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특혜를 드리는 겁니다.
팽중호는 지금 눈앞의 곽채령을 보며 자신의 감이 맞았음에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이건 또 뭐……’
자기가 현물이라니 이게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그러니까, 소저가 현물이라고요?”
“네. 맞아요.”
“춘오야. 이게 무슨 소리일까?”
“뭘 아시면서 물으십니까. 여기에 눌러살겠다는 거 아닙니까.”
“하아…….”
팽중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곽채령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맑고 순수한 표정으로 서 있는 곽채령을 보며 차마 거칠게 말할 수는 없었고, 최대한 절제해서 말을 꺼내었다.
“곽 문주님께, 천년삼만 고맙게 받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아니요. 저는 꼭 여기에 남겠어요.”
“아무나 받을 수는 없는 것인지라…… 죄송합니다.”
“저 꽤 쓸 만하거든요? 나름 무공도 열심히 했고, 얼굴도 반반해서 급할 때 미인계로 써먹거나, 아니면 기루에…….”
열심히 자기의 쓸모에 대해 말을 하는 곽채령.
팽중호는 그 모습에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아이고 두야…….’
딱 보니 그냥 좋게 말해서는 포기하고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좋게는 이제 말씀 못 드리고…… 소저는 크게 쓸모없으니까 그냥 가십쇼. 무공 수준도 솔직히 부족해 보이고, 얼굴은…… 뭐 괜찮은 건 맞는데, 미인계를 쓸 일은 없으니 필요 없습니다.”
결국 팽중호는 확실하게 곽채령에게 쓸모가 없으니 이만 돌아가라 직접적으로 말했다.
어쩌면 상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듣지도 않을 사람이기에 그렇게 했다.
“무공 실력을 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지으시죠? 한 번 보기라도 하고 말씀해 주세요.”
“하…… 좋습니다. 그럼 실력이라도 보여 주시죠. 도수야.”
“예! 주군!!”
팽중호는 곧바로 도수를 불렀다.
직접 실력 차를 느껴 봐야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팽중호의 부름에 재빠르게 달려오는 도수.
“여기 곽 소저랑 대련 좀 해야겠다.”
“예!”
“곽 소저도 불만 없으시죠?”
“물론이죠.”
도수가 도를 뽑아 들었고, 곽 채령은 손을 자연스럽게 늘어트린 자세를 취했는데, 보통 장법을 익힌 무인들이 취하는 자세였다.
‘검문의 자제 아닌가? 장법? 이건 좀 신선하네.’
적검문은 이름부터 검문 아닌가?
이름도 곽채령인걸 보면 분명 곽무조의 딸임이 분명한데 검법이 아니라 장법이라니, 분명 이건 조금 의외이긴 하였다.
“제가 먼저 갈게요.”
“예!”
먼저 움직인 것은 곽채령.
긴 다리만큼 시원한 움직임으로 단숨에 도수와의 거리를 좁혀 왔다.
그리고 그녀의 양 손바닥에 서리는 푸른 기운.
“하앗!”
팡-! 차아아악-
도수가 도로 곽채령의 손바닥을 막았지만,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몸이 뒤로 밀려났다.
지켜보고 있던 팽중호는 꽤 상당한 곽채령의 실력에 조금 놀랐다.
‘저 정도면 그때 그놈보다 훨씬 더 나은데?’
하북지회에서 상대했던 괴사검 곽종구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적검문의 딸이라고 해서 자연스레 곽종구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금 수정해야 할 듯싶었다.
‘그리고 기운도 푸른색이면, 확실히 다르고 말이야.’
곽무조가 보여 주었던 검기의 색은 분명 붉은색.
그런데 지금 곽채령의 양손에 서린 기운은 푸른색이다.
내공 심법 자체가 다르단 소리.
“계속 가욧!”
긴 팔로 시원하게 뻗어지는 곽채령의 장법에 도수는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도수도 팽중호에게 그동안 당한 짬밥이 있었기에, 계속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휘이익- 후웅-
도수가 묵색 도기와 함께 강하게 도를 휘둘러 가까이 붙어 있던 곽채령을 떼어 놓았다.
그리고 시작된 도수의 파상공세.
곽채령을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 깨달은 듯, 지근거리를 내주지 않으면서 쉴 새 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휙- 휘이익- 휘익-
듣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의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는 도수의 공격.
곽채령은 아슬아슬하게 그 공격들을 요리조리 피해 내며, 계속해서 도수의 틈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도수의 도가 아주 잠깐 멈추었을 때.
곽채령이 벼락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앗!”
