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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499화 (499/500)

第百章 혈마잠천(血魔潛天) (4)

- 이년 후, 사천성 아미산.

쒜에에엑! 쒜에엑!

한 사람이 아미산 청수곡(淸水谷)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비쾌하게 이리저리 신형을 날리며 골짜기를 누볐다.

탁! 탁!

가끔 돌멩이로 바위를 두들기는 행동도 반복했다.

청수곡 계곡에서 무엇인가를 찾는 모습이다.

“여기 어디 있을 텐데.”

노인이 중얼거렸다.

그때, 하늘에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반섬을 찾는 거야?”

“응?”

노인, 천기수사는 고개를 번쩍 쳐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계곡 위, 나무 위에 편안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여인이 보였다.

‘당홍?’

천기수사는 당홍을 보자마자 즉시 사방을 휘둘러 봤다.

당홍이 혼자 왔을 리 없다. 혈마는 혼자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면 또 다른 자들이 있다.

기척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혈마는 사람을 찾아도, 사람은 혈마를 찾지 못한다.

“후후! 그렇게 조심했는데. 노부가 걸려든 건가?”

천기수사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두 손을 쭉 늘어뜨리며 말했다.

“투심문 문주 어디 있어?”

“훗! 후후!”

당홍의 물음에 천기수사는 웃기만 했다.

“나 독의의 손녀야. 당홍. 이름은 당홍이라고 해. 독에 대해서는 할머니만큼 잘 알아. 알다시피 혈마고.”

“기왕이면 호발귀하고 얘기하고 싶은데.”

천기수사가 차분히 말했다.

“호발귀는 여기 없어.”

당홍이 태연히 말했다.

“당신이 워낙 여우 같아야 말이지. 그래서 생각하다 못해 뿔뿔이 흩어지기로 했어. 우리 열두 명이잖아. 우리가 투심문 보고를 막는 사이에 한 군데를 더 털었더라고? 그래서 나머지는 모두 틀어막기로 했어. 털리지 않은 데가 여덟 곳, 반섬 서식지가 취운산까지 네 곳. 딱 열두 곳이야. 호발귀는 지금 복건성 수석산에 있어. 너무 멀지? 여긴 나 혼자야.”

당홍이 차분히 말했다.

“후후후! 혼자 다니다니. 이제는 혈마가 되는 것도 두렵지 않은가 보지?”

“그건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니고.”

“후후후! 방금 실수했어. 혈마가 하나라면 나도 어떻게 해볼 수 있겠는데?”

천기수사는 말을 하는 중에도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당홍이 혼자라고 말했지만,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믿어. 나 혼자야. 그리고 우리 이제 혈기를 약간은 통제할 수 있어. 이게 진기나 마찬가지더라고. 세상에 널려 있는 기운 중에는 좋은 기운도 있지만 나쁜 기운도 있거든. 그런데 사람은 좋은 기운, 나쁜 기운 선별해서 받아들일 수가 없단 말이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좋은 기운은 빠져나가고 나쁜 기운은 쌓이고. 그게 혈기가 되고. 그렇게 쌓인 기운이라면 또 풀어낼 수도 있는 거지. 풀어내는 방법, 우리 찾아냈어. 그러니 이렇게 흩어져 있는 거지. 안 믿겨?”

당홍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녀의 안색은 매우 편해 보였다.

천기수사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일렁거렸다. 평생을 생기를 연구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지 않나.

“혈마는 생기를 각기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인다고 들었다. 그러면 혈기를 푸는 방법도 각기 다른가?”

당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발귀는 조견, 심등이 보인다고 해. 빛이 보여. 호발귀는 원래 생기를 빛으로 봤어. 푸른 빛. 혈마가 되면 푸른 빛을 꺼뜨리기 위해 악을 썼지. 그러다 보니 탈출구도 빚으로 나타난 거야. 호발귀는 그걸 조견 심등이라고 불러. 빛으로 혈기를 비추는 거지.”

“다른 사람은?”

“책사는 기분이 나빠져. 감정이지. 감정의 변화…… 그래서 책사가 찾아낸 것은 끈이야. 감정의 끈 하나를 꼭 붙잡고 버티는 거야. 혈기가 치밀어도 끈만은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 이 생각만 하다 보면 혈기를 버텨내. 홀리는 두 발이 땅에 찰싹 달라붙어. 땅이 두 발을 끌어당겨. 그렇다면 아예 의자에 앉아버리자 이렇게 생각을 했어. 그래서 의자에 앉았지. 생기가 홀리를 튕겨낼 때, 홀리는 의자와 함께 튕겨 나가. 의자에 앉아있는 상태만큼은 유지하려고 노력해. 모두가 일심(一心)이야. 일심으로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어. 그러다 보니 어떻게 되네.”

휘릭!

