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九章 해구부우(解救俘友) (3)
천살단주나 혈천방주는 이백 년 연구에 한계를 느꼈다.
이백 년 동안 온갖 재화를 투입해서 연구를 거듭했지만, 생기가 무엇인지 정의조차 내리지 못했다.
하물며 만져보거나 사용해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도 천살단이나 혈천방은 생기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진기를 전혀 모르는 보통 인간에게 진기가 무엇인지 알려주면 믿지 않는다.
하지만 본인이 몸소 운공법을 알게 되고, 우주의 기운을 호흡으로 들이켜서 단전에 축적시키고, 경맥을 이용하는 방법까지 알게 되면 그 후부터는 진기를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진다.
생기는 진기의 연장선에 있다.
생기는 더 크고 넓은 진기다. 호흡으로 들이마신 공기 속에서 우주의 기운을 뽑아내어 축적하는 것이 진기라면 생기는 우주의 기운, 그 자체다.
들이쉬는 모든 숨이 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굳이 숨을 들이쉴 필요도 없다.
피부에 와 닿는 공기의 물결들이 모두 진기로 사용될 수 있다.
진기와 생기는 반딧불과 밝은 태양 정도의 차이가 난다.
생기의 끝자락을 만지지 못했을 뿐…… 일단 생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만 하면 곧바로 침습해 들어간다. 혈마들이 그런 것처럼.
천살단이나 혈천방은 이러한 이치를 알고 있으므로 혈마 연구에 회의적이지 않았다.
안 되면 안 될수록 더 깊이 파고들었다. 지금은 안 되지만 반드시 가능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호발귀가 혈마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는 거의 절망에 빠져버렸다.
호발귀는 이미 생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혈마들 모두가 알고 있다.
누구는 겨우 몇 년 만에 알게 된 것을 이백 년 연구가 찾아내지 못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오직 하나, 혈마를 잡아서 집중하여 연구하는 방법뿐이다.
혈마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다. 귀무살처럼 호발귀와 친구가 되면 훨씬 쉽게 혈마가 된다.
생기에 대한 염원을 말하고 호발귀에게서 혈기를 전수받는 거다.
그러면 혈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가 문제다.
호발귀는 혈마를 이용해서 세상을 거머쥘 야욕이 없다.
오히려 불안한 혈마는 아무도 없는 첩첩산중으로 들어가서 침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혈천방과 천살단이 생각하는 혈마와 호발귀의 혈마가 갈라진다.
혈마의 힘을 세상에 드러내놓고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 혈천방과 천살단이다.
무적군림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도 불멸 불사를 이뤄서 영원히 집권하는 거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데, 호발귀는 피를 보지 않으려고 한다.
나약한 존재다
이렇게 의견이 상충하면 결국은 부딪히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혈마의 단점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결국, 호발귀와 다른 혈마는 제압해야 할 존재가 된다. 물론 호발귀가 혈기를 전수한다는 전제하에서 끌어낸 결과이지만.
아니, 사실 더 큰 문제가 있다.
호발귀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이유는 혈마가 완전하지 못해서다. 호발귀조차도 완전하지 못하다. 정상적인 인간이 아닌 것이다.
아직 혈마는 미치광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상을 거머쥘 만한 힘이 있다고 한들 미치광이가 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정신병자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고 한들 천하무적으로 군림한다는 통쾌함이 있을 수 있겠나.
세상에 군림하되, 멀쩡한 정신이어야 한다.
그것이 호발귀에게 무릎을 굽히고 혈기를 전수해 달라고 사정하지 않는 이유다.
혈마 연구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
천살단주나 혈천방주가 혈마 생포에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한데 천기수사는 너무 손쉽게 혈마를 제압했다.
만독불침(萬毒不侵)이나 다름없는 혈마를 독으로 제압했다. 천기수사가 뛰어나다기보다는 독의가 대단하다.
그런 사람을 내친 혈천방주는 우둔한 것이고.
환혼몽을 손에 쥔 천기수사는 혈마가 쫓아오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확실히 환혼몽이 혈마를 제압한다.
천기수사는 사마를 제련한 곳으로 보이는 동굴 입구를 환히 개방해 놓았다.
혈마에게 찾아오라는 소리다.
여기서 사마를 제련했고, 내가 여기 있으니 들어와서 나를 잡으라고 유혹한다.
저 동굴로 들어가면 잡힌다.
