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이 세 개면 충분하지.
“흐음. 그래 그러자. 당장 혼인하자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네 말처럼 서문세가를 도발하기에 좋은 소재니까.”
팽중호는 잠깐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혼처 거절은 서문세가의 일이 끝나고 하면 된다.
“춘오 너는 왜 신조상단에서 나한테 혼처를 보냈는지 알아봐.”
“예. 뭐 알아보겠습니다.”
팽중호는 분명 신조상단이 무슨 이유가 있어서 혼처를 보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 그럴 리 없으니 말이다.
“서문세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알아보고.”
“예. 안 그래도 미리 의뢰해 놓았습니다.”
서문세가가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신조상단 때문에라도 더 가만히 있지는 못할 터다.
여기서 가만히 있다가는 자신들이 웃음거리가 될 거라 생각할 테니 말이다.
명문 대파의 자존심이란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 고생하고, 나는 잠깐 위 소협 좀 만나러 가야겠다.”
“예.”
팽중호는 그렇게 자리를 일어나서 밖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위지철이 수련을 하고 있는 곳.
스으윽- 휘익- 스윽- 휙-
위지철은 팽중호가 온 줄도 모른 채로 검을 움직이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팽중호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일단 지켜만 보았다.
집중하고 있는데 방해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후우…….”
“어떠십니까? 깨달음은 얻으셨습니까?”
“아, 예. 조금 더 앞으로 나간 것 같습니다.”
위지철은 밝은 표정으로 팽중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한동안 위지철의 앞을 막아 오던 깨달음을 지금 하북팽가에 와서 깨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감시관이란 직책을 가지고 팽중호를 만나기 위해 하북팽가에 온 결정은 정말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옳은 선택이었다.
“위 소협 그럼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번 제대로 시험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저야 언제나 환영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십시오.”
팽중호는 위지철과 함께 하북팽가를 벗어나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공터로 향했다.
지난번에 도수와 장춘오를 데리고 왔던 그 공터였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이곳까지 와서 대련하자고 하신 겁니까?”
위지철은 갑자기 팽중호가 무슨 생각이 있어서 이곳까지 와서 대련을 하자는 것인지 궁금했다.
평소에는 보통 하북팽가에 있는 연무장에서 하였으니 말이다.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저도 깨달음을 얻은 게 있어서 좀 시험해 보려 합니다.”
팽중호는 공청석유와 신선주를 먹고 난 후, 새롭게 깨달음을 얻었다.
아니, 사실 새로운 깨달음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깨달음으로 한 번에 올라갔다고 하는 것이 맞을 터였다.
‘화경.’
이미 임독양맥은 모두 뚫어 둔 상태.
그 상태에서 내공만 부족했었는데, 이번에 그 내공마저 채워지며 다시금 화경이라는 경지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모든 무림인들이 꿈에서라도 밟고 싶어 하는 경지인 화경.
온 무림을 다 뒤져도 그 숫자가 채 스물을 넘지 못할 만큼의 지고한 경지에 지금 팽중호가 다시금 발을 디딘 것이다.
‘내 옛날보다 더 빠르다.’
지금의 나이를 생각하면 전생보다도 훨씬 이른 시일에 화경에 도달한 것이었다.
“위 소협. 모든 힘을 다하셔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스릉-
스르릉-
가볍게 서로의 도와 검이 뽑혀 손에 들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퍼지는 두 사람의 기운.
휘이이이잉-
한 줄기 바람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갔고, 그것을 신호로 위지철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푸른 검기와 함께 펼쳐지는 태극혜검(太極慧劍).
위지철이 얻었다는 깨달음 때문일까?
일전에 보여 주었던 태극혜검과는 움직임이 달라져 있었다.
수동적으로 움직이던 것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펼쳐지는 위지철의 태극혜검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전해 주었다.
카카캉- 카캉- 카아앙-!
팽중호의 힘을 그대로 흘려 냄과 동시에 그 힘을 이용해 곧바로 공격해 들어오는 태극혜검은 굉장히 위력적이었다.
부드러움에 강함이 더해진 태극혜검.
이것이 이번에 위지철이 하북팽가에서 얻은 깨달음이었다.
“캬. 훨씬 무서워지셨습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팽중호는 위지철의 검이 처음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워졌음을 느꼈다.
어쩌면 그저 심신의 수양을 위한 검에서, 이제는 정말 무인의 검이 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제 깨달음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예!”
이번에는 팽중호가 보여 줄 차례.
파짓- 파지직- 파팟- 파지지직-
팽중호의 무적도에 선명한 강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도강(刀罡)이 아니라, 뇌강(雷罡)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뇌기도 선명하게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 뇌강을 보고 위지철도 검강(劍罡)을 마주 피워 올렸다.
“위 소협.”
“예.”
“화경의 경지에 오르면 뭐가 달라지는지 아십니까?”
“강기의 사용이 자유자재가 되고, 무공이 자신의 깨달음에 맞게 변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은 대종사의 반열에 이르렀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초절정의 경지에서 다루던 강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며, 무공의 틀을 벗어나 자신의 깨달음에 맞게 무공을 변화해 사용하게 된다.
위지철이 지금 깨달음으로 태극혜검에 강함을 더한 것은, 그가 화경의 경지에 올라섰을 때 그만의 색을 가진 태극혜검으로 바꾸기 위한 준비 단계와 같은 것이었다.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 혼원벽력도를 위 소협께 처음으로 보여 드리려 합니다.”
“……!! 그렇다면, 소가주님께서는 화경의 경지에 다다르셨단 말씀입니까?”
