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오랜만에 맛보는 군자산의 맛이군.
흑수련 내부 대회의장.
그곳에는 지금 흑수련의 모든 수뇌가 모여 있었다.
쭈욱 서 있는 그들 사이로, 팔 하나를 잃은 잔살조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공청석유를 놓친 것도 모자라, 무당파의 정협룡을 건드렸다?”
대회의장의 가장 상석.
거대한 의자에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던 이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잔살조에 물어왔다.
흑수련의 련주(聯主) 잔혈흑수(殘血黑手) 무창성.
지금 잔살조에게 말을 한 자의 정체였다.
하북성 사파 연합인 흑수련을 이끄는 초절정의 고수.
사파의 인물이기에 비룡신창에 비해 평가절하당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비룡신창 이상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을 정도의 실력자.
평소 그의 성품이 매우 잔인하고, 손속 또한 자비가 없었기에 흑수련의 모든 이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죄, 죄송합니다!”
“쓸모없는 것. 네놈이 실패하는 바람에 그들에게 내가 질책을 듣겠구나.”
“살려 주십시오!”
쉬이이이익- 퍽-
무창성의 손에서 뿜어진 흑색의 기운이 쏘아져 나왔고, 그대로 잔살조의 머리가 박살이 나 버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자비도 없는 공격.
대회의장에 있는 이들 모두가 이 모습에 마른침을 삼켰다.
“건방진 하북팽가의 애송이가 우리를 가지고 놀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걸 어찌해야 할까? 의견들을 말해 보라.”
무창성의 질문에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잔살조와 같은 꼴이 날 수 있으니 당연했다.
그렇게 다들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어차피 그놈이 삼 일 뒤에 온다니, 그때 그냥 죽여 버리면 되지 않습니까?”
의견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단순한 의견.
하지만 이게 가장 사파다운 모습이긴 하였다.
“팽중호라는 자도 초절정, 위지철이란 자도 초절정이다. 초절정 둘을 죽일 수 있나?”
“함정을 파면되지 않겠습니까?”
“말해 보라.”
“독과 암기 그리고 매복을 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겁니다.”
정도 무인들, 특히나 젊은 정도 무인들은 함정에 매우 취약하다.
그들은 정정당당함만을 보고, 그렇게 자라 왔기에 사파의 비열함을 예상치 못한다.
그들에게 그런 것들은 금기시되는 것이니 말이다.
아무리 초절정이라고 해도 함정에 빠트린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그럼 무당의 위지철은 어떻게 할 건가?”
둘을 죽인다고 한다면, 하북팽가는 제쳐 놓더라도 문제는 무당파의 정협룡이었다.
흑수련이 막 나가는 사도 문파라고 해도, 무당파를 건드릴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는다.
무당파를 건드리는 것은 멍청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것과 같은 짓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팽중호가 정협룡을 이용해서 자신들을 협박하는 것일 테고 말이다.
“확실히 죽인 뒤, 오히려 하북팽가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어떻습니까?”
“뒤집어씌워?”
“예. 이번에 들어온 정보로 듣자 하니, 정협룡이 하북팽가에 감시관으로 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북팽가에서 자신들을 감시하는 정협룡을 죽이기 위해 오히려 저희를 이용했다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그것을 믿겠는가?”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면 되지요. 일단 그들에게 그자와 군자산을 함께 보내 달라 하면 문제없을 겁니다.”
군자산(君子散).
중독되면 내공을 쓸 수 없도록 만드는 산공독 중에서도 가장 효과가 강한 독.
군자산으로 내공만 쓸 수 없게 만든다면, 초절정이라도 손쉽게 막을 수 있을 터였다.
“좋아. 내가 말해 보지. 어차피 그들도 이번에 팽중호를 죽이고, 하북팽가가 망해 버린다면 좋아할 테니까.”
그렇게 흑수련의 회의가 끝이 났고, 무창성은 곧바로 어디론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흑수련의 가장 깊은 곳.
그곳에 무창성이 도착하자, 갑자기 그 공간에 하나의 인영이 갑자기 땅에서 솟아났다.
온몸을 흑의로 감싸고 있는 인영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두 눈뿐이었다.
“무슨 일인가?”
