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저승 가서 좋은 자리에서 구경하십쇼.
서문세가와의 결전의 날이 결정되었다.
앞으로 보름 후.
하북팽가는 이 싸움의 준비로 밤낮없이 바빴다.
그중에 가장 바쁜 사람을 꼽자면 단연 팽중호였다.
팽중호는 팽가 무인들의 합격진부터, 도수, 곽채령, 팽구진의 무공까지 봐 주고, 저녁에는 위지철과의 대련까지 하였다.
그야말로 하루가 꽉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 위 소협. 제대로 한 번 해 보죠.”
“예.”
해가 넘어가려는 저녁.
지금 팽중호는 위지철과의 대련을 앞두고 있었다.
팽중호는 이 대련에서 검마에게서 보았던 깨달음을 정리하고, 자신의 무공에 적용해 나갔다.
그리고 이 대련을 통해 위지철은 더욱더 강해진 팽중호와 대련하면서, 계속해서 실력을 쌓아 갔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 대련은 서로에게 득이 되는 대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카캉- 캉- 카카캉- 카카캉-
내공을 최대한 억눌러서 하는 대련.
물론 그렇다고 적당히 살살하는 대련은 결코 아니었다.
아주 조금만 잘못해도 치명상으로 이어질 만큼 아주 치열한 검격과 도격이 오고 갔다.
“소가주님. 움직임이 조금 변하신 것 같습니다.”
“예?”
“전에는 뭐랄까, 앞만 보고 달리시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주변까지 모두 보시는 여유를 가지신 것 같습니다.”
팽중호는 위지철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신도 스스로 그것을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전에는 오로지 앞만 보고 부숴 나가는 패도의 길을 걸었다면, 지금은 주변 모든 것을 아우르며 정복해 나가는 패도의 길을 걸어 나간다고 할 수 있었다.
패도의 길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았지만, 확실히 전과 후는 달랐다.
“도대체 어떤 깨달음이 있으셨던 겁니까?”
위지철은 갑자기 요 며칠 사이에 확 바뀌어 버린 팽중호의 깨달음이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바뀌었단 말인가?
“흠. 기연을 만났다고 해 두죠.”
팽중호는 아직은 솔직히 검마를 만났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아직 하북팽가가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은데, 여기서 괜히 마교의 일을 다른 이들에게 꺼내어 봐야 혼란만 초래할 테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위지철은 팽중호의 대답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것이고, 상대가 그것을 알려 주기 싫어한다면, 더 이상 캐묻지 않는 것이 예의이니 말이다.
“그럼. 대련을 계속할까요?”
“예.”
* * *
시간은 날아가는 화살처럼 지나갔고, 결국 결전의 날이 왔다.
서문세가와 하북팽가의 중간 지점에 있는 넓은 평야.
그곳에 지금 각기 다른 옷을 입은 세 세력이 모여 있었다.
짙은 청록색의 무복을 입고 있는 서문세가의 무인들.
가슴에 맹(盟)이라는 글자를 새긴 무복을 입고 있는 무림맹의 무인들.
그리고 전체적으로 흑색 바탕에 적색 무늬가 인상적인 무복을 입고 있는 이들.
바로 하북팽가의 무인들이었다.
‘아주 멋있어.’
팽중호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서 멋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고, 정말로 지금 하북팽가의 무인들이 입고 있는 무복이 꽤 멋이 난다고 생각했다.
색의 조화가 꽤 좋았으니 말이다.
“자. 그럼 각자 무림패를 저에게 주십시오.”
그때 무림맹의 무인 중 하나가 중앙에 나서서 소리쳤다.
무림패를 건 큰 싸움이기에 무림맹이 직접 나선 것이다.
그들은 이 싸움을 지켜보고, 그 승패를 공증해 줄 사람들이었다.
‘우리에게는 오히려 좋은 상황이다.’
사실 무림맹 사람들이 이렇게 다수가 나오게 된 것은 위지철 덕택이 컸다.
팽중호는 서문세가가 혹여나 승패를 승복하지 못하고 수를 준비해 왔을 것을 대비해, 위지철에게 무림맹에 기별을 좀 넣어 달라고 하였다.
