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七章 개시반공(開始反攻) (4)
“웃!”
해자수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해자수는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쳐다봤다. 마치 넋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다음으로 반응한 사람이 궁충이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활을 잡았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시위를 걸었다.
“벌레들이 꼬이는데.”
길성도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이 정도 기척이면 벌레라고 할 수 없지. 아예 우리를 쌈 싸 먹겠다고 덤비는 것 같은데.”
여괴가 눈빛을 번쩍였다.
선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수상한 기척을 눈치챘다. 그리고 차분히 싸움 준비를 한다.
“뭐가 잡히나?”
귀검이 물었다.
“어떤 놈들이 주변을 포위했습니다.”
궁충이 차분하게 말했다.
귀검은 아무 기척도 읽지 못했다. 한데 혈마는 포위를 읽어냈다.
인간이 펼치는 진기 영역보다 혈마가 감지하는 생기 영역이 훨씬 넓다.
한마디로 혈마는 인간을 감지해도 인간은 혈마를 눈치채지 못한다.
“거리는?”
“대략 삼십 장입니다.”
“음!”
귀검이 침음했다.
삼십 장 거리라면 귀검이 파악하지 못할 리 없다.
더욱이 한 명도 아니고 무리 지어서 포위했는데도 알아채지 못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최소한 귀검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상승 고수다.
다른 생각도 할 수 있다. 귀검의 진기에는 걸리지 않고 혈마의 생기에만 걸려드는 자들…… 사마다.
주변을 포위한 자들은 사마가 틀림없다.
“우리만 사마를 쳐다본 게 아니라, 혈천방주도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네. 자넨 도대체 뭘 본 거야?”
해자수가 귀검을 보며 핀잔하듯 말했다.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럼 핀잔은 사양.”
귀검이 차게 말했다.
“아이, 그것참 또…… 사람 정색하기는. 농담이야 농담. 농담도 못하나?”
해자수가 검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원래 해자수는 검을 차지 않았다. 어떤 때는 가지고 다니고 어떤 때는 놓고 다녔다.
그러니 자신의 검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손에 잡히는 대로 쥐고 휘두른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검을 가지고 왔다.
사마와 격돌할 것을 예측했다.
자신들이 먼저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공격해오는 것이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치든 싸움은 정상적으로 일어난다.
혈마와 혈마끼리 혹은 혈마와 사마 간의 싸움에서는 기습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먼저 공격 의도를 드러냈다는 것뿐이지 기습 자체가 통하질 않는다.
검을 쓸 수 없는 먼 거리에서 노출되어 버리는데 기습이랄 게 따로 있을 리 있나.
“혈마가 되면 사마에게 잡힌다. 지금 딱 여섯 명. 이인 일조로. 세 명씩 번갈아서 공격하도록.”
귀검이 즉시 명령했다.
“너 지금 나한테 명령한 거지?”
해자수가 귀검을 쳐다보며 말했다.
귀검이 해자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때 혈마가 됐을 때 베어버리는 건데.”
그러자 해자수가 기겁했다.
“야! 야! 야! 이젠 이런 말도 하네? 근데 네가 이런 말을 하니까 꼭 진짜 같아. 진짜 베이는 느낌이 들어서 섬뜩하다, 야.”
“귀무령님은 농담하지 않는대요 진심인데요.”
궁충이 옆에서 거들었다.
해자수가 다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귀검은 혈마가 수련하는 장면을 세밀히 지켜보았다. 어떤 면에서 혈마를 뵐 수 있는 최적의 검수는 귀검이다.
호발귀가 혈마들에게 어떤 수련을 시켰는지 다 알고 있다.
더욱이 그의 지옥유부검은 생기 무공도 상대한다.
귀검이 검을 들면 혈마가 잡힌다.
“실수! 실수! 내 말 취소. 난 궁충과 한 편. 됐지?”
해자수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혈마는 즉시즉발(卽是卽發)에만 대응한다.
그 한 수를 배우는 데도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물며 연타에 대응한 수련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니, 그 전에 해결할 문제가 있다.
