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九章 해구부우(解救俘友) (5)
사마 제련 장소는 동굴이다. 동굴을 뒤지면 사마를 제련한 석실이 발견될 것이다.
제련에 사용되었던 온갖 물품도 쏟아져 나올 것으로 생각된다.
동굴에 흩어져 있는 약재를 모아서 분석하면 어떤 방식으로 제련할 수 있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혈마는 동굴에 가둬 놓지 않았어요.”
등여산이 확신하며 말했다.
그녀가 오랜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천기수사는 혈마를 동굴에 가둬두는 우(愚)를 저지르지 않는다.
동굴을 개방하면 혈마는 반드시 습격해 온다. 그래서 환혼몽을 살포해놨는데…… 혹여 환혼몽을 뚫는 자가 생긴다면 괜히 혈마만 빼앗길 수 있다.
조심성 많은 자가 그런 우려를 놓치겠나.
천기수사는 만에 하나 있을 우려까지 철저히 제거한 후에 움직인다. 오랜 시간 동안 몸에 밴 습성이다.
그러니 혈마는 분명히 다른 장소에 숨겨 놓았다.
스스스!
호발귀는 천기수사를 쫓아갔다.
천기수사는 동굴 쪽으로 달려가는 듯하다가 입구가 가까워지자 갑자기 옆으로 방향을 꺾었다.
등여산의 예측대로다.
천기수사는 덤불 숲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호발귀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여유 있게 천천히 쫓아 들어갔다.
천기수사가 혈권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결코 놓치는 일이 없다.
아니, 여괴나 판수가 혈권 안에만 있으면 어디든 쫓아갈 수 있다.
눈으로 보면서 쫓아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천기수사는 덤불 속으로 들어간 후에도 여전히 사령천공을 펼치고 있다.
조심성이 대단하다.
하지만 아직도 여괴와 판수 몸에서 혈기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다. 혈마를 모르기 때문에 일으키는 실수다.
스읏!
호발귀는 천천히 혈기를 쫓아갔다.
* * *
주치균은 호발귀의 뒤를 쫓았다.
혈마 뒤는 아무도 쫓지 못한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실제로 주치균이 쫓고 있지만, 호발귀는 눈치 못 채고 있다. 주치균이 암약혼기를 사용하고 있어서다.
암약혼기는 진기 소모가 대단히 강하다.
자신은 기껏해야 일다경에서 이다경 밖에 펼치지 못한다. 아마 단주라면 반 시진 정도는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다경에서 이다경…… 그 정도면 충분하다.
목적지는 멀리 않다. 취운산 절곡을 몇 굽이만 돌면 되기 때문에 아마도 곧 도착할 것이다.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았어.’
단주와 자신은 동굴을 뒤지다가 괜히 환혼몽에 당하기만 했다. 이렇게 동굴 안에는 숨겨 놓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괜찮다. 상황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호발귀가 천기수사를 뒤쫓고 있다는 것은 조만간 천기수사와 부딪힌다는 뜻이지 않나.
천기수사는 호발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누가 이기고 지든 상관없다.
두 사람이 격돌할 때 혈마 중 하나를 빼내기만 하면 된다.
혈마가 넷이나 있으니 그중에 하나를 빼낸다.
주치균은 조용히 뒤따랐다.
그런데…… 주치균은 갑자기 묘한 느낌을 받았다. 손끝이 자르르 저려 울리는 느낌이다.
“웃!”
주치균은 즉시 뒤로 물러섰다.
저린 현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뒤로 물러섰는데도 손끝에 남아 있다.
‘이건 틀림없이 환혼몽이야!’
천기수사는 정말로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보다도 조심스럽다.
아무도 뒤따르는 자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환혼몽을 뿌려서 뒤를 막았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호발귀가 환혼몽을 유유히 헤치고 나갔다는 것이다. 천기수사가 호발귀를 유독 꺼린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호발귀는 만독불침이다. 어떠한 독도 모조리 튕겨낸다. 아니면 소화를 시켜버린다.
호발귀가 독의의 독활칠수를 수련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독활칠수를 펼치면 독기를 빨아들이기도 하고 내뱉기도 한다.
옛날, 혈천방 귀문인 위도에서 독활칠수로 섬 전체에 퍼진 독기를 막아낸 적이 있다.
‘정말 어떻게 무너뜨려야 할지 모를 놈이야. 지금은 확실히 너를 무너뜨리지 못해. 하지만 살다 보면 기회가 있겠지. 반드시 내게도 기회가 올 거야’
주치균은 환혼몽을 피해서 즉시 옆으로 휘둘았다.
호발귀가 달려가는 방향을 짐작한다. 돌아가면 직접 쫓는 것보다는 못하지만…… 환혼몽을 뚫고 갈 수는 없다.
자신이 환혼몽 전조 증상을 느낀 것은 아마도 무령환살공을 수련해서가 아닌가 싶다.