위지철은 곧바로 무림맹에 직접 기별을 넣었고, 이렇게 지금 무림맹 사람들이 다수 오게 된 것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여기 있네.”
하북팽가 측에서는 팽중호가 나서서 무림패를 건네주었고, 서문세가 쪽에서는 초로의 노인이 나섰는데, 바로 서문세가의 대장로인 서문제호였다.
서문제호는 직접 자신을 포함해 여섯 장로들을 모두 이끌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럼 각자 돌아가 계시면 저희가 신호하겠습니다.”
“네.”
“그러시게.”
휙-
몸을 돌려 동시에 각자의 진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
팽중호는 팽가의 무인들이 있는 곳에 도착해 그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 당연하겠지.’
어쩌면 당연했다.
이것은 수련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목숨이 오가는 전쟁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상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고수들.
다들 이렇게 긴장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었다.
“걱정되십니까?”
“……아닙니다!”
팽중호의 말에 잠시 주춤하며 아니라 대답하는 그들.
하지만 그 목소리에서도 걱정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걱정되시는 거 다 압니다. 다만, 제가 약속 하나 해 드리죠. 오늘 여기서 여러분 중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습니다.”
팽중호의 확신에 찬 두 눈과 목소리.
팽중호는 정말로 이번 싸움에서 단 한 명도 죽게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뜩이나 인원이 적은 하북팽가인데, 여기서 인원 손실을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제 다들 정도 들었기에 떠나보낼 수 없었다.
“다만, 열심히 안 한다면 팽가로 돌아가서 모두 제 손에 죽습니다.”
팽중호의 말에 하북팽가 무인들의 긴장감이 조금은 풀렸다.
마치 수련과도 같이 말하는 팽중호의 말 덕분이었다.
너무 긴장할 것 없이, 지금이 수련이라고 생각하면 될 터라고 생각했다.
“자. 그럼 다들 준비해 봅시다.”
“예!”
* * *
서문세가 진영.
서문제호는 자신 앞에 늘어선 서문세가 무인들을 내려 보며 입을 열었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말고 모두 죽이게. 알겠나?”
“예.”
절도 있게 대답하는 무인들을 보며 서문제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였다.
오늘을 위해 자신이 특별히 선발한 이들이다.
가장 확실한 실력의 무인들.
이들이라면 하북팽가의 무인들 정도는 손쉽게 죽일 수 있을 터였다.
“자네들도 모두 제 실력을 내게. 빨리 끝내야 우리 서문세가의 체면이 서니 말이네.”
“알겠습니다.”
“그러죠.”
서문제호말고도 이번에 함께 온 장로들이 저마다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였다.
그들은 칠, 팔, 구 장로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칠, 팔, 구 장로는 그들 보다 한참이나 실력이 떨어지는 자들이었기에 그랬다.
게다가 자신들은 지금 조금의 방심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방심 없이 최선의 실력을 발휘한다면, 팽중호 하나 정도는 문제없을 터였다.
“저들이 뭐를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팽중호인가 하는 놈만 죽이면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이니, 나와 이 장로가 먼저 빠르게 놈을 죽이세나.”
“클클. 알겠습니다.”
서문제호의 말에 다른 초로의 노인이 걸걸한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지금 이곳에서 대장로 다음가는 실력자인 이 장로다.
대장로와 이 장로 두 사람이 합공한다면, 팽중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을 터였다.
“자, 그럼. 다들 슬슬 준비하게.”
스릉- 스릉- 스릉- 스릉-…….
서문제호의 말에 검을 뽑아 들며 준비하는 서문세가의 무인들.
그들의 몸에서 진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둥- 둥- 둥-
“시작하십시오!!”
그때 중앙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북소리와 온 사방을 떨어 울리는 목소리.
이렇게 하북팽가와 서문세가의 무림패를 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 * *
“그럼 갑시다.”
팽중호가 가장 앞장서서 먼저 걸어 나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서문세가의 무인들.
아직 거리가 조금 있음에도 그들의 살기가 진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다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왔다 이거지?’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살기를 보니 확실해졌다.
저들은 이번에 모두 싹 다 죽일 생각으로 온 것이었다.
‘그럼 우리도 그렇게 해 줘야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닌가?
