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든든하구만.
벽 뒤의 작은 공간에 가득 차 있는 금은보화.
대체로 한 세력의 머리가 되면, 꼭 이렇게 비밀스러운 공간에 뒤로 꿍쳐 놓은 것들을 보관하기 마련이다.
팽중호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찾아낸 것이고 말이다.
“자. 위 소협. 이것 좀 도와주십쇼.”
“아, 예. 알겠습니다.”
팽중호는 근처에서 찾아낸 보자기에 금은보화들을 쓸어 담은 뒤, 위지철에게 건네주었다.
그렇게 금방 두 개의 자루를 만들어 낸 팽중호.
안에 있던 것들을 모두 챙기고, 이제 가장 구석에 있는 것 하나만 마지막으로 꺼내면 되었다.
“으음? 술?”
팽중호의 손에 잡힌 것은 작은 술병 하나.
술병을 이런 곳에 보관한다?
그럴 리가 없다.
이건 절대로 보통 술이 아닐 게 분명했다.
퐁-
화아아아악-
팽중호는 곧바로 술병을 뚜껑을 살포시 열어 보는데, 그러자 술병 안에서 강렬하고 청아한 향기가 쫘악 퍼져 나왔다.
“신선주를 가지고 있어?”
지금 팽중호의 손에 들린 것의 정체는 바로 신선주(神仙酒)였다.
신선들이 마시는 술이라는 신선주는, 사실 술이라기보다는 영약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맞았다.
내공 증진에 탁월한 영과인 신선과(神仙果)가 자연에서 오랜 시간 숙성됐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신선주였으니 말이다.
한마디로 신선과의 효능이 압축되어 녹아 있는 술이란 소리였다.
공청석유에 비하자면 조금 부족한 영약일 수는 있지만, 이 신선주도 분명 공청석유만큼 구하기 힘든 것임은 분명했다.
돈이 있어도 매물이 없어서 못사는 것이니 말이다.
“횡재했네.”
횡재했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었다.
앞서 챙긴 금은보화보다 가치가 더 큰 신선주를 생각지도 못하게 얻었으니 말이다.
팽중호는 조심스럽게 신선주를 챙겨 들고, 위지철과 함께 흑수련을 빠져나왔다.
아직 털어 갈 것들이 더 있었지만, 그건 그대로 놔두기로 했다.
그래야 일이 편해지니 말이다.
‘저들끼리 물고 뜯겠지.’
남은 것들을 나눠 먹기 위해, 흑수련이라는 큰 틀에 묶였던 사파들이 분명 서로를 물어뜯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분열을 초래할 것이고, 세력을 약하게 할 터.
사파를 완전히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과 같은 것이니, 분명 이것이 제일 나은 방법일 터였다.
* * *
하북팽가로 돌아온 팽중호와 위지철.
두 사람이 챙겨 온 전리품은 곧바로 장춘오가 분류해 태도상단과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북팽가와 태도상단은 또다시 호황을 맞이했고, 이제는 두 곳 다 하북제일이라고 해도 누구도 부정치 못할 정도가 되었다.
이제 하북성에서 감히 하북팽가에게 칼을 들이밀 곳은 남아 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하북팽가가 당당히 하북제일세로 올라선 것이다.
물론, 팽중호에게 이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넘어야 할 높은 산들이 아직 많다.’
당장 이제 다음으로 넘어야 할 산이라 볼 수 있는 서문세가는, 지금까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산이었다.
지금의 하북팽가로는 넘을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높은 산 말이다.
‘그러니 편법이라도 쓰는 수밖에.’
세상에는 편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가?
아무리 높은 산이라지만, 편법을 쓴다면 넘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팽중호는 이 편법을 좀 쓰기 위해, 흑수련에서 일부러 서문세가를 도발한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걸려 줄지 어떨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똑똑-
팽중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쇼.”
드르륵-
문이 열리고 들어온 이는 위지철이었다.
“아, 위 소협. 보고는 잘하셨습니까?”
“예. 하북팽가는 사도 문파가 결코 아니라 하였습니다.”
위지철은 팽중호와 거래를 하나 하였다.
무림맹에 하북팽가는 정도의 길을 걷는 정도 문파가 맞으며, 절대 사도 문파가 아니다라는 보고를 써 주는 대신에, 제대로 비무를 해 주겠다는 거래를 말이다.
