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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491화 (491/500)

第九十九章 해구부우(解救俘友) (1)

주치균은 한 사내를 봤다.

사내는 길옆에 서 있었다. 청삼을 입고, 청건을 둘러매고, 두 손은 가슴 앞에 모아서 포권을 한 채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스읏!

주치균은 걸음을 늦췄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사내가 허리를 굽혀서 예를 표했다.

하지만 표정은 얼음을 포개 놓은 듯 냉랭했다.

“어쩐 일이냐?”

주치균도 싸늘하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살단주님.”

“살단주? 아직도 내가 살단주인가?”

“그렇습니다. 살단주님이십니다. 아직 단주님께서 살단주님을 해직하지 않으셨으니까.”

사내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검벽주 임명강이다. 그는 천살단주를 호위한다.

지금도 단주를 호위하는 중이다. 검벽주가 나타났다는 것은 천살단주가 근처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다.

“단주님도 오셨나?”

“네.”

“만나기 싫다면?”

“……”

임명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치균은 마공관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였다.

자신에게 암약혼기를 전수해준 자들, 고문을 가했던 자들을 일시에 쳐 죽였다.

마공관 밖에서 경계를 서던 천살단 무인도 죽였다.

주화입마라도 걸린 듯했다.

주위에 사람이 더 있었다면 아마도 더 죽였을 것이다. 눈에 띄는 모든 사람을 죽였을 거다.

천살단과 인연을 끊고자 함이다.

천살단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동문 살해를 저질러서 돌아갈 수 있는 다리를 스스로 끊어버렸다.

그런데도 임명강은 여전히 그에게 포권을 한다.

‘이해를 못 하는구나. 내가 왜 천살단 무인을 스스로 죽였는지.’

주치균은 침음했다.

이제 강호로 나가면 전임 천살단주와 검을 맞대야 할지도 모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전임 천살단주와 드잡이질을 하는 살단주라니. 천살단 역사에 이런 일은 없었다.

또 이런 추행은 천살단의 앞날에도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천살단주와 싸우게 될지 어떨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꼭 그렇게 될 것 같다. 단순한 예감이지만…… 반드시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주치균은 전임 천살단주에게서 어두운 그림자를 봤다.

그가 수련한 암약혼기, 이것은 정상적인 무공이 아니다. 도저히 정공이라고 할 수 없다. 어쩌다가 이런 무공을 몸에 붙였다고 해도 만천하에 드러내놓고 사용할 수 없는 공부다.

하기는…… 드러내 놓고 사용한다고 해도 정공인지 마공인지 알아볼 사람도 없다.

암약혼기에서는 마공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반사신경이 굉장히 날카로워서 어떤 공격도 감당하는 무인.

허리의 유연함, 팔다리의 부드러움 그리고 지극히 뛰어난 반사신경…… 무공의 끝자락에 선 무인의 모습.

이러니 정공이라고 우겨도 할 말이 없다.

암약혼기가 마공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수련 과정이 지독할 뿐이지.

하지만 직접 암약혼기를 수련한 주치균은 분명히 어두운 그림자를 느꼈다.

분명히 어둡다. 어느 부분이라고 딱히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하다.

“차 한잔하고 가시죠.”

임명강이 말했다.

“그러지. 안내해라.”

주치균이 임명강의 뒤를 따랐다.

‘마냥 피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야. 언젠가는 부딪쳐야 할 분…… 지금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천원주는 나무 그늘에 앉아있었다.

돗자리를 펴놓고 팔팔 끓어오르는 주담자를 쳐다보면서 단아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언제 봐도 흐트러짐이 없다.

“단주님.”

주치균이 두 손 모아 포권했다.

“이리 와. 섭섭하네? 대성했으면 말을 해줘야지. 말도 안 하고 가는 법이 어디 있어?”

천원주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신에게 암약혼기를 권유한 현임 천살단주도 주당염 조차도 암약혼기의 실체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수련 과정을 지켜보았는데도 어둠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처럼 태연히 차를 권유할 수 있는 것이다.

“단주님.”

“이리 와. 차 한잔하기가 어려운 건 아니잖아?”

주치균은 천원주 앞에 앉았다.