팡-!
순간적으로 틈이 벌어진 도수의 가슴팍에 정확히 꽂혀 들어간 곽채령의 일장.
“허업.”
도수가 가슴팍에 느껴지는 통증에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대련의 승패가 결정된 것이다.
“어때요? 괜찮죠?”
“……사부가 따로 있으시죠?”
“아, 네. 저는 따로 청화장 사부님께 가르침을 받았어요.”
팽중호는 가만히 곽채령을 바라보았다.
본인이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곽채령은 지금까지 팽중호가 본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재를 가지고 있었다.
‘도수의 공격을 모두 끝까지 보고 난 후에 피해 내고, 그 짧은 사이에 오로지 눈으로만 도수의 틈을 보았다…… 미치겠군.’
곽무조도 곽채령의 무재가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하북에서 손꼽히는 여고수인 청화장(靑華掌) 선조혜에게 보내어 가르침을 받게끔 하였지만, 팽중호가 보기에는 곽채령의 재능은 하북이 아니라, 무림을 상대로 뒤져도 많지 않을 재능이었다.
일류를 넘어선 도수의 공격을 끝까지 눈으로 보고 피하는 것은 최소한 초절정에서 화경의 경지에 다다른 자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을 지금 도수와 비슷해 보이는 수준의 곽채령이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직 개화하지 못했을 뿐, 무공만 받쳐 준다면 분명 만개할 터였다.
‘쓰읍 어쩐다…….’
데리고 키우면 분명 아주 쓸 만할 테지만, 잘못하면 키워서 남 주는 꼴이 날지도 모른다.
곽채령이 쏠랑 적검문으로 돌아가 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니지. 키워서 남 주는 꼴이 나도, 지금은 일단 키우고 보는 게 맞겠지.’
하북팽가가 다시금 일어서기 위해서는 확실히 많은 고수를 데리고 있는 편이 훨씬 좋다.
후에 곽채령이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키워 두면 분명 쓸모가 아주 많을 터였다.
“좋습니다. 저희 식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와아! 감사해요.”
“단, 몇 가지 문서에 서명만 해 주시면 됩니다.”
팽중호는 그래도 최소한의 보호장치를 위해 장춘오에게 말해서 문서 몇 가지를 급하게 작성했다.
뭐, 하북팽가와 팽중호를 떠나면 아주 크나큰 불이익을 받을 것임을 맹세한다는 내용의 문서들이었다.
“다 했어요.”
“아주 좋습니다. 곽 소저.”
“아니죠. 이제 식구가 되었으니까, 채령이라고 불러주세요. 소가주님.”
“……그래. 채령아.”
“헤헷.”
곽채령은 이 문서가 무슨 내용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모두 깔끔하게 서명을 하였고, 장춘오는 그것을 아예 전장으로 가져가 맡겨서 잃어버리지 않도록 할 생각이었다.
이런 문서들은 역시나 보관과 보안이 가장 중요했으니 말이다.
“춘오는 내일 세가 대 연무장으로 남은 세가 무인들 모조리 모이라고 공지하고, 도수는 수련하던 거 계속하고, 채령이는 일단 날 좀 따라오고. 자. 해산!”
“하아. 알겠습니다.”
“예!”
팽중호는 갑작스럽게 곽채령이 합류했지만, 어차피 계획이 달라질 것은 조금도 없었기에 각자에게 할 일을 지시하였다.
본격적으로 이 팽가를 움직이는 것은 내일부터, 오늘은 곽채령에게 무공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했으니까.’
빨리 가르치면, 그만큼 빨리 강해질 것 아닌가?
오늘에야 처음 만나서 급작스럽게 식구가 된 곽채령이지만, 팽중호는 개의치 않고 곧바로 생각해 두었던 무공을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개인 연무장에 마주 선 팽중호와 곽채령.
“앞으로 하북팽가의 소속이니까, 무공도 하북팽가의 무공을 익혀야겠지?”
“네!”
팽중호의 말에 눈을 반짝이며 대답하는 곽채령.
이 눈을 보고 팽중호는 대번에 곽채령이 무공광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실 내가 알고 있는 장법은 하나밖에 없거든…….”
팽중호는 막상 가르치려니 조금 망설임이 생겼다.
그 이유는 지금 가르치려는 장법이 평범한 무공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혼원벽력장이라고, 이거 하나밖에 몰라. 그래서 이걸 너한테 전수해 줄 건데…….”
“!!!”
혼원벽력장(混元霹靂掌).
혼원벽력도를 변형해서 만들어진 장법으로, 혼원벽력도와 다름없는 무공이었다.