위지철은 이미 하북팽가가 사도 문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기에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었고, 그래서 거래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위지철은 그런 것보다, 팽중호와의 비무가 더 중요했으니 말이다.
“그럼 비무는 영약 좀 먹고 하는 걸로 하죠. 너무 오래 두면 상하니 말입니다.”
“아, 예.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자. 여기 위 소협 몫의 신선주입니다. 위 소협도 좀 드시면서 기다리십쇼.”
“예?”
“흑수련에서 같이 고생하셨는데, 당연히 드려야지요.”
같이 개고생을 하였는데, 혼자만 날름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럴 때는 이렇게 생색을 충분히 내면서 나누는 것이 맞았다.
그래야 나중에 또 위지철을 써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거,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시고 줄 때 받으십쇼.”
“……그럼.”
위지철은 팽중호가 건넨 신선주를 받아들었다.
그도 무인인데 영약이 탐이 나지 않을 리 있겠는가?
그리고 지금 더욱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올라 있었으니, 더 이상 거절하지 않은 것이었다.
“크크크. 그럼 영약 잔치가 끝나는 대로, 제대로 한번 붙어 봅시다.”
“기대하겠습니다.”
위지철은 신선주를 들고 떠났고, 팽중호도 공청석유와 남은 신선주를 들고 개인 연공실로 향하였다.
저벅- 저벅-
“흐음.”
꽤 오랜만에 이곳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자신이 남긴 도흔들로 가득한 연공실.
“개판이네.”
확실히 개판이기는 했다.
팽중호는 이 연공실도 이번에 보수를 해야겠다 생각하며, 일단 연공실의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탁- 탁-
그리고 바닥에 공청석유와 신선주를 내려놓았다.
“흐음.”
팽중호는 앞에 있는 두 개 중 어느 것을 먼저 먹어야 할까를 고민했다.
영약도 먹는 순서에 따라 효험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기억까지 탈탈 털어 봐도 공청석유와 신선주를 어떻게 먹어야 하나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하긴, 일생에 하나 보기도 힘든 영약들이니 어쩌면 당연했다.
“고민이 될 때는……. 한 번에 먹는다.”
잠시 고민을 하던 팽중호는 한 번에 두 영약을 동시에 먹기로 마음먹었다.
도대체 어떻게 될지는 팽중호도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뭐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어차피 기운이 치우쳐진 영약이 아니니까 문제없겠지.’
공청석유와 신선주, 둘 다 조화가 잘 이루어진 영약이었다.
설삼이나 화리와 같이 한쪽으로 기운이 기울어진 영약은 정말로 잘못 섞어 먹으면 큰일이 날 수도 있었지만, 지금 앞에 있는 두 영약은 조화가 좋은 것들이니, 아마 문제없을 터였다.
퐁- 퐁-
꿀꺽- 꿀꺽- 꿀꺽- 꿀꺽-
고민을 끝내고 결정을 함과 동시에, 뚜껑을 열고 곧장 입으로 털어 넣었다.
쏴아아아아아아-
몸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파도와 같이 온몸에 퍼지는 영약의 기운.
두 개의 거대한 기운이 몸 안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팽중호는 지체 없이 혼원벽력신공의 운기를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
거대한 영약의 기운들이 혼원벽력신공의 인도에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하나가 되지 못한 채로 따로따로 움직이는 두 기운.
‘자, 어디 한번 해 보자.’
팽중호는 두 기운을 합치기 위해 단전에 있던 내공들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팽중호가 모은 내공만큼이나 거대한 영약의 기운들을 그대로 감싸 안았다.
그렇게 세 개의 기운이 하나로 뭉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잉- 펄럭- 펄럭-
팽중호를 중심으로 기의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고, 그대로 팽중호의 몸이 바닥에 조금 떠올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공의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고, 이내 개인 연공실 전체를 휘돌기 시작했다.
‘이제 하나로 합친다!’
수없이 몸을 돌던 세 개의 기운이 이제는 서로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그리고 그때.
팽중호는 세 기운을 하나로 합쳐서 곧바로 단전으로 집어넣었다.
콰아아아앙-
갑자기 거대한 기운이 단전으로 향하니, 단전에서 거대한 울림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단전의 울림이 잦아 들어가자, 팽중호의 몸이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왔고, 사방을 휘돌던 바람도 천천히 멎어갔다.