당홍이 신형을 날려 천기수사 앞에 섰다.

“당신, 정말 치사해. 그렇지?”

“후후! 뭐가 그렇게 치사할까?”

“말 몇 마디 나누는 사이에 도대체 환혼몽을 몇 번이나 터뜨리는 거야? 내가 독의의 손녀라는 거, 잊었어? 환혼몽은 이제 안 통해. 나한테도, 호발귀에게도. 다른 사람 모두에게도.”

“음!”

천기수사가 침음했다.

사실이 그랬다. 당홍이 말하는 중에 환혼몽을 은근히 살포했다.

한데 너무 멀쩡하다.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피독단이나 해약을 복용한 것 같지도 않은데.

당홍이 말했다.

“투심문주가 어딨는지 말해. 어차피 내게 걸린 이상 말할 수밖에 없어. 이 말도 믿어. 말할 수밖에 없어.”

“노부의 운이 다했군. 후후!”

천기수사가 웃었다.

당홍의 말을 십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당홍이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봐도 주위에 혈마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당홍 혼자서 아미산 청수곡을 지키고 있었다면, 당홍의 말이 맞을 것이다.

천기수사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봤다.

혈마에 장악하고자 했다.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혈마는 모르지만, 사람을 통제하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생기 속으로 파고드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아니, 그 방법을 찾았다고 해도 선뜻 혈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혈마가 되면 두 번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니 방법을 찾기 전에는 혈마가 되지 못한다.

이 생각이 잘못된 것인가? 혈기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혈마가 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흐흐!”

천기수사가 처연하게 웃었다.

자신은 지금도 혈마를 연구하고 있다. 그래서 반섬을 찾아왔다.

혈마를 생포하지는 못했지만, 혈기의 끄트머리는 잡았다. 사마를 계속 연구하면서 혈기까지 끌어내 볼 생각이다.

그런데 혈마와 마주쳤다. 어떻게 할까? 자신에게는 사령천공이 있다. 하지만 당홍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홍은 혈마가 된 후에도 계속해서 공격할 것이다.

싸움이 안된다. 혈마가 된 당홍은 그야말로 무적이다.

한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끝났군.’

천기수사는 눈을 감았다.

조용히 심맥을 끊는다. 심장 박동을 정지시킨다. 사로잡히느니 차라리 죽자.

투욱!

진기를 끌어서 당문혈(當門穴)을 쳤다.

당문혈은 혈혈(血穴)이라고도 불린다.

흉부의 심구(心口), 점혈 되면 심장이 타격 되고, 피를 토하면서 죽는다. 그런데,

“어?”

천기수사는 너무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진기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진기가 당문혈을 치지 못했다.

“그러지 말라니까. 내가 몇 번을 얘기해. 나 독의의 손녀야. 독활칠수를 이미 십 성 수련했다고. 진기 휘둘리는 모습이 안 보일 것 같아? 다 보여. 왜 이렇게 하지 말라는 데도 포기를 못 할까? 더 확실히 알려줘?”

투툭!

천기수사는 자신도 모르게 두 무릎을 털썩 꿇었다.

갑자기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두 무릎이 저절로 굽혀졌다. 당홍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둑!

두 손도 등 뒤로 돌려졌다.

자신이 한 것이 아니다. 어깨뼈에 강한 압력이 밀려오면서 두 손이 저절로 꺾였다.

“으!”

천기수사는 혀를 깨물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하지 못했다. 갓 부화한 새끼 새처럼 입이 쩍 벌어졌다. 그리고 닫히지 않았다.

‘진기를!’

당홍은 이미 혈기격타를 펼칠 수 있다. 손도 대지 않고 타인의 진기를 조정한다.

자신이 일으킨 진기가 무릎 양쪽에 있는 내슬안(內膝眼)과 외슬안(外膝眼)을 쳤다.

당홍이 손을 쓴 것이 아니다. 자신의 진기를 조정해서 자해하게 했다.

슬안에 타격을 받으니 무릎이 꺾일 수밖에 없다.

어깨에 있는 중부혈(中府穴)을 때린 것도 자신이다. 자신이 자신의 혈을 쳐서 두 팔을 뒤로 꺾었다.

입 주변 협거혈(頰車穴)과 대영혈(大迎穴)도 자신이 막았다.

“으……!”

천기수사가 신음했다.

당홍은 일절 경계심을 일으키지 않고 너무도 태연히 걸어와 천기수사 앞에 섰다.

“당신, 호발귀에게 가면 뼈도 못 추려. 호발귀, 진짜 무서워졌거든. 투심문주 어딨어? 인제 그만 돌려줘. 사부를 돌려주지 않고는 견딜 재간이 없어.”

“어어! 어어……!”

천기수사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그러자 진기가 움직였다. 진기의 움직임이 천기수사에게 감지되었다.