무령환살공은 세상의 모든 기운에 상당히 민감하다.
비록 마공이긴 하지만 전신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려서 나비 날갯짓도 느끼게 해준다.
무령환살공은 수련하다가 본인 스스로 예민함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린 자도 다수다.
그만큼 무령환살공은 원하든 원치 않던 모든 감각을 끌어낸다.
그런 공부를 수련한 적이 있어서 환혼몽의 전조를 느낀 것 같다.
쓱!
주치균은 빠르게 움직였다.
* * *
“하아!”
천기수사는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드디어 목적지에 왔다. 세상에서 최고로 안전한 장소…… 비밀동굴에 도착할 때까지 뒤따르는 기척은 일절 없었다.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서.’
휘릭!
천기수사는 동굴 부위에 환혼몽을 뿌렸다.
작은 동굴 앞에 하얀 분말이 흩뿌려진다.
그제야 천기수사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괴와 판수를 놓고는 다시 뒤돌아섰다.
스읏!
그가 동굴 벽을 쓰다듬자, 그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석문이 서서히 닫혔다.
동굴 입구만 막으면 천하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된다.
우습게도 이곳은 투심문의 은신처다.
투심문은 십대보고 근처에 어떤 추격도 피할 수 있는 은신처를 마련해 놓았다.
보물을 놓고 나오다가 발각될 때를 대비해서다.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그가 투심문 문주를 다그친 끝에 직접 알아낸 장소다.
‘됐어. 이제는…… 후후!’
천기수사는 만족한 듯 웃으면서 뒤돌아섰다. 그때,
그르르르! 쿵!
서서히 닫히던 석문이 갑자기 멈췄다. 끝까지 닫히지 않고 중간에서 멈춰버렸다.
“엇!”
천기수사는 즉시 뭔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석문이 중간에서 멈출 리 있나. 한두 번 들락거린 곳도 아닌데. 남이 만든 동굴이지만 벌써 익숙해져 있는데. 석문은 절대로 걸리지 않는다.
몇 번이고 확인해봤다.
쒸이이잇!
천기수사는 석문이 왜 닫히지 않았는지 확인해보지도 않았다. 이상을 느낀 즉시 전력을 다해서 동굴 안으로 쏘아 들어갔다.
투심문은 은신처마다 적어도 이십 개 이상의 비밀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덕분에 조금만 들어가도 바로 미로가 된다. 투심문주와 함께 동굴을 탐사하면서 몇 번이고 감탄했던 곳이다.
운이 좋은 것은 자신이 동굴 미로를 환히 꿰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자는 자신처럼 잘 알지 못한다. 설혹 투심문 후인이 찾아와도 마찬가지다. 맞다.
호발귀나 도천패가 왔다면 투심문 후예가 온 것이 맞다. 하지만 그들도 이곳은 초행이다.
자신처럼 동굴을 환히 꿰뚫어 보지 못한다.
스슷! 스스슷!
천기수사는 동굴 안으로 쏘아 들어갔다.
중간에 여괴와 판수가 쓰러져 있다. 자신이 동굴 문을 닫기 위해서 놓고 간 자리에 얌전히 눕혀져 있다.
천기수사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석문이 중간에서 걸렸다. 그러면 누군가가 바로 쳐들어온다. 한시도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지금은 혈마 따위에게 신경 쓸 계제가 아니다. 자칫하면 목숨이 위험하다.
쒜에에엑! 쒜에엑!
그는 혈마 두 명을 버려둔 채 동굴 안으로 쏘아 들어갔다.
‘괜한 욕심을 부려서…… 둘만 가지고 튀는 건데. 둘만 가져도 사실 충분했는데.’
천기수사는 자책했다. 하지만 자책은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 당장은 목숨을 구하는 게 급선무다.
쒜에에엑! 쒜에엑!
천기수사는 그야말로 전력을 다했다.
물론 사령천공을 펼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생기를 죽여야 한다. 혈마가 쫓아오고 있다면 생기를 죽이는 것이 급선무다.
또 달리는 도중에 입고 있던 옷도 벗어 던졌다.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조차도 혈마의 귀를 간질일 수가 있다.
모든 소리를 다 죽이고 초상비(草上飛)를 펼쳤다.
풀잎 위를 스치듯이 밟는다. 동굴바닥을 발바닥 앞부리만 이용해서 힘있게 밀어낸다.
일절 소리를 흘리지 않고 뛰어간다.
동굴을 두 굽이나 돌아섰다. 그러자 눈앞에 동굴 다섯 개가 나란히 나타났다.
천기수사는 그중에서 가장 오른쪽 동굴로 파고들었다.
‘살아있다!’
여괴와 판수가 살아있다.
환혼몽에 중독된 상태이지만 목숨은 붙어있다.