그러니까 팽가의 직계들만이 익힐 수 있는 장법이란 소리였다.
그런 것을 지금 오늘 만난 곽채령에게 전수를 해 주려다 보니, 아무리 팽중호라도 망설임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이런 거 아껴서 뭐 하냐. 자 한번 보여 줄게 잘 봐.”
“넵!”
팽중호는 결국 그냥 가르치기로 하였다.
어차피 반쯤 망해 버린 세가에서 뭐 아낄 게 있나 싶어서였다.
혼원벽력도랑 혼원벽력신공만 잘 지키면 될 테니 말이다.
스윽- 펑-! 퍼버버벙!
팽중호의 손바닥이 허공을 때릴 때마다 그와 함께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곽채령은 멍하니 그런 팽중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팽중호의 움직임이 멈췄음에도 곽채령은 계속해서 멍하니 서서 팽중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캬. 재능이 미치긴 미쳤다니까. 이거 원, 재능 부족한 놈은 서러워서 살겠나.”
곽채령은 그저 한 번 본 것으로 지금 무아지경에 빠져 깨달음을 얻고 있는 것이었다.
팽중호가 굳이 책으로 써 주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였다.
곽채령은 눈으로 모든 것을 읽고 기억할 테니 말이다.
“이거…… 제가 배워도 되는 거 맞나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곽채령의 입이 열렸다.
그녀는 팽중호가 보여 준 이 혼원벽력장이 얼마나 대단한 상승의 무공인지 알아본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자신이 배워도 되냐고 되물은 것이었다.
“그래. 단. 어디 가서 막 떠들거나, 배우고 도망치면 쫓아가서 두 팔 다 분질러 놓을 거니까 명심하고.”
“네! 각골명심할게요.”
* * *
다음 날.
하북팽가의 대 연무장.
가장 큰 연무장에 지금 하북팽가에 남은 무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장춘오의 공지에 따라 모든 무인들이 하던 것을 멈추고 모인 것이었다.
모두 모였지만, 백을 넘지 않아 보이는 조촐한 수.
그만큼 다른 공자들의 세력이 어마무시하게 많았다는 소리였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소가주가 된 팽중호입니다.”
팽중호는 대 연무장의 가장 상석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입을 떼기 시작했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을 모이라 한 이유가 있습니다.”
말과 함께 팽중호는 품에서 총 네 권의 서책을 꺼내었는데, 사람들은 도대체 저게 무슨 서책일까 싶어 집중하기 시작했다.
“노호진산도, 철혈갑공, 노호도, 철갑공이라는 무공섭니다.”
“……?”
하북팽가 무인들은 무슨 소리인가 싶은 눈치로 팽중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들이 여러분이 앞으로 죽어라 익힐 무공입니다.”
“……?!”
“……?!”
갑자기 무공서 네 권을 꺼내 들더니, 앞으로 익힐 무공이라니?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싶은 눈치를 보였다.
“도수야. 보여 줘라.”
“예! 주군!”
팽중호의 말에 도수가 사람들 앞에 섰다.
그리고는 곧바로 도를 꺼내 들어 무공 시연을 시작했다.
힘이 넘치는 도수의 무공에 다른 이들의 입이 벌어졌다.
“지금 보여 드린 건 하급 무사분들이 배울 노호도입니다. 자, 다음.”
도수는 다시금 도를 움직였고, 그 위력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고 더 힘이 넘쳐흘렀다.
“이건 상급 무사분들이 배울 노호진산도입니다.”
그렇게 도수의 무공 시연이 끝났고, 하북팽가의 남은 무인들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아직 어안이 벙벙했으니 말이다.
“하급 무사분들은 도수가 직접 가르칠 거고, 상급 무사분들은 제가 직접 가르쳐 드릴 겁니다.”
“정말 저희가 배우는 겁니까?”
그때 한 무사가 소리쳤다.
지금 팽중호가 가르쳐 준다는 무공은 아무리 봐도 허접한 삼류 무공이 아니었다.
그런 무공을 그냥 가르쳐 준다니?
“여러분은 팽가를 버리지 않은 분들이니, 특혜를 드리는 겁니다.”
“아아…… 감사합니다. 소가주님!”
“감사합니다!”
아직 무공을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감사하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고 팽중호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 그전에 당부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중간에 힘들다고 살려 달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물론입니다!”
팽중호의 말에 아주 자신감 넘치게 대답하는 무인들.
그 대답에 팽중호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그럼 다들 뒤질 때까지 수련해 봅시다. 크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