호는 잘 알고 있었다.
쿵-!!
팽중호는 암기를 튕겨 내자마자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팽중호와 이세경이 있는 주변의 바닥이 움푹 파였는데, 그 아래에서 조금 피가 솟아 올라왔다.
바닥에 살수들이 숨어 있던 것이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예. 가가. 어맛!”
밖으로 나가자는 팽중호의 말에 빠르게 발걸음을 움직이려던 이세경은 깜짝 놀랐다.
팽중호가 갑자기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으니 말이다.
“미안.”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움직일 준비를 하는 팽중호.
지금 이 전각 내부는 살수들이 미리 함정을 파 놓고 준비하고 있는 곳이니, 일단은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파짓-
정말 눈 깜짝할 새에 밖으로 벗어난 팽중호의 몸은 어느새 마차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는 품에 꼭 붙어 있는 이세경을 마차 안에 조심스럽게 내려 주었다.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
“예. 가가.”
이세경은 군말 없이 팽중호의 말을 따랐다.
여기서 자신이 뭘 하려고 움직여 봐야 그에게 오히려 폐를 끼친다는 것을 잘 알았으니 말이다.
“어차피 어디 살문인지랑 누가 보냈는지는 말 안 할 거 아니까. 그냥 싹 다 죽여 줄게.”
살수들은 어느새 팽중호와 마차를 포위하고 있었는데, 그 수가 생각보다 많았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들린 다양한 무기들.
하나같이 평범한 것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정면 대결에서 승산은 없으니 기병의 묘를 살리려는 듯싶었다.
파지지지직- 파지지짓- 파지지지지직-
팽중호가 뇌신지체에 들어섰고, 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자. 간다.”
파짓-
말과 동시에 팽중호의 신형이 사라졌고, 다시 나타난 곳은 살수들이 있는 곳 한복판이었다.
서거거거걱-
팽중호의 무적도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살수들의 목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촤르르르르륵- 촤르르르르륵-
하지만 살수들은 아무리 다른 이가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팽중호를 향해 그들이 팽중호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한 암기와 철쇄를 날려 왔다.
물론, 그것들이 팽중호에게 닿을 리는 없었다.
파짓-
팽중호의 신형이 나타났다 사라질 때마다 살수들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어 나갔다.
그렇게 이제 어느 정도 살수들의 끝이 보여 갈 때였다.
휘이이익- 휘이이익-
남은 살수들이 갑자기 무언가를 팽중호와 마차를 향해 날리기 시작했다.
작은 금속 구체.
바로 화탄이었다.
“이런! 썅!”
화탄 하나만 해도 엄청난 값이 나가는 물건.
그런데 그런 화탄이 지금 수 개나 던져진 것이다.
이건 팽중호도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파지지짓-
팽중호의 몸이 곧바로 마차로 향했다.
화탄이 터지기 일보 직전.
팽중호는 이세경을 구하기 위해 마차로 달린 것이다.
자기 한 몸 살자고 도망치면 얼마든지 되겠지만, 그럼 이세경은 화탄에 의해 죽어 버린다.
절대로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숙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