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百章 혈마잠천(血魔潛天) (5)
천원주는 비상 회의를 소집했다. 당주 이상 전원이 참석하는 대회합이다.
모두 긴장한 낯빛으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천원주와 비보전주가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은 무엇인가 긴급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대청으로 들어섰다. 그러다가 천살단주가 단주가 좌정해 있는 것을 보고는 급히 두 손 모아 읍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확인해봐야 할 사항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천원주가 말했다.
“앉으세요.”
천살단주가 자리를 권했다.
천원주는 육 년 전, 비보전을 맡았던 비보전주였지만, 천원주로 승차했다.
비보전주를 사임하고 낙향했다가 일비자의 설득으로 다시 천살단에 몸을 담았다.
비보전주는 일비자다. 비보전주가 천원주가 되자, 그도 더는 사양하지 않고 비보전을 맡았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 천살단주가 비보전주를 보며 물었다.
“천원주를 통해서 보고는 받았는데, 그게 확실해?”
“네. 확실합니다.”
비보전주가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음!”
천살단주가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새겨졌다. 하지만 곧 정색하고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어요. 그동안 숨겨져 있던 혈천방주의 진면목을 알아냈어요.”
“아! 혈천방주!”
“혈도좌랑(血刀剉狼)!”
여기저기서 당주들이 쑥덕거렸다.
혈도좌랑은 혈천방주를 일컫는 별호다. 방주의 손속이 지극히 잔인해서 붙여졌다.
혈천방주는 사람을 온전히 죽이지 않는다. 아예 맹수가 할퀴어 놓은 것처럼 난폭하게 찢어 죽인다.
그가 사용하는 병기가 맹수 이빨을 닮은 낭아도(狼牙刀)이기 때문이다.
당금 무림에서 낭아도를 쓰는 자 중에 혈천방주처럼 손속이 잔인한 자는 누굴까? 도대체 누가 혈천방주가 되었기에 이토록 거침없이 살상을 저지르나.
혈천방주의 진면목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궁금해했다.
“비보전주, 말하세요.”
천살단주가 말했다.
비보전주 일비자가 옷매무새를 고치며 일어섰다.
“저희 십육비자 중 여섯 명이 움직였고, 그 중 육비자와 칠비자가 희생되며 전해온 소식입니다.”
“음!”
“아!”
또 탄식이 흘러나왔다.
십육비자 중 여섯 명이 움직였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두 명이 죽었다…… 거의 본방을 들어갔다가 나온 수준이다.
비보전주가 말했다.
“혈천방주는 육 년 전에 모습을 감춘 살단주 주치균입니다.”
“뭐! 주치균!”
“아니, 그럴 수가! 살단주가 어떻게!”
당주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비보전주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살단주는 지금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습니다. 같은 혈천방도도 방주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 몇 되지 않습니다. 혈천방주는 음문촌까지 끌어들였습니다. 혈마대겁(血魔大劫)에서 살아남은 사자를 주축으로 구혼음소를 수련하는 구전단(口傳團)을 만들었죠. 저의 십육비자는 구전단을 파고들다가 우연히 방주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후후후! 전임 살단주가 혈천방주…… 후후!”
살단주 구절수(九折手) 장계량(張桂良)이 비웃듯이 말했다.
장계량은 천살단 재건 과정에서 새로 영입한 공동파(崆峒派) 고수다. 현임 공동파 장문인의 사형으로, 싸움을 워낙 좋아한 탓에 장문인이 되지 못한 비운의 사내다.
비보전주가 말했다.
“주치균은 무기를 낭아도로 바꿨습니다. 더는 검신의 검법을 쓰지 않습니다.”
“까짓거 죽이면 되지.”
장계량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사실, 주치균은 강한 무인이 아니었다.
무공은 고절했다. 총명했고, 무공에 대한 자질도 높았다.
말할 것도 없이 최상승 기재다. 하지만 무공이 강한 것과 싸움을 잘하는 것은 달랐다.
주치균이 살단을 맡았을 때도 믿음직하지 못했다. 솔직히 전임 살단주 오택골은 믿음직했다. 살단주에게 맡기면 어디든 쓸어버릴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주치균은 그런 믿음을 주지 못했다.
한데, 지금은 혈천방으로 건너가서 혈천방주가 되었다. 병기도 검에서 칼로 바꿨다.
아니, 그동안 혈도좌랑이 보여준 지독한 살겁만 봐도 그가 확실히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혈도좌랑 손에 죽어간 무림 명숙은 무려 백 명이 넘는다.
