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저희 계약을 하나 하죠.
이세경은 팽중호를 절대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놓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소가주님이 있다면, 신조상단은 천하로 나아갈 수 있다.’
이세경은 큰 꿈과 배포가 있었다.
그녀는 그 꿈을 위해서 모든 것을 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팽중호는 그 꿈을 이루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열쇠였다.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좋습니다. 같이 가시죠.”
팽중호의 입에서 허락이 떨어졌다.
어차피 지금 이세경은 서문세가라는 공동의 적을 둔 동지나 마찬가지였다.
신조상단이 서문세가를 거절하고, 하북팽가에 혼처를 넣은 때부터 말이다.
그리고 팽중호는 이세경이 함께해서 나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분명 어떻게든 도움이 될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감사합니다.”
이세경은 팽중호의 허락이 떨어지자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팽중호가 타려던 마차에 올라탔다.
“에? 왜 여기에 타십니까?”
팽중호는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마차에 오르는 이세경을 바라보았다.
저기에 신조상단의 마차가 버젓이 있는데, 왜 이 마차에 탄단 말인가?
“당연히 함께 가야 더 그들을 더 자극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세경은 팽중호가 서문세가를 자극하기 위해 자신과 동행을 허락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핑계로 지금 같은 마차에 타려는 것이었다.
“뭐, 좋습니다. 미인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나쁘지 않겠죠.”
“후훗.”
팽중호는 흔쾌히 합석을 허락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함께 가는 동안 이것저것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럼 정말 가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다녀와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버님.”
“아버님?!”
이세경이 팽자성에게 아버님이라는 인사를 남기고 마차가 출발했다.
아버님이라는 말에 팽자성이 일순 놀랐지만, 어떻게 물어볼 새도 없이 마차가 출발해 버렸다.
결국 돌아올 때까지는 기다릴 수밖에 없을 터였다.
* *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서문세가로 향하는 넓디넓은 마차 안.
그 안에는 지금 딱 두 사람만 앉아 있었다.
팽중호와 이세경.
원래는 도수와 정한승 그리고 위지철까지 함께 탈 마차였는데, 그들은 신조상단의 마차로 옮겨 타고, 지금 단둘만 같은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다시 뵈니, 더 멋있어지신 것 같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마차의 공기를 깬 것은 이세경이었다.
이세경은 마차에 오른 뒤 가만히 팽중호를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팽중호가 더 강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때보다 더욱 강한 빛이 그의 몸에서 나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데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얼마든지요.”
“왜 그러신 겁니까?”
“후훗.”
이세경은 팽중호의 물음이 무엇인지 알았다.
왜 서문세가를 버리고 하북팽가를 선택했느냐는 질문일 터였다.
“오로지 소가주님을 보고 선택했습니다.”
“저를요?”
“예. 제가 사람을 보는 눈이 좀 괜찮습니다.”
팽중호는 가만히 이세경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조금의 떨림도 없으며, 그 안에 굳은 의지와 활활 타오르는 야망이 보였다.
“저로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신조상단의 천하 진출입니다.”
이세경은 거짓 없이 사실을 말하였다.
팽중호와 같은 사람에게 거짓을 말해 봐야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이럴 때는 진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흐음. 그럼 저희 계약을 하나 하죠.”
“들어 보고 싶습니다.”
“목표가 서로 같은 것 같으니, 전략적으로 연인 행세를 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팽중호가 제안한 것은 연인인 척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자신과 이세경의 목표가 천하로 뻗어 나가겠다는 것이니, 목표는 일맥상통하는 사이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팽중호가 보기에, 분명히 신조상단과 이세경은 하북팽가가 천하로 뻗어 나갈 때 아주 큰 도움이 될 터.
놓치고 싶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혼인까지는 좀 생각해 봐야 하니, 그동안 계약으로 행세만 하는 것이라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부상단주님을 제 혼처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그렇게나 싫으십니까?”
“예?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호호호. 아닙니다. 소가주님의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이세경의 말에 일순 당황하는 표정을 짓는 팽중호를 보고 웃음을 흘린 이세경은 팽중호의 계약 제안을 받아들였다.
공적인 자리에서의 언급이라도 지금은 충분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천천히 다가가면 되겠지. 급하지 않게.’
이세경은 팽중호에게 급하게 다가가려 하면 오히려 멀어질 것이란 걸 알았다.
그렇다고 너무 느려서도 안 되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건 지금 이 정도의 성과만으로도 충분했고, 자신이 지금 팽중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했으니 급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럼, 저희의 호칭부터 정해 볼까요?”
이세경은 호칭을 새롭게 정할 것을 제안했다.
혼처를 받아들인 연인관계인데, 계속 소가주님, 부상단주님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저는 가가라고 부르겠습니다.”
“예에?!”
가가라고 부르겠다는 이세경의 말에 팽중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가(哥哥).
전생에서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말이었다.
“가가께서는 저를 그냥 이름으로 편하게 부르시면 됩니다.”
“아, 알겠…… 어. 세경.”
“호홋. 잘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연인 행세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할 것이기에 팽중호는 뭔가 낯간지러웠지만, 열심히 적응하였다.
그렇게 보다 완벽한 연인관계인 척을 위해 노력하며, 마차는 조금씩 서문세가와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 * *
서문세가는 정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마차가 안으로 들어섰는데, 모두 다른 오대세가에서 온 이들의 마차였다.
마치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는 듯 수많은 고수들과 크고 화려한 마차들을 타고 등장한 그들.