팽중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위지철은 그 모습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화경의 경지에 도달했다니?
일류에서 절정으로 가는 것보다 절정에서 초절정으로 가는 것이 더 힘들 듯, 초절정에서 화경으로 가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무림에서 대 문파라고 손꼽히는 무당파에도 화경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이 단 두 사람뿐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경지를 아직 한참이나 젊은 팽중호가 이룩했다니?
아무리 팽중호를 높게 평가하는 위지철이라도 쉬이 믿기 어려웠다.
“조금 위험할 수 있으니까, 마음 단단히 먹으십쇼.”
* * *
공청석유와 신선주로 상당한 내공을 확보한 팽중호는 곧바로 혼원벽력도를 다시금 자신에게 맞게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전생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골격 등 외적인 것부터, 정신 상태 등 내적인 것까지 다 달랐으니 말이다.
화경의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몸에 가장 최적화된 무공으로 재구성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뚜둑- 뚜두둑-
한적한 공터로 홀로 나온 팽중호는 몸을 풀고서 허리춤의 무적도를 손에 들었다.
손에 착 감기는 무적도의 느낌이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자, 해 볼까?”
스윽-
무적도를 들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팽중호.
처음 그의 움직임은 가장 정석적인 혼원벽력도의 움직임이었다.
힘 있고, 강하며, 빠른.
그런 혼원벽력도가 갑자기 움직임이 바뀌었다.
빠르고 강함에 더해진 자유로움.
마치 초식이란 것이 없는 듯 자유롭게 펼쳐지는 혼원벽력도는, 마치 들판을 질주하는 한 마리의 자유로운 야생마와 같아 보였다.
“후우.”
짧은 숨과 함께 팽중호의 도가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하는 무적도.
파지직- 파짓- 파지지직- 파팟-
무적도에 강렬한 뇌강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뇌강으로 뒤덮인 무적도를 팽중호는 딱 세 번 휘둘렀다.
-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혼뢰단세(混雷斷世).
-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뇌룡진천(雷龍振天).
-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원뢰멸혼(元雷滅魂).
팽중호가 이번에 다시금 화경의 경지에 오르며 깨달음으로 다시 만들어 낸 혼원벽력도였다.
원래 총 아홉 초식으로 이루어진 혼원벽력도를 딱 세 초식으로 바꾼 것이다.
‘베고, 다 베고, 죽인다. 이 세 개면 충분하지.’
팽중호는 혼원벽력도의 초식이 많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면 되니 말이다.
지난 생에서는 무엇에도 얽매이기 싫었기에 초식에서 벗어난 혼원벽력도를 펼쳤다면, 이번 생에서는 하북팽가를 다시금 일으키기 위해 압도적인 힘이 필요했기에 이렇게 압축한 것이었다.
패도를 뛰어넘는 극강의 패도.
이게 이번 생에 팽중호가 선택한 혼원벽력도의 길이었다.
* * *
-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 혼뢰단세(混雷斷世).
서걱- 촤아아아아아아아악-
위지철은 지금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팽중호의 뇌강을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건 저를 죽이려고 하신 겁니까?”
조금 위험할 수 있다더니, 이건 조금 위험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정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하하. 엄살은. 그래도 잘 흘려 내시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잘 흘려 낸 것입니까?”
태극혜검을 최대한으로 펼쳐 내어 흘려 내었는데, 지금 위지철이 든 검에 금이 가 버려 있었다.
무당파에서 위지철을 위해 특별히 하사한 검인데 말이다.
“검은 제가 다시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예. 기대하겠습니다.”
검이 금이 가 버렸으니, 더 이상의 대련은 힘든 상태.
팽중호와 위지철은 돌아갈 때는 천천히 걸어서 팽가로 돌아갔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위지철은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서 조금 전에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저게 가능한 것인가?’
분명 지금 팽중호가 모든 힘을 쓰지도 않은 것인데, 뇌강이 지나간 곳에 있던 모든 것들이 파괴되어 있었다.
사람이 내었다고는 믿기 힘든 위력.
그런 위력을 내놓고 팽중호는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바람을 맞으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위 소협.”
“예.”
“이렇게 돼서 이야기하는 건데, 아예 하북팽가에 눌러살아 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예?”
눌러살라니?
“무당파를 나오시라는 것은 아니고, 저희 하북팽가에 공적으로 식객으로 계시면 어떨까 해서 말입니다.”
“아!”
식객(食客).
이들은 그 세가나 문파 소속은 아니지만, 공적인 일에 얼마든지 대신해서 나설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이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만약 위지철이 하북팽가의 식객으로 들어온다면, 그는 무당파 소속이면서도 얼마든지 하북팽가의 일에 개입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제가 사문에 한번 연락을 넣어 보겠습니다.”
“예. 부담스러우시면 꼭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요. 반드시 어떻게든 식객으로 머물도록 하겠습니다.”
위지철은 설사 무당파에서 반대한다고 해도, 하북팽가에 머물 생각을 했다.
오늘 또 몇 단계를 앞서 나간 팽중호를 보았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아직 이 하북팽가에서 배울 것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정도 들었으니…….’
팽중호와의 계약대로 하북팽가의 무인들의 수련을 봐 주다 보니, 이미 하북팽가의 무인들과 꽤 정이 들어 버린 위지철이었다.
어쩌면 자신을 언제나 시기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문의 사람들보다 더 정이 들어 버린 것이다.
“날이 참 좋지 않습니까?”
“예.”
지금 두 사람이 걷고 있는 하늘은 노을로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선선한 바람이 이에 더해지자 마치 한 폭의 그림 아래에 걷는 기분이 들 정도로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