“예전에…… 단주님도 그런 적이 있었어. 암약혼기를 수련한 후에 모든 사람을 죽였지. 아마도 그 공부에는 주화입마를 불러오는 과정이 있는 것 같아. 지금은 괜찮아?”

“단주님도요?”

“모두 쉬쉬했지만, 다 알고 있는 이야기야. 내원 당주들은 모두 알걸? 호호호!”

타앙!

주치균은 망치를 뒷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인가? 천수신검이 자신에게 뭔가 숨긴 것이 아니라 암약혼기 자체가 한순간 이성을 현혹하는 작용을 한 것인가?

“차 들어. 출관하자마자 혈천방주를 제거하고, 큰일 했네?”

“보셨습니까?”

“아니. 어딜.”

천원주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우리는 혈마 뒤를 캘 수도 없고, 전임 단주님이나 네 뒤를 따라다닐 눈도 없어. 단지 조금 지켜볼 수는 있을 것 같아서 부탁했지. 보아달라고.”

주치균은 천원주 곁을 그림자처럼 따르는 밀운을 떠올렸다.

‘밀운이라면……’

그라면 천살단주나 자신의 뒤를 밟을 수 있다.

그가 수련한 은신술은 사마까지 따라붙는다.

밀운이 모든 상황을 보고 보고했을 것이다.

“좋은 사람입니다.”

주치균이 말했다.

“너도 좋은 사람이야.”

“전 이미 돌아갈 수 없습니다.”

“돌아와. 하고 싶은 일 마음대로 하고 돌아와. 천살단주, 해야지?”

“미련 없습니다.”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야. 너는 황실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었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이라고. 황궁에서 황실 사람을 무림에 내보냈어. 그것도 천살단에. 그러면 단주는 해야지. 단주도 하지 않고 엉뚱한 데로 튀어 나가서 뭘 어쩌자고. 나중에 우리 천살단에 질책하면 뭐라고 말해?”

“원주님.”

주치균은 주약란을 원주라고 불렀다.

아무래도 천살단주라는 말보다는 원주라는 말이 훨씬 익숙하다. 또 그게 더 어울려 보인다.

“돌아올 때까지만 천살단주를 맡고 있을게. 돌아와. 자! 한 잔 마셔. 혈천방주를 잡았는데 차 한 잔밖에 못 주네.”

천원주가 차를 따라서 권했다.

주치균은 찻잔을 받아서 단숨에 들이켰다.

‘아마도 이게 마지막일 겁니다.’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천원주는 다시 돌아오라고 하지만 돌아갈 길이 없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천살단 경계 무인을 죽였다. 천살단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이 혈천방이었으면 아무런 상관도 없다.

하지만 천살단은 정과 의를 행하는 곳이다.

정의를 행하는 곳에서 불의가 일어났으며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주치균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자신이 돌아갈 자리를 미리 끊어버렸다.

그런데도 천원주는 계속 오라고 한다.

돌아가면 가벼운 징계 정도 내릴 것이다.

이미 자신이 저지른 일은 덮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전임 천살단주와 엮이는 순간, 갈 곳을 잃어버린다.

“뛰어난 무공을 봤으면 좋겠는데, 보지 못하고 그냥 보내네. 섭섭해.”

“다음에…… 다음에 돌아와서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주치균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그래. 꼭 보여줘. 다음에.”

천원주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주치균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눈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밀운은 천살단주도 추적할 수 있고 시마, 사마도 추적할 수 있다.

하지만 혈마는 추적하지 못한다. 밀운이 달라붙기 전에 혈마가 먼저 눈치챈다.

생기를 내포한 모든 생물체는 혈마 눈을 벗어나지 못한다.

밀운이 혈마와 사마의 싸움을 관찰할 때, 그리고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지켜볼 때…… 혈마 중에 한 사람 등여산이 바로 알아챘다.

하지만 내버려 두었다. 상대가 밀운이기에.

‘천원주님!’

등여산은 천원주를 오랜만에 봤다.

천살단에 있을 때는 어머니처럼 보살펴주시던 분이 아니시던가. 천살단주는 할아버지였고, 천원주는 어머니였다.

