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한바탕 놀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세경이 내민 종이를 훑어보기 시작하는 장춘오.
그렇게 한번 쭉 훑어보더니, 곧바로 종이를 내려놓았다.
“혹시 제안이 마음에 드시지 않는 것인지요?”
이세경은 장춘오가 너무나 빠르게 종이를 읽어 넘기는 것을 보고, 그가 이 제안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예? 아닙니다. 조건은 괜찮습니다. 몇 가지만 수정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장춘오는 곧바로 붓을 들고는 몇 가지 제안을 수정해서 다시금 이세경에게 건네었다.
조금은 놀란 듯한 눈을 하고 있는 이세경.
“그 짧은 사이에 전부 보신 겁니까?”
“뭐, 얼마나 내용이 많다고 그걸 종일 봅니까?”
이세경은 장춘오가 수정한 것을 보고는 더 놀랐다.
정말 그 짧은 시간에 모두 읽은 후, 계산까지 끝낸 것이다.
이세경도 나름 천재 소리를 많이 들었었는데, 지금 장춘오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만큼 장춘오의 능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팽가에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이세경은 눈을 빛내며 팽중호와 장춘오를 바라보았다.
하북팽가에 팽중호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은 아닌 듯싶었다.
스스슥-
장춘오가 수정한 것에 곧바로 서명하는 이세경.
이렇게 하북팽가와 신조상단 간의 거래가 체결되었다.
“이건 거래를 해 주신 것에 대한 답례입니다.”
이세경이 품에서 옥패(玉牌) 하나를 꺼내어 건네었다.
옥패에는 신조(神鳥)라는 글씨가 양각되어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평범한 물건은 아닌 듯 보였다.
“이게 뭡니까?”
“저희 상단의 최고 귀빈임을 뜻하는 패입니다.”
이세경이 건넨 옥패를 들고 신조상단의 어느 곳을 방문한다고 해도, 신조상단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상단주나 부상단주와도 같은 대접을 말이다.
사실 거래 성사에 대한 답례품치고는 과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물론 팽중호는 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패인지는 정확히 몰랐기에, 일단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패를 품속에 고이 모셔 두었다.
좋은 건 일단 챙기고 봐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다음에 또 뵙기를 청하면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예. 조심히 가십시오.”
이세경이 몸을 돌려 사라졌고, 이세경과 같이 왔던 신조상단의 인물들도 함께 하북팽가를 나서 사라졌다.
“춘오야.”
“예.”
“뭔가 귀신에 홀린 기분이 든다.”
“흠. 마음에 드십니까? 제가 한 번 혼인을…….”
“아니. 아직은 그럴 생각은 없다.”
“뭐,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팽중호는 단칼에 그럴 생각 없다고 거절했지만, 장춘오는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 *
신조상단의 본진으로 돌아가는 마차.
마차 안에는 이세경과 그를 보좌하는 이가 함께 타 있었다.
“어째서 아가씨의 옥패를 건네어 주셨습니까? 본래는 금패가 아니었습니까?”
이세경이 전해 준 옥패는 사실 원래 하북팽가에 주려던 것이 아니었다.
원래는 그보다 아래인 금패를 전해 줄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세경이 갑자기 팽중호에게 옥패를 건넨 것이다.
그것도 본래 이세경의 것인 옥패를 말이다.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옥패 이상의 가치가 하북팽가에 있단 말씀입니까?”
하북팽가가 최근 하북제일세라는 소리를 듣는다지만, 아직 옥패 정도의 가치를 가졌다고 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었다.
“분명 그리될 것입니다. 그러니 신조상단은 지금부터 하북팽가에 많은 역량을 기울이도록 지시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이세경의 안목은 지금까지 틀린 적이 없었다.
그녀가 하북팽가를 높게 봤다면 분명 그렇게 될 터였다.
“그리고 서문세가에서 온 청혼은 거절한다고도 해 주십시오.”
“예?”
지금 이세경에게 수없이 많은 혼처가 청혼해 왔는데, 그중에 가장 유력한 혼처 후보는 바로 서문세가였다.
신조상단에서도 서문세가만 한 곳이 없다는 생각에 그곳에 무게를 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세경도 하북팽가에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문세가와 혼인을 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팽중호를 딱 보는 순간 그 생각이 바뀌었다.
‘팽 소가주님은 잠룡이다. 그것도 천하를 휘어잡을 신룡.’
이세경이 지금의 신조상단을 이루어 내는 것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능력이 있다면, 바로 사람을 보는 안목이었다.
이세경은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을 보아 왔지만, 팽중호만큼 빛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꼭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조만간 하북팽가에 제가 직접 청혼할 생각입니다.”
“예에에?!”
이세경의 앞에 있던 이가 평정을 잃고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세경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이세경이 직접 청혼을 한다니?
이건 정말 놀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이세경이 지금까지 어디에 청혼을 한다고 한 적은 결코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서문세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지금 하북팽가는 서문세가에 선전포고를 한 상황.
당연히 둘 사이가 좋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 서문세가의 청혼을 거절하고, 하북팽가에 역으로 청혼을 한다?
분명 서문세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서문세가와의 거래를 천천히 정리하라고 해 주십시오.”
“허어…… 알겠습니다.”
지금 신조상단의 전권은 이세경에게 있었다.
그녀가 하라고 명한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아직은 의문이 든다고 해도 말이다.
* * *
신조상단이 돌아가고 다시 연무장으로 돌아온 팽중호.
그곳에 있던 하북팽가의 무인들은, 아직까지 운기행공에 빠져들어 있는 상태였다.
“후우우웁.”
그렇게 꽤 시간이 지나 해가 산을 넘어갔을 때쯤.
그제야 하나둘씩 깊은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모든 이가 눈을 떴고, 그들 앞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팽중호가 서 있었다.