이 사람들의 혈기를 일으킨 후 다시 혈기를 밀어내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혈마가 혈기를 일으키면 몸 안에 있던 불순물은 모두 밖으로 밀려 나간다.
물론 혈기 자체가 불순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순수한 우주의 정화라고도 할 수 있다.
우주의 정화 중에서 어두운 면일 뿐이다. 맑고 깨끗한 기운이다.
그 기운으로 독기를 쳐낸다. 그 후 다시 혈기를 밀어낸 후 밝은 면으로 돌려세운다.
‘안심해도 돼.’
호발귀는 두 사람을 놓아두고 안으로 쏘아 들어갔다.
천기수사가 사령청공을 펼치고 있어서 뒤쫓기가 힘들다.
하지만 호발귀는 이미 사령천공의 약점을 파악해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꼬투리를 잡고 쫓아간다.
사령천공 역시 인간이 펼치는 무공이다.
숨을 쉬지 않는 인간은 존재하지 못하듯이 사령천공이나 암약혼기, 무령환살공 같은 공부는 생기를 감추는 척 속이는 무공일 뿐 진짜로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호발귀는 사령청공이 남긴 여진을 파악해냈다.
‘좌우지간 판단력 하나는…… 여괴와 판수를 놓고 간 것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는 건데. 사실 확인도 해보지 않고 혈마조차 놓고 도주한다? 천기수사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야.’
호발귀는 사령청공이 남긴 흔적을 쫓아서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쒜에에엑! 쒜에엑!
한참을 치닫던 천기수사 앞에 동굴 세 개가 다시 입을 쩍 벌린 채 나타났다.
이번에는 볼 것도 없이 왼쪽으로 들어갔다.
중간이나 오른쪽 길도 완전한 길이다.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방향은 완전히 다르다. 세 동굴의 출구는 각기 십 리 이상 떨어져 있다.
해자수와 궁충은 왼쪽 동굴에 숨겨 놓았다.
여괴와 판수를 잃었지만 감춰놓은 혈마 마저 잃을 수는 없다.
‘제발!’
천기수사는 왼쪽 동굴로 들어서기 무섭게 하늘에 비는 심정으로 기관장치를 눌렀다.
구구구구구! 구구궁!
천장 위에서 석문 세 개가 동시에 내려오기 시작했다.
석문이 닫히면 동굴 안과 밖은 완전히 분리된다. 어느 쪽으로 갔는지 알 길도 없지만, 안다고 해도 쫓아오지 못한다. 석문은 오직 안쪽에서만 열 수 있다.
석문만 내려오면…… 해자수와 궁충을 데리고 유유히 취운산을 빠져나간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정말이다. 이제는 절대로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구구궁!
석문이 내려온다.
이 석문은 한 번 닫히면 밖에서는 절대로 열지 못한다. 오직 안에서만 열 수 있다.
동굴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투심문이 만든 모든 동굴은 같은 형태를 띈다.
석문 너머의 동굴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결국, 석문을 부순 후, 세 동굴을 모두 뒤져야 한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천기수사는 이미 사라진 후일 것이다.
꽈앙!
호발귀는 달리는 와중에 석벽을 후려쳐서 돌무더기를 뜯어냈다.
다행히 석벽 중 일부가 무딘 곳이 있어서 어린아이에 머리통만 한 바위가 굴러떨어졌다.
‘됐어!’
호발귀는 작은 돌덩이를 집어서 냅다 석문 밑을 향해 던졌다.
꽝! 꽈앙!
돌덩이는 내리꽂히는 석문과 바닥 사이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석문이 멈췄다. 가운데 석문이 멈추자 좌·우측에서 내리던 석문도 작동을 멈췄다.
“하아!‘
호발귀는 안도의 한숨을 쏟아냈다. 하지만 신형은 여전히 사령청공이 남긴 여진을 쫓아서 왼쪽 석문을 향해 쏘아가고 있었다.
구르르르르! 구구궁!
석문이 거의 닫혔다.
“됐네. 휴우!”
천기수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구궁! 쿵!
밑으로 내려오던 석문이 우뚝 멈춰 섰다. 완전히 바닥에 닿지 않았다. 무릎 정도 높이에서 딱 멈췄다.
“어어…… 벌써…… 안돼!”
천기수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다.
쒜에에엑! 쒜에엑!
달려가는 길에 해자수와 궁충이 널브러져 있는 게 보였다.
저들을 데리고 갈까? 아니다. 데려갈 수가 없다. 석문이 내려서는 것을 막은 놈이다.
그렇다면 금방 뒤쫓아온다. 해자수든 궁충이든 어느 한 놈이라도 데려가면 지옥 끝까지 쫓아온다.
차라리 둘을 버리는 것이 목숨이나마 보존한다.
“제길! 욕심 조금 부렸다고…… 다 잃을 줄이야!”
쒜에에엑! 쒜에엑!
천기수사는 사력을 다해서 암로 밖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