척- 척- 척- 척-
어느새 서로의 얼굴이 분간이 갈 정도로 가까워진 두 세력.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자리에 멈추었다.
“애송이들만 한가득하구나.”
서문제호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싸움 전에 적당히 도발해 둘 생각인 것이었다.
“그쪽은 늙은이들만 가득합니다?”
물론 이런 말싸움에서는 지지 않는 팽중호였다.
서문제호의 말을 그대로 받아치는 팽중호.
“흘흘. 그래. 늙은이들의 무서움을 보여 주려고 모아 왔다.”
물론 서문제호도 나이만큼이나 쉽사리 팽중호의 말에 말려들지는 않았다.
“방패를 준비한 것을 보니, 무언가 합격진을 짜 온 모양이구나.”
서문제호는 하북팽가 무인들의 손목에 있는 방패를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무인이 방패를 쓴다는 것은 무언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합격진일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그쪽은 그냥 덜렁 칼만 들고 왔나 봅니다?”
“그래. 너희를 잡는데 그것이면 충분하지. 압도적인 실력 차이라는 것을 보여 주마.”
서문제호의 자신감은 사실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 그냥 싸운다면, 서문세가의 무인들이 하북팽가의 무인들을 압도할 테니 말이다.
“그럼 저는 오늘 개망나니가 어떤 것인지를 그쪽에 보여 드리겠습니다.”
손에 무적도를 들고 서문세가 쪽을 가리키며, 비릿한 미소와 함께 말을 하는 팽중호.
서문세가 사람들은 그 미소에 이유 모를 오한을 느꼈다.
목이 서늘해지는 느낌.
“눈에 뵈는 것 없는 개망나니가 얼마나 무서운지 말입니다. 크크크.”
팽중호의 웃음과 함께 이 주변의 공기가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툭하면 바로 터질 것처럼 팽팽해진 긴장감.
딱-
그때 누군가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주변을 울렸고, 그것을 시작으로 두 세력의 무인들이 동시에 달려들기 시작했다.
“철갑구궁진을 펼쳐라!”
“예!”
검을 쥐고 그저 달려오는 서문세가와 다르게, 하북팽가의 무인들은 미리 연습한 철갑구궁진의 형태로 대열을 맞추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의 거대한 몸체가 되어, 한 몸으로 움직이는 팽가 무인들의 위용은 사뭇 대단했다.
그리고 그들 주변을 지키듯 움직이는 다섯 사람.
팽중호, 도수, 곽채령, 팽구진, 위지철.
“자. 우리는 저기 저 늙은이들을 상대하면 됩니다.”
“예! 주군!”
“네!”
그들은 자신감 넘치게 대답은 했지만, 사실 장로들을 이기기는 힘들 터였다.
다만, 그저 팽중호가 다른 장로를 처리할 때까지만 버텨 주기만 하면 문제없었다.
물론 이겨 주면 더욱 좋겠지만 말이다.
‘내 상대는 저기 저 두 늙은이겠군.’
팽중호는 조금 전부터 노골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서문제호와 이 장로.
‘오히려 좋군. 저 둘만 먼저 베어 버리면 일이 쉬워질 테니까.’
팽중호는 저 둘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오히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저 둘을 먼저 제거하면 오늘 이 싸움이 훨씬 편해질 테니 말이다.
그리고 서문세가에서 가장 강한 두 사람이 자신을 상대하기 위해 빠지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거, 노인 두 분을 상대하는 건 썩 별론데 말입니다.”
“그래. 우리도 젊은 놈을 둘이서 상대하는 건 썩 별로니, 금방 끝내 주마.”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이제는 실력으로 말을 할 때였다.
파직- 파지지지지직- 파지지직-
팽중호의 몸이 뇌신지체에 들어섰는데,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이전에는 뇌기가 강렬하게 이리저리 튀었다면, 지금은 몸 전체를 뇌기가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훨씬 안정되어 보이는 형태.
“저랑 딱 맞는 생각이십니다. 금방 끝내 드리겠습니다. 저승 가서 좋은 자리에서 구경하십쇼.”
파지짓-
팽중호가 방금 서 있던 자리에는 미약한 뇌기만이 흐르고 있었고, 신형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곳은 이 장로의 바로 코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