투툭! 툭!

협거혈과 대영혈이 풀렸다.

천기수사의 입은 금방 자유를 얻었다.

“날 풀어주면 어디 있는지 알려주지.”

천기수사가 포기한 듯 말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놓아달라는 말이 나와? 당신도 참! 그래 놓아줄게. 투심문주 어딨어?”

“그 약속……”

“지켜. 반드시. 할머니 독의의 이름을 걸고 지켜줄게. 투심문주가 어디 있는지만 말하면 바로 놓아줄게.”

천기수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당홍을 쳐다봤다.

당홍의 진의를 탐색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칼자루는 당홍이 쥐고 있다. 어떤 제안을 해도 지키고 지키지 않고는 당홍에게 달렸다.

자신이 더 압박할 수단이…… 없다. 환혼몽도 통하지 않는 혈마를 무슨 수로 압박하나.

“후후! 선택의 여지가 없군. 내 품.”

“뭐라고?”

“내 품. 투심문주, 내 품 안에 있다.”

순간, 당홍은 불길한 예감이 와락 치밀었다.

사람이 품 안에 들어갈 수는 없다. 도대체 천기수사는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당홍은 급히 천기수사의 품을 뒤졌다.

거죽 한 장이 나왔다. 살 거죽…… 인피(人皮)다.

인피에는 투심문 십대보고로 추정되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투심문주, 취운산에서 죽었다. 진작 죽었어.”

“시신은?”

“소각했다. 이제 약속을 지켜.”

당홍은 인피를 들고 덜덜 떨었다.

그녀의 손에 들고 있는 인피가…… 호발귀, 도천패가 몸담고 있던 투심문 문주의 거죽이다.

투심문은 십대보고의 위치를 구전으로 전수한다.

도천패가 십대보고를 공개하기 전까지 보고의 위치는 도천패만 알고 있었다.

호발귀도 보고의 위치를 알지 못했다. 도천패가 죽으면 보고도 영원히 사장되는 위험이 있지만,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보고를 지켜왔다.

그런데 투심문주가 자신의 등가죽에 보고의 위치를 그려 넣었다.

저간의 과정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천기수사는 고문이나 협박으로는 보고의 위치를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약물이다.

약물로 정신을 혼미케 하고 비몽사몽 간에 그려 넣게 했다.

당홍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일을 어떻게 호발귀와 도천패에게 말하나. 어떻게 인피를 전하나. 왜 하필 천기수사가 아미산 청수곡으로 와서는……

차라리 호발귀가 있는 수석산으로 갈 것이지.

인피를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약속을 지켜라.”

천기수사가 너무도 얄밉게 말했다.

이 순간, 당홍은 극심한 살의를 느꼈다.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입 밖에 낸 말을 번복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단숨에 천기수사를 쳐죽일 생각이 들었다.

파팟!

당홍의 눈에 혈광이 감돌았다.

그녀가 혈기를 일으켰다. 암울하면서도 섬뜩한 광기가 천기수사에게 전해졌다.

“야, 약속을……”

천기수사가 두 눈을 질끔 감으면서 말했다.

그때, 당홍이 뜻밖의 말을 했다.

“살려줄게. 가봐.”

투둑! 툭!

천기수사는 자신의 진기가 중부혈로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곧 슬안도 타격했다.

손과 발에 자유가 찾아왔다.

스읏!

천기수사는 조용히 일어섰다.

“나중에 보자. 반드시 너희를 제압할 수법…… 찾겠다. 생기, 반드시 손에 넣겠다.”

천기수사는 마지막까지 악담을 쏟아냈다.

“아니. 당신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어.”

당홍은 멀어져 가는 천기수사를 보면서 싸늘한 한광을 쏟아냈다.

그녀는 천기수사의 몸에 역혈대법(逆血大法)을 걸었다.

호발귀는 혈마에게 혈마록 무공을 모두 공개했다. 자신이 역천금령공과 이령귀화 덕분에 혈기에서 빠져나왔으니, 다른 사람도 혈마록 무공 속에서 활로를 찾으라는 의미였다.

당홍은 역천금령공에 재미를 붙였다.

역혈(逆血), 이것은 독문(毒門)이 추구하는 최상의 고문 수법이다.

앞으로 천기수사는 하루에 한 번씩 피가 거꾸로 뒤집히는 듯한 고통을 맛볼 것이다. 심장이 멈추는 충격, 폐에 물이 차는 고통,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 늑대 무리에게 살을 물어뜯기는……

역혈대법은 인간이 인간에게 내리는 최대의 형벌이다.

이 저주를 풀어내는 방법은 없다. 결국, 천기수사는 폐인이 된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역혈의 고통을 참을 수가 없다.

“이제 가야겠네. 아! 어떻게 말해. 이걸.”

당홍은 인피를 소중하게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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