방년을 겨우 넘긴 풋내기가 천살단 책사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서 그럭저럭해낼 수 있었던 것도 천원주가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천원주는 그녀가 호발귀를 쫓아서 중원을 떠돌 때도 묵묵히 밀어주었다.

천살단의 역도가 되어서 형옥에 갇힐 때도 밀운을 보내서 도와주었다.

사박! 사박!

등여산은 원주에게 걸어갔다.

“아! 어쩐지! 그냥 일어서기 싫더라.”

천원주가 환하게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황급히 달려와 등여산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천원주님.”

“어멋! 얘. 나 단주야.”

“아! 단주님.”

“얘는. 농담도 못 하니. 앉아. 아직 차가 안 식었어. 오늘 운 좋은 날이네.”

천원주가 활짝 웃었다.

또르르!

찻잔에 맑은 찻물이 따라졌다.

“옛날에는 원주님께 차 참 많이 얻어 마셨는데.”

“그렇지? 몸은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네.”

“너하고 홀리하고 둘이 혈천방주를 이겼다면서? 혈마는 역시 무적이야.”

“부탁이 있어요.”

“말해봐.”

천원주는 부탁이라는 말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혈마가 천살단주에게 부탁하는데도 환히 웃었다.

“천살단에 있는 혈마록, 태워주세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야.”

천원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번역한 혈마록은 내가 직접 태웠어. 한데 호발귀가 구술은 구술본이 사라졌어. 혈마록 원본이나 다름없는데…… 마공관뿐만이 아니고 천살단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안 나와. 벌써 누군가의 손을 탔어.”

“할아버지가 그랬을까요?”

등여산은 자신도 모르게 천수신검을 할아버지라고 말했다.

“모르지. 그 양반, 워낙 능구렁이잖니.”

천원주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천기수사를 찾아야 해요. 천살단 힘을 빌려주세요.”

“천기수사. 호호! 옛날에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문제를 일으키네. 최대한 찾아볼게. 그나저나 찾는다고 해도 네게 연락할 길이 있어야지.”

“밀마를 남겨주시면 제가 찾아봐 뵐게요. 제가 알던 밀마라면 볼 수 있어요.”

“그게 언제 건데. 그 밀마는 나도 잊어버렸다. 호호! 알았어. 그 밀마를 남겨놓을게.”

“고맙습니다.”

등여산은 머리를 숙였다.

“나도 부탁 하나 할게.”

천원주가 손을 내밀어 등여산의 손을 잡았다.

“방금 봤지만, 살단주…… 매우 위태위태해. 아마 천수신검님을 쫓아갈 거 같은데, 마지막 순간이 되면 한 번만 목숨을 살려줄래?”

“네. 그럴게요.”

등여산은 생각도 해보지 않고 바로 말했다.

주치균은 황실의 황자다. 그의 죽음은 어느 강호인의 죽음과 똑같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검벽주가 딱 맞았다. 살단주가 되어서 천살단의 칼이 되는 순간, 곧바로 위험 앞에 노출되었다.

천살단주는 그를 그렇게 내물면 안 되는 거였다.

아니, 그런 것들은 모두 지엽적이다.

황실의 황자라도 무림의 도검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무공이 약하거나 방심하면 누구든 죽을 수 있다.

천살단주가 주치균을 부탁한 이유는 주치균의 내면이 강직하고 바르다는 점을 알아서다.

“너 방금 살려주기로 약속했다?”

“네.”

“오늘 내가 여기 오길 잘했네. 어쩌면 모두 마지막이다 싶은 느낌이 들더라고. 지금 안 보면 영원히 못 볼 것 같아서 왔는데, 마음이 홀가분해졌어.”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린 언제든 볼 수 있어요.”

“행복하고?”

“네.”

“너, 호발귀 혼자 독차지하지 못했다며?”

“네. 착한 여자예요.”

“호호호! 음문촌 여자를 착하다고 하는 여자는 세상천지에 너밖에 없을 거다.”

천원주가 웃었다.

아무런 경계를 할 필요가 없고, 강호의 은원을 모두 잊을 수 있고, 도검의 날카로움도 잊고…… 그저 웃으면서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좋다.

천원주, 아니 천살단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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