“자, 어떠십니까?”
“아직 잘 모르겠지만, 몸이 너무나 가볍습니다.”
팽가의 무인들은 자신들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기 시작했다.
몸이 깃털처럼 가볍고, 지금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일단 다들 씻는 것부터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예? 어억!”
“우욱!”
지금 연무장에 엄청난 악취가 맴돌고 있었는데, 몇몇 비위가 약한 이들은 토를 하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강렬했다.
“이, 이게 왜?”
“탁기가 빠져나온 겁니다.”
“허어!?”
그들의 몸 안에 쌓여 있던 탁기가 지금의 운기로 빠져나온 탓에 풍기는 악취였다.
물론 그들 몸 안에 있던 모든 탁기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양의 탁기가 몸 밖으로 배출되었다.
그게 동시에 많은 인원의 몸에서 나왔으니, 당연히 어마어마한 악취가 풍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지금부터 다들 깔끔하게 싹 씻으시고, 다시 이곳으로 오십시오. 탁기가 제거되었으니, 달밤에 신명 나게 한바탕 놀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크크크.”
“예, 예!”
분명 신명 나게 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감히 누구의 말이라고 거절하겠는가?
무인들은 곧바로 목욕을 하기 위해 흩어졌고, 지금 자리에는 도수와 곽채령, 그리고 팽중호가 방금 막 불러낸 위지철만이 남아 있었다.
“도수하고 채령이, 그리고 위 소협은 오늘 저와 같이 각 조의 조장을 할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조장이요?”
“무얼 하시려는 겁니까?”
“패싸움을 할 겁니다.”
“??”
패싸움?
갑자기 패싸움을 한다는 팽중호.
시정잡배들이나 뒷골목의 왈패들이 왕왕 떼로 몰려서 패싸움을 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곳은 하북팽가.
정도의 무인들이 갑자기 패싸움이라니?
“무기는 쓰지 않고, 오로지 몸으로만 싸울 겁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그래야 더 짜릿한 손맛으로 때릴 수 있으니까요.”
“헉!”
“히익!”
물론 패싸움을 하는 데는 이유는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갑자기 갑자기 늘어낸 내공과 가벼워진 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새롭게 바뀐 몸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몸으로 직접 움직여 보는 것이 제일이었는데, 무기를 들고 움직이다 보면 자기 몸에 적응치 못해 예상치 못한 사고가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무기는 잠시 내려두고, 오로지 맨몸으로 싸우는 것이 필요한 것이었다.
“다들 얼른 몸들 풉시다. 안 봐주고 때려 줄 생각이니까. 크크크.”
뚜둑- 뚜두둑- 뚜둑-
말을 하면서 착실하게 몸을 푸는 팽중호.
그 모습을 보고 도수와 곽채령도 얼른 몸을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몸을 풀어 놔야 이따가 맞을 때 덜 아프게 맞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위지철도 옅은 미소와 함께 몸을 풀기 시작했다.
‘검을 내려놓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얼마 만인지.’
검을 들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인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검을 든 검객으로서 언제나 검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오늘 검을 내려놓고 직접 몸으로만 움직일 생각을 하니, 무언가 조금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검을 들지 않고 직접 몸을 움직이며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
위지철은 왠지 이 패싸움이 끝나면, 한 걸음 더 위로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다다다다닥-
그때 먼저 목욕을 끝낸 이들부터 차례로 연무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다들 개운함에 더해서 몸이 가벼워져서 그런지 표정들이 아주 밝았다.
그리고 그런 밝은 표정들을 보고 팽중호가 입을 열었는데, 그들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자. 지금부터 넷으로 나눠서 패싸움을 진행하겠습니다.”
“예……?”
“저와 여기 도수, 곽채령 각주 그리고 저기 위 소협이 각 조의 조장이 될 겁니다.”
팽가의 무인들은 아직 정확한 것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무조건 소가주님과 한 조가 되어야 한다.’
팽중호와 한 조가 되지 못하면, 몸이 매우 고달파질 것이란 느낌이 강하게 왔다.
“자. 그럼 각자 원하는 조장 앞으로 한번 서 보시지요.”
우르르르- 후다다다닥-
“비켜!”
“나와!!!”
팽중호의 앞으로 무인들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려들었다.
어떻게든 팽중호와 한 조가 되겠다는 필사적인 의지.
하지만 모든 이가 팽중호와 조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자. 선착순으로 자르겠습니다.”
“으아악!”
“안 돼!!”
결국 일단의 소요 끝에 네 개의 조가 편성이 되었다.
팽중호와 한 조가 된 이들은 얼굴이 활짝 펴져 있었고, 다른 조가 된 이들은 얼굴이 완전 흙빛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흙빛의 얼굴은 금방 결연한 의지를 빛내는 비장한 얼굴로 변하였다.
이렇게 된 이상, 죽기 살기로 싸우겠다는 결연함에서 오는 비장함이었다.
“시간은 딱 반 시진. 그때까지 가장 많은 사람이 서 있는 조가 승리입니다.”
“소가주님! 승리하면 뭐가 좋습니까?”
팽중호의 말에 누군가 용기 내어 소리쳤다.
이런 대결의 승자에게는 응당 보상이 있어야 더욱 열심히 하지 않겠는가?
“승리한 조에는 넉넉한 돈과 일주일간의 수련 열외를 드리겠습니다.”
“!!!”
“!!!”
수련 일주일 열외라는 말에 모든 무인들의 눈이 불타올랐다.
그 지옥 같은 수련을 일주일 동안 안 할 수 있다?
거기에 다가 넉넉한 돈까지 주고?
이건 당연히 엄청난 동기부여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자. 그럼 어디 한번 시작해 봅시다.”
“와아!”
“무조건 버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