동굴 곳곳에는 환혼몽이 뿌려져 있을 게 뻔하다. 그리고 혈마는 즉각 무너진다.
스읏!
천살단주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믿을 수 있습니까?”
주치균이 말했다.
두 사람은 동굴에 들어서기 전, 약전주가 만든 천심보환단(天心報還丹)을 복용했다.
천심보환단은 천살단 제일의 피독단이다.
한 알을 만드는데 만금(萬金)이 소요된다고 할 만큼 온갖 영약이 투입되었다.
천심보환단은 세상의 모든 독을 다 무효화시킨다. 무엇보다도 독의 침습을 사전에 방비한다.
신경을 마비시키는 신경독, 혈액을 응고시키는 혈액독, 심장이 작동하는 심독, 뇌에 직접 작용하는 혼독(魂毒)……
모든 독의 침습을 아예 처음부터 막아준다.
천심보환단은 만능이다.
천살단은 약전주가 천심보환단을 만든 이후부터 독에 대한 두려움을 잊었다.
“삼 장 이상 떨어져서 따라붙어라. 혹여 이상이 생긴다면 즉시 말해주마. 그때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주해. 둘이 같이 당할 필요는 없다.”
천살단주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가 주치균에게 한 말은 거짓이 아니다.
이곳에서 자신까지 살아 돌아갈 수 있으면 좋지만, 둘 중 한 명만 살아 돌아가야 한다면 주치균을 보낼 생각이다.
혈마 연구는 일이 년에 끝나지 않는다. 십 년, 이십 년, 백 년…… 어쩌면 이백 년이란 세월이 또다시 흘러야 할지도 모른다. 어떤 한 사람이 일대에서 성과를 볼 수 있는 연구가 아니다.
그러니 살날이 한참 남은 주치균을 보내는 것이 더 낫다.
“괜찮습니까?”
“괜찮다. 너는?”
“괜찮습니다. 침습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천심보환단이 제대로 작용하는 것 같은데요.”
“분명히 환혼몽이 뿌려져 있을 것이다. 조심해서 따라와.”
“네.”
주치균이 대답했다.
스스스! 스스!
두 사람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해자수와 궁충이 잡혀있다. 그들 중 한 명만 빼내면 된다. 더 큰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스스스스! 스스스!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천기수사는 여괴와 판수를 잡으러 나갔다. 이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면 혈마를 빼돌리지 못한다. 그때,
“웃!”
천기수사가 깜짝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왜?”
“오지 마라!
“넷?”
‘독이다!’
천살단주가 입을 열지 않았어도 어떻게 된 일인지 단번에 느낌이 왔다.
“단주님!”
주치균이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왔다.
“오지 말라니까!”
천살단주가 빽! 소리 질렀다.
주치균이 멈춰 섰다.
“환혼몽에 당하면 제일 먼저 몸에 마비 증상이 온다. 몸이 굳어진다. 이걸 알았을 때는 이미 늦다. 진기 운영이 되지 않는다. 진기가 전혀 감지되지 않아. 단전 부위가 이미 마비되었다.”
천살단주가 주치균을 쳐다봤다.
“혈마를 넘겨줄 생각이었는데 미안하게 됐구나.”
“단주님!”
“밖으로 나가라. 이 안에서 혈마를 빼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혼몽이 펼쳐져 있는 이상 누구든 잡힌다. 이 환혼몽……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작용하는 독이다.”
천살단주가 어지러운 듯 비틀거렸다.
천살단 제일무공 암약혼기를 수련한 천살단주였지만 한낱 환혼몽에 이토록 무기력하게 무너진다.
“가라!”
스읏!
주치균은 가라는 말을 무시하고 허리띠를 풀었다. 그리고 채대술을 펼쳐서 천살단주의 허리에 요대를 감았다.
촤락!
허리띠가 천살단주의 허리를 붙잡았다.
쉬이이익!
주치균은 냅다 동굴 밖을 향해 신형을 쏘아냈다. 허리띠에 매달린 천살단주가 동시에 끌려 나왔다.
천살단주를 맑은 공기가 있는 곳으로 데려갈 생각이다.
쉬이잇! 쉬잇!
귓가로 바람 소리가 흘러간다.
주치균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혈마를 납치해야 한다는 생각도 잊었다. 지금은 오죽하나, 천살단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
천살단주는 음흉하고 간악한 사람이 아니다. 검벽주 주치균을 보살펴주던 천살단주,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다.