아마도 그가 창안한 낭아도법을 시험했던 것 같다.
천살단주가 말했다.
“주치균은 매우 무서운 고수예요. 전임 단주님께서 제 자리를 맡길 생각까지 한 기재죠. 마공관 마공을 모두 건네주었고, 천살단 제일비공 암약혼기도 전수했어요. 거기에다가 혈천방에는 방주가 되려면 반드시 혈천삼무를 수련해야 한다는 방규가 있어요. 혈검혈우, 혈심공(血心功), 사령청공. 지금까지 혈천방에서 방주가 나오지 않은 것은 혈천삼무를 수련한 자가 없었기 때문인데…… 그러니 주치균이 혈천삼무도 수련했다고 봐야 합니다.”
“허어!”
누군가가 탄식을 쏟아냈다.
혈마대겁이 벌어졌을 때, 가장 활약한 무공이 암약혼기, 사령청공, 무령환살공이다. 그중 두 가지를 수련했고, 새로운 도법까지 창안한 자라면…… 절대 만만치 않다.
“저…… 잠천(潛天)에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천원주가 신중하게 말했다.
잠천!
무림 제삼세력이다. 천살단, 혈천방, 그리고 잠천.
하지만 잠천은 무림에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 여부조차도 불확실하다. 그런데 지금 천원주가 잠천을 입에 담았다.
“아니. 아직은 일러요. 혈천방이 사마 제련 같은 악수를 두지 않는 한 잠천은 개입하지 않아요.”
천살단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잠천도 이미 혈천방을 주시하고 있을 겁니다. 만약에 주치균이 혈마 제련에 손을 대면…… 죽음에 손댄 것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비보전주가 천원주를 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천원주나 비보전주는 잠천에 대해서 잘 아는 듯한데, 정말 잠천이 있기는 한 거요? 정말로 잠천이 혈천방 혈천방주도 죽일 정도로 강력한 거요?”
살단주가 말했다.
공동파는 혈마대겁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호발귀를 비롯해 혈마들의 무공을 보지 못했다.
소문으로 혈마의 가공함을 듣긴 했다. 하지만 흘러 다니는 이야기라는 것들이 끝없이 과장되어서 거의 무신(武神)을 묘사하는 말들이지 않나.
듣기 거북한 말들뿐이다.
살단주뿐만이 아니다. 거의 모든 젊은 무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직접 혈마를 경험한 천원주나 비보전주, 약전주, 정천각주, 세작전주 등은 입가에 잔잔한 웃음만 띤다.
그것도 잠천이 적이 아니기에 웃을 수 있다. 그들을 적으로 돌려세웠다면 절대 웃지 못했을 것이다.
“살단주,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삼 무림 잠천이 나서면 저희 천살단이나 혈천방은 한순간에 녹아버립니다.”
“뭐요!”
살단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천원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전임 단주님에겐 일초지적도 안 됩니다. 하지만 전임 단주님…… 잠천주 앞에 서지도 못합니다.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검벽주 임명강이 말했다.
“그, 그게……”
살단주가 말을 더듬거렸다.
혈마를 겪어본 자들이 하는 말이다. 더욱이 천살단주조차도 부인하지 않는다.
혈마잠천! 그들이 그렇게 강한가!
천원주는 늘 신중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도 단호하게 말한다.
“잠천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들은 무림에 간여하지 않아요. 하지만 혈마에 관계된 일이 벌어진다면 그 즉시 나타날 거예요. 그리고 천원주님이 말한 대로 녹여버리겠죠?”
“그럴 겁니다.”
천원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자! 그럼 우리 할 일을 하죠. 주치균은 우리 천살단에 대해서 환히 알아요. 그러니 이제부터 주치균이 모르는 천살단을 만들어야 해요. 지금부터 좋은 안건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회의는 길어졌다. 상당히 길어질 수밖에 없다. 혈천방주가 주치균으로 확인된 이상, 그에 맞서기 위해서는 천살단도 또 한 번 탈태환골(奪胎換骨)해야 한다.
“잠천에…… 정말 알리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천원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아이 많이 속상할 거야.”
천원주는 등여산을 떠올렸다.
“속상하겠죠. 그렇게 친하게 지냈는데.”
“알리지 마. 괜히 하루라도 속을 더 끓일 필요는 없으니까. 대신 비보전이 더 바짝 신경 쓰고.”
“그건 이미 조처해놨습니다.”