땅에서 솟아난 인영의 목소리는 마치 쇠를 긁는 듯 아주 거칠고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세가에 말해 그 사람을 좀 보내 달라고 해 주시오.”
“그 사람?”
“예. 잘 만하면, 손쉽게 하북팽가를 없애 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았다. 바로 보내 주지.”
대답과 함께 사라지는 인영.
공간에 홀로 남은 무창성.
무창성은 사정없이 얼굴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어쩌다 이 무창성이 그들의 개 노릇을 하게 되었는지. 쯧.”
* * *
하북팽가의 소가주전.
팽중호와 장춘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위 소협 덕분에 전면전은 없겠지만, 분명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럼 대놓고 싹 다 털어먹고 올 수 있겠네.”
“독과 암기는 기본에 또 뭔 짓을 준비해 놨을지 알 수 없으니, 너무 위험합니다.”
“그래도 오라고 초대를 했는데, 안 갈 수가 있나? 크크크.”
흑수련에서 흑상에서 벌어졌던 일을 사과하겠다며, 그것을 보상하고 싶으니 초대를 하겠다고 전해 왔다.
겉으로 보면 순순히 대가를 치르겠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흑수련이 그럴 리가 없는 곳이란 게 문제였다.
그들이라면 분명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뱀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이번 흑수련 행이었기에, 장춘오는 팽중호가 흑수련에 가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팽중호의 무공 실력은 분명 대단하지만, 독과 암기는 아무리 고수라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괜찮아. 어차피 그렇게 함정을 파 놓는 걸 바라고 삼 일 뒤에 간다고 한 거니까.”
팽중호가 잔살조에 삼 일 뒤에 흑수련에 간다고 한 이유는, 그들이 함정을 팔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길게 시간을 주면 그들이 또 다른 술수를 부릴 수 있기에 딱 삼 일이라는 시간을 준 것이었다.
흑수련은 분명 사흘 동안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릴 것이고, 팽중호는 모르는 척 그 함정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흑수련을 찜 쪄 먹을 생각이었고 말이다.
‘위 소협까지 있으니, 명분이란 것도 충분하고 말이야.’
흑수련이 함정을 파 놓은 곳에 위지철과 함께 갈 생각이었는데, 위지철은 그저 함께하는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명분이 되어 줄 터였으니 말이다.
위지철이 함께하고, 거기서 위지철이 위협을 받았는데 과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보다. 그놈들이 왜 공청석유를 노렸는지 알아냈어?”
“예. 돈은 좀 썼지만, 알아냈습니다.”
팽중호는 흑수련이 왜 공청석유를 노린 것인지에 대해 장춘오에게 알아보라 주문했다.
단순히 그들이 그것을 먹기 위해 노렸을 수도 있지만, 경험상 절대로 그건 아니란 감이 왔다.
분명 어딘가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돈이 많이 들어도 좋으니, 흑수련에 대해 알아보라 시킨 것이었다.
“지금 흑수련의 뒤를 봐주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서문세가라고 합니다. 그 공청석유는 서문세가에 흑수련이 가져다 바치기로 한 물건이었고 말입니다.”
“서문세가? 이거, 아주 재밌어지는데.”
서문세가.
쫓아낸 일공자의 외가이자, 팽중호의 전생에서부터 하북팽가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곳.
팽중호는 생각보다 일이 재미있어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너무 쉽게 발을 뺐다 싶었더니, 뒤에서 사파를 조종하고 있었구만.’
일공자 측이 너무나 쉽게 하북팽가를 포기하고 사라졌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흑수련이란 곳이 있었으니 그렇게 쉽게 결정을 한 듯싶었다.
당장에 흑수련을 움직여 자신들을 어떻게 하지는 않겠지만, 분명 언젠가 그들을 이용해서 하북팽가를 집어삼키려 했을 터다.
“한 방에 껄끄러운 가시도 뽑고, 돈도 얻을 수 있겠어. 크크크.”
* * *
흑수련으로 떠나는 길.
팽중호와 위지철, 단 두 사람만 길을 떠났다.
적들이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는 곳에 괜히 인원이 많아지면 오히려 정신없어지니 말이다.
“이번에 가시면, 아마 피 터지게 싸우셔야 할 겁니다.”
“사도 문파를 멸하는 것이라면, 상관없습니다.”