스읏!
주치균은 천살단주를 데리고 숲으로 돌아왔다.
“일단 독의 침습부터!”
주치균은 손가락을 곧추세워서 단주의 요혈을 통타하려고 했다. 경맥을 막아서 독의 침습을 막을 생각이다. 하지만 손을 쳐내지 못했다.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주치균의 얼굴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천살단주의 얼굴에 수포가 맺혔다. 이미 독이 체내 곳곳에 침습했다. 피부에도 물집이 맺히고 빨갛게 발진까지 오르고 있다. 동시에 피부 곳곳에 검은 검버섯까지 피어난다.
“단주님!”
“만지지 마라. 이 수포를 터트리면 독기가 퍼질 거야. 이놈, 아주 고약하구나.”
“단주님!”
“허허! 혈천방주는 자신이 네 손에 죽을 줄은 몰랐을 거다. ”
“갑자기 그 말씀을 왜?”
“내가 이런 독에 죽을 줄 몰랐다는 뜻이지. 이미 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 환혼몽은 경맥부터 마비시키는 듯하다. 독기보다도 마성(痲性)만 느껴져. 후후! 이거……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군.”
천살단주가 몸을 휘휘 둘러보며 말했다.
몸에 맺힌 물집이나 반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다. 몸에 생긴 이상징후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몸을 마비시키는 효능이 뛰어나다.
“치균아.”
천살단주가 주치균의 이름을 불렀다.
“네.”
“내 목숨을 끊어라.”
“단주님!”
“숨을 쉬기가 힘들구나. 성대가 마비되는 거 같아. 너무 숨쉬기가 힘들어. 흐윽! 끄르륵!”
천살단주는 정말 숨쉬기가 힘든 듯 거친 숨을 뿜어냈다.
“혈마도 이런 과정을 거쳤을 텐데…… 이렇게 숨쉬기가 힘들어도 살긴 사는 모양이구나. 하여튼…… 너무 힘들어.”
“알겠습니다.”
스릉!
주치균이 검을 뽑았다.
“가까이 다가오지 말고. 비검으로.”
“슈웃! 퍼억!”
주치균은 검을 던져냈다.
검은 정확히 천살단주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큭!”
천살단주가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그리고 고개를 툭 떨궜다.
환혼몽은 혈마를 잡는 지독한 독이다. 그런 독이 동굴에 깔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들어간 것은 천심보환단을 믿었기 때문이다.
피독단을 너무 과신했다.
역시 영원한 방패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 강한 창이 나오면 반드시 꿰뚫린다.
독의가 죽은 지 꽤 오래되었는데, 독의가 활동을 중지한 시점부터 따지면 거의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는데…… 그렇다면 환혼몽은 이십 년 전부터 천하제일이었다.
약전주가 천심보환단을 만든 게 겨우 십여 년이다.
그때, 약전주는 천하에서 제일가는 방패를 만든 게 아니었다. 그때에도 환혼몽이라는 독에는 여지없이 꿰뚫리는 불완전한 방패였다.
“단주님.”
퍽! 퍼억! 퍽!
천살단주의 몸에 돋아난 물집들이 퍽퍽 소리를 내며 터졌다. 그리고 검은 진물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살이 썩는 역한 냄새도 풍겨 나왔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맡을 수 없는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부패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아마도 목숨을 끊지 않았다면 독성이 이 정도로 빨리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에 당하는 즉시 이런 상태가 된다면 혈마에게도 환혼몽을 쓰지 못한다.
‘아니면 독성을 늦추는 해약이 있거나.’
단주님, 단주님이 바라시던 일, 이루겠습니다.
주치균은 혈마를 잡기로 작심했다. 그리고 천살단주가 바라던 대로 혈마 연구를 할 생각이다.
스읏!
주치균은 몸을 돌렸다.
혈마를 반드시 잡는다
동굴 안에 있는 혈마를 빼내지 못한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천기수사가 새로 잡은 혈마 중 하나를 낚아챈다.
여괴와 판수 중 한 명을 가로채는 것이다.
그러자면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쎄에에엑!
주치균은 빠르게 움직였다.
취운산에 들어온 혈마와 천기수사가 어울린 지 꽤 시간이 지났다. 아마도 지금쯤은 결판이 났을 것이다.
늦기 전에 잡아채야 한다.
쒜에에에엑!
주치균은 두 발을 힘주어 박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