천원주가 고개를 숙였다.
* * *
당홍이 아미산에서 사부의 인피를 갖고 온 후에도 갖고 온 후, 호발귀는 전격적으로 잠적을 결정했다.
- 모두 어느 정도는 혈기를 다스릴 수 있으니 잠적을 강요할 수는 없고, 그래서 본인들 자유의사에 맡기려고. 지금 상태로도 조심해서 살면 괜찮을 거야.
물론 떨어져 나간 혈마는 없다. 모두 호발귀의 뜻에 따라서 잠적을 선택했다.
혈기를 어느 정도 다스린다고는 해도 역시 언제 혈마가 될지 모른다.
호발귀조차 혈마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못하는데 다른 혈마야 오죽하겠나.
혈마는 잠을 잘 때도 혈기에 시달린다. 잠자는 동안에 심등이 꺼질까 봐 노심초사한다.
등여산은 천살단주에게 서신 한 통을 남겼다.
혈마에 관계된 일이 아니면 무림에 나서지 않겠다. 하지만 누군가 다시 사마를 제련한다면 즉시 소멸시키겠다.
인의에 벗어난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혈마잠천(血魔潛天)의 시작이다.
호발귀는 잠적한 지 사 년이 지났어도 아이를 갖지 않았다.
도천패와 당홍도 마찬가지다. 부부 금술은 매우 좋지만, 아이는 낳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아이를 낳을 수가 없다.
혈기에서 벗어나 혈마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후세를 가질 수 있다.
불안은 여전하다.
스슷! 스스슷!
귀검은 혈마자심을 수련했다.
현재, 귀검의 무공은 혈마잠천 열두 명 중 최하다. 지옥유부검 최후 절초가 가장 밑에 있다. 귀무살조차도 귀검의 혈마자심쯤은 간단히 피해낸다.
그런데도 귀검은 여전히 혈마자심을 수련한다.
“귀무령님, 인제 그만 혈기를 쓰시죠? 이것도 괜찮은데. 지금 상태는 상당히 안정적이고. 웬만해서는 혈마가 되지 않아요. 써도 괜찮을 것 같은데.”
“착심, 오랜만에 검 한번 들어봐라. 얼마나 늘었는지 보자.”
“아! 그만두겠습니다. 혈기로 진기를 누르지 않고는 혈마자심을 당할 수 없어요.”
착심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주군은?”
“동굴에 계시죠.”
“또?”
“네.”
“이번엔 뭐야?”
“양쪽에서 혈기를 격타하는 거요. 그래서 주모님 두 분이 같이 들어가셨어요.”
“양쪽에서? 이건 또 새로운 방법인데?”
“사람 몸에 임맥과 독맥이 있듯이 운용법이 다른 두 종류의 혈기가 전면과 후면을 들이칠 때 음양의 순환을 일으키면 어떨까? 이령귀화와 역천금령공의 순환처럼. 이걸 한번 시험해보고 싶으시다고 하시네요.”
“음!”
귀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한 명의 혈마는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다. 호발귀가 말하는 심등을 확실히 붙잡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되자 이번에는 혈기가 몸에서 떠나지 않았다. 잠을 잘 때도, 눈을 떴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측간이 있을 때도……
계속 혈기가 몸 전체를 휘돈다. 한순간만 방심하면 생기를 끊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난다. 그때마다 다시 자신만의 심등을 부여잡는다.
너무도 고통스러운 삶이다.
하지만 이 고통을 제어할 방법이 있을 것 같다.
호발귀가 드디어 혈기의 운용법을 찾아냈다.
무작정 혈기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혈기를 진기처럼 휘둘리는 것이다.
생기는 근본적으로 몸 안과 몸 밖의 경계가 없다. 하지만 엄연히 몸이라는 통 속에 일정한 분량이 갇히게 된다. 그 분량만큼 휘돌리는 것이다.
얼핏 보면 진기와 흡사하지만, 경락이 없다는 점에서 새로운 운용법이다.
지금 동굴에서 펼치고자 하는 음양 순환도 새로 발견한 운용법으로 시험할 것이다.
그렇다. 호발귀는 생기의 경략을 찾아가는 중이다. 인체의 경락처럼 생기의 경락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때는 혈기도 진기처럼 휘둘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어쩌면…… 혈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사방이 꽉 막힌 작은 협곡에도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
“후우!”
귀검은 검을 내려놓으며 땀을 닦았다.
그때가 되면…… 자신도 혈마자심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 대미(大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