“제가 드린 건 잘 챙기셨죠?”
“예.”
그렇게 이야기를 마쳤을 때, 눈앞에 흑수련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도 문파답게 어디서 돈을 그렇게 긁어모았는지, 일견 보기에 크기만큼은 하북성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보였다.
“웬 놈이냐!”
팽중호와 위지철이 다가가자 대뜸 소리를 지르는 흑수련의 문지기.
여기서 확실히 사도 문파라는 것이 티가 났다.
“웬 놈이 아니고, 하북팽가의 소가주님이랑 정협룡이시다.”
“헛! 드, 들어가십쇼.”
팽중호와 위지철의 정체를 알자 깜짝 놀라더니, 곧바로 문을 여는 문지기.
정말 이런 놈을 문지기로 쓰는 걸 보니, 왜 사도 문파들이 힘을 못 쓰는지 알 것 같았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흑수련 내부로 들어서서 가운데에 나 있는 큰길을 따라서 쭈욱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길의 끝.
그곳에는 흑수련의 수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앞에는 아주 성대한 잔칫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가장 앞서 나와 팽중호와 위지철을 맞이하는 우람한 체구의 중년인.
바로 련주인 잔혈흑수 무창성이었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팽중호가 적당히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허공에서 무창성과 딱 눈이 마주쳤는데, 팽중호는 그 눈을 보고 속으로 확신의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봐도 우릴 죽이려는 눈빛이군.’
무창성은 최대한 살심을 죽였다고 생각했겠지만, 팽중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무창성의 두 눈 깊은 곳에 있는 아주 짙은 살기를 팽중호는 발견해 내었다.
“일단 자리에들 앉으시지요. 저희가 사죄의 의미로 준비한 음식입니다.”
너무나도 뻔한 수작에 팽중호는 하마터면 웃음을 흘릴 뻔하였다.
이건 티가 나도 너무나도 티가 나지 않는가?
“아, 뭘 또 이런걸. 감사합니다.”
팽중호는 일단은 속아 넘어가 주기로 했고, 자리에 앉아 음식을 조금 집어 먹어 보았다.
‘으음. 오랜만에 맛보는 군자산의 맛이군.’
팽중호는 이 음식들에 군자산이 뿌려져 있음을 알아채었다.
군자산은 무색무취의 독이지만, 팽중호는 음식이 몸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내공이 조금씩 흩어지는 것을 보고 알아챈 것이다.
이렇게 곧바로 효과를 내는 산공독은 군자산밖에 없으니 말이다.
‘군자산은 정말 구하기 힘든 건데, 서문세가 쪽에서 구해 줬나 보군.’
군자산은 사천에 있는 또 다른 오대세가이자, 독과 암기에 관해서는 천하에 따를 곳이 없다고 자부하는 사천당가(四川唐家)에서만 만들고 유통하는 것이었다.
군자산은 흑상에도 물건 자체가 거의 등장하지 않을 만큼 사천당가에서 관리를 꽤 철저히 하는 것인데, 흑수련이 군자산을 쓰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서문세가가 구해 준 듯싶었다.
‘거기다가 이 초들은 전부 미혼향을 뿜어대고 있네.’
미혼향(迷魂香).
보통은 음공(陰功)이나, 색공(色功)을 쓰는 이들이 상대를 홀리기 위해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군자산으로 내공이 흩어진 무인들에게도 아주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었는데, 군자산과 미혼향이 만나면 서로의 효과를 배가시키기 때문이었다.
“아, 그리고 그날의 일을 보상하기 위한 금화를 준비했습니다. 가져오라.”
무창성의 말에 어느 무인이 상자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꽤 묵직해 보이는 상자.
그 안에 금화가 들어있다면, 분명 아주 많은 양일 터였다.
“한번 열어서 확인해 보시지요.”
팽중호는 곧바로 상자로 다가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상자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십 개의 작은 비수들.
슈슈슈슈슈슈슈슉-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서 갑자기 쏟아져 나온 비수들을 피할 수는 없을 터.
무창성은 손쉽게 팽중호를 제거했다는 생각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려 하였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지어지기도 전에 다시금 사라졌다.
카카카카카카캉-
“위 소협. 보셨죠? 이놈들이 먼저 공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