번쩍-
그리고 팽중호의 눈이 떠졌다.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안광이 터져 나오며 연공실을 환하게 비추었다.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쉰 팽중호는 제법 묵직해진 단전의 내공을 느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두 개의 영약을 함께 먹으니 오히려 영약의 기운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온전히 영약의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든든하구만.”
이제는 크게 내공 부족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쌓인 내공.
물론 이래도 아직 길은 멀고 멀었지만 말이다.
“나는 됐으니까, 이제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봐 줘야겠어.”
태철호가 영약들을 다수 구해 놓았다는 연락을 취해 왔다.
공청석유나 신선주같은 대단한 영약들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래도 천년삼에 근접한 영약들을 상당수 구했기에, 팽중호는 연락받자마자 그것을 곧바로 단약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팽가의 모든 무인이 먹어야 했으니 말이다.
아마 이제 곧 단약이 도착할 것이고,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 될 터였다.
하북팽가가 다시 오대세가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의 시작이 말이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연공실 밖으로 나온 팽중호.
그리고 딱 때맞추어 위지철도 모습을 나타내었다.
“성과 좀 있으셨습니까?”
팽중호가 씨익 웃으며 위지철에게 물었다.
그러자 위지철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지금 바로 확인해 보고 싶을 만큼의 성과가 있었습니다.”
“그럼. 저희 둘이 먼저 슬쩍 확인해 볼까요?”
“감사합니다.”
* * *
하북성에 새로운 패자(霸者)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온 무림으로 퍼져 나갔다.
패자의 정체는 하북팽가.
하북성에 있는 모든 문파를 발아래에 꿇리고, 하북제일의 자리에 군림했다는 소문이었다.
특히나 이번에 흑수련을 완전히 와해시켜 버리며 사도 문파로 변절한 것 아니냐는 소문까지 없앴기에, 이제는 하북팽가가 조만간 당당히 나서 오대세가 자리를 되찾을 것이라고 떠들기까지 하였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하북팽가를 밀어내고 오대세가에 들어간 서문세가를 함께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또다시 무림을 들끓게 하는 소문이 하나 퍼져 나왔다.
‘하북팽가가 오대세가 자리를 되찾겠다고 선언했다!’
현 하북팽가를 이끄는 실질적인 자라고 소문이 난 뇌룡 팽중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소리가 이 소문의 신빙성을 올려 주었고, 덕분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하북팽가가 과연 오대세가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토론하기 바빴다.
* * *
“자. 그렇게 공격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이렇게 찔러 넣으셔야 합니다.”
“아! 감사합니다! 위 소협.”
위지철은 팽중호와의 계약대로 하북팽가의 무인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위지철은 남을 가르치는 것에 소질이 있었다.
그는 그 사람에게 딱 맞는 눈높이로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고, 곧바로 해결 방법을 알려 주었다.
게다가 팽중호와는 달리 매우 친절했기에, 현재 하북팽가에서 위지철의 평판이 굉장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 좋아. 이러면 위 소협이 오히려 우리 팽가에 머무는 게 낫겠어.”
처음에 위지철이 감시관으로 온다고 했을 때 머리를 감싸 쥐었던 팽중호였지만, 이제는 팽중호의 위지철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바뀌었다.
위지철은 지금 하북팽가에 꼭 필요한 인재였다.
“자. 다들 모여 보십시오.”
잠깐 수련을 지켜보던 팽중호가 모든 이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팽중호의 말에 우르르 모여드는 무인들.
“오늘은 중요한 발표가 있는 날이라 불렀습니다. 춘오야.”
“예. 여기 있습니다.”
모두를 불러 놓은 후, 장춘오에게 족자를 하나 건네받은 후 쫘악 펼치는 팽중호.
모인 이들은 저것이 대체 무엇일지 궁금하다는 표정을 하였다.
“지금부터 하북팽가의 새로운 각주들을 발표하겠습니다.”
“오오!”
팽중호는 위지철과 흑수련의 일로 조금 미뤄진, 새로운 각주의 발표를 지금 할 생각이었다.
더 미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혹시나 이 발표에 불만이 있으신 분들은 저한테 일 대 일로 오셔서 상담하시면 됩니다. 자, 그럼 처음으로 발표할 곳은……. 맹호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