오대세가 말고도 따로 초대받은 이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경탄하거나, 몰래 그들을 시샘하기 바빴다.
“자자. 어서들 오십시오.”
서문세가로 오대세가들의 행렬이 들어서자, 서문세가의 가주 추살검제(追殺劍帝) 서문정천이 사람들을 앞서서 맞이했다.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과 다르게, 그는 매우 손속이 거칠고 잔혹한 것으로 유명한 자였다.
오늘은 서문세가에서 오대회합이 열리는 날이니만큼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기에 식사를 준비해 두었으니, 식사부터 하시지요.”
오대회합의 시작은 간단한 식사로 시작된다.
서로 식사를 하면서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전통과도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남궁세가, 제갈세가, 사천당가, 모용세가가 모두 서문세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어어? 저기 하북팽가다.”
“하북팽가가 진짜로 왔다!”
앞선 행렬에 비하면 조촐해 보일 수 있으나, 사람들의 관심은 가장 크게 받으며 하북팽가의 행렬이 등장했다.
서문세가 안으로 천천히 들어서는 하북팽가의 행렬.
다그닥- 다그닥- 히이이잉-
마차가 멈추어 섰다.
일순 이 서문세가에 있는 모든 시선이 하북팽가의 행렬에 집중되었다.
끼이이이익-
마차의 문이 열리며 하나둘씩 나타나는 하북팽가의 인영들.
그리고 가장 앞서 있던, 가장 거대한 마차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동시에 마차에서 내렸다.
“뇌룡이다!”
“저자가 하북팽가의 소가주구나!”
“옆에는 신조상단의 부상단주인가 본데?”
“허어! 이렇게나 당당하게 온단 말인가?”
그저 마차에서 등장한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높은 관심을 받는 두 사람은 바로 팽중호와 이세경이었다.
어쩌면 지금 무림에서 가장 주목받는 두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사람들의 이런 관심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하북팽가의 소가주 팽중호라 합니다.”
“어서 오시게나.”
팽중호는 서문정천에게 인사를 하였고, 서문정천도 곧바로 인사를 받아 주었다.
분명 그저 평범한 인사였는데, 둘 사이에 순간적으로 불꽃이 튀는 듯한 환영이 보일 정도로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인사는 천천히 하도록 하고, 식사부터 하시게. 하북팽가의 자리는 저쪽일세.”
서문정천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을 하였는데, 그곳을 바라본 하북팽가의 다른 무인들의 인상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가장 구석에 있는, 누가 보더라도 하북팽가를 대놓고 무시하기 위한 듯한 자리.
당연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원래 오대세가가 아닌 곳을 초대하다 보니, 자리가 없어서 말이네.”
여유로운 표정을 능글맞게 말을 하는 서문정천.
이건 명백히 팽중호를 도발하기 위한 말투였다.
“아, 예 뭐 알겠습니다. 여기에 밥 먹으러 온 것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저희 식구들은 어차피 싸구려 음식은 잘 못 먹어서 말입니다. 자, 자리로 갑시다.”
팽중호는 서문정천의 도발을 역으로 받아치며, 곧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옮겼다.
그의 뒤를 따르는 팽가의 무인들은 언제 얼굴을 찡그렸냐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따라나섰다.
으드득-
그리고 그 뒤에서 조용히 이를 갈며 이를 지켜보는 서문정천.
그는 지금 자신이 한 방 먹었다는 것에 조용히 분노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팽중호는 준비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 좀 부족해도 열심히 준비한 것 같으니, 맛있게 먹읍시다.”
“예!”
팽중호의 말에 식사를 시작하는 팽가의 무인들.
부족한 맛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하북팽가에서 만든 밥보다 훨씬 맛이 떨어지긴 하였다.
“역시 집밥이 제일이라니까.”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는 팽중호와 하북팽가의 사람들에게 쏠린 주변의 시선.
그들은 지금 하북팽가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평가를 내리기 바빴다.
“저기, 저 사람은 정협룡 아닌가?”
“맞네. 이번에 하북팽가에 식객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진짜인가 보네.”
“저 옆에 앉은, 키 큰 이가 그 폭렬권이랑 팽성운을 이겼다는 그자인 것 같네.”
“어디 보자…… 확실히 들었던 모습하고 똑같네 그려.”
하북팽가에 정협룡이라 불리는 위지철이 함께한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놀라기에는 충분했고, 거기에 더해서 도수의 명성도 지금 조금씩 이 근방에는 알려지고 있는 수준이기에 사람들은 적은 수라도 하북팽가를 함부로 무시하지는 않았다.
물론 다른 오대세가들은 조금 생각이 다른 듯싶었지만 말이다.
“예전에 같은 오대세가였다고 하기도 부끄럽군.”
“구파의 사람을 끌어들이다니, 어지간히도 급했나 봅니다.”
“전부 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들 뿐입니다. 그려.”
다른 오대세가의 인물들은 한마디씩 거들며 하북팽가를 폄훼했는데, 그들은 어차피 하북팽가가 지금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서문세가에는 조금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서문세가를 치켜세우는 것이, 오대세가를 치켜세우는 것이 되고, 그것이 바로 자신들을 치켜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더욱 하북팽가를 폄훼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선호라 합니다.”
그때 오대세가 중 남궁세가의 자리에 있던 이 중 한 명이 하북팽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팽중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푸른 무복과 푸른 영웅건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짙은 인상의 청년.
바로 남궁세가의 소가주이자, 무림에서 검룡(劍龍)이라 불리며 팔룡삼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고수로 불리는 남궁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