혈마는 이지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연타를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이 최고 난관이다.
연타가 있다는 사실만 알면 수습할 수가 있는데……
생기가 뚝 끊기면 바로 반격이 이어진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아채도, 그 후에 연타가 벌어질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연타도 단타처럼 반복 수련을 시킬 수는 없다.
그럴 경우, 단타만 대응해도 될 것을 혈마는 연타로 착각하고 계속 검을 휘두른다.
계속…… 계속 멈추지 않고 검을 쓴다.
이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다. 혈마가 생기가 있건 없건 검을 휘두르면 산천초목이 황폐해진다.
혈마가 먼저 연타를 인지해야 한다. 그전까지는 연타 수련을 시킬 수가 없다.
“혈마가 되기 전에 최대한 버티는 수밖에.”
“살기를 죽일 수 있는 깨끗한 검이면……”
판수가 말했다.
“그게 쉽냐? 이놈의 혈기만 치솟으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데. 한시라도 빨리 두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인데 이것저것 가릴 수 있어야지.”
여괴가 체념하듯 말했다.
귀무살은 두 명의 혈기는 온순한 편이고 두 명의 혈기는 강렬한 편이다.
강렬한 자들은 금방 혈기에 휩쓸린다.
판수 말처럼 살기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 깨끗한 검을 쓰더라도 두통은 가시지 않는다.
혈기는 계속 피부를 찌른다.
도저히 혈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가자.”
귀검이 밖으로 나왔다.
저들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앞으로 쭉 달려들어서 혈기를 자극하고는 바로 빠져나갔다.
혈마와 싸우지 않으려고 한다. 우선 혈마의 혈기를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강렬한 살기를 드러내면서 달려들면 혈마는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한데 상대가 싸우지 않고 물러선다.
혈기는 약이 오른다. 악착같이 쫓아가려고 하는데 그때는 귀검이 만류한다.
“유인책이다. 달려 나가면 뿔뿔이 흩어져. 무슨 일이 있어도 뭉쳐있어야 한다.”
“쳇! 이건 뭐 꼴이 말이 아니네.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놈들한테 이렇게 농락당해야지 되나?”
길성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궁충이 시위를 당겼다.
지금으로써는 가장 좋은 해법이다. 궁충의 궁법은 악불사왕의 진전을 이어받아서 백발백중이다.
절대 어긋나지 않는다. 더욱이 혈마가 된 후에는 사정거리도 늘었다.
츠츠! 츠츠츠!
앞에서 누군가 달려든다.
‘사마. 거리는 대략 삼십 장.’
궁충에게는 장난처럼 마칠 수 있는 거리다.
슷! 탁!
궁충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강렬하게 파공음을 일으키며 날아갔다. 한데,
탁!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분명히 모두 다 들었는데…… 살을 꿰는 소리가 아니다.
단단한 물체에 틀어박히는 소리다. 화살이 사마를 꿰뚫지 못했다.
“웃!”
착심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궁충이 사마를 놓쳤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궁마의 궁법이…… 빗나가?
“사마가 즉시 반응하네. 저놈들, 우리 공격에 반응할 수 있나 봐.”
해자수가 말했다.
백발백중의 궁법을 사마가 피했다.
삼십 장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어둠 속이다. 하지만 궁충의 활이 사마를 뚫지 못하고 나무에 박혔다는 사실은 모두가 인지한다.
“미치겠네. 이제 어떻게 상대한다?”
해자수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들을 쫓아가면 저들은 계속 물러선다. 쫓아오는 혈마를 이끌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간다.
완전히 흩어놓을 것이고, 그러면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다.
혈천방주의 속셈이 빤히 보인다.
그렇다고 마냥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사마가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혈기가 작동한다.
“일단은 제가.”
궁충이 활을 잡았다.
쒜에에엑!
사마가 달려든다
궁충은 활에 혈기를 담았다. 그리고 바로 화살을 쏘아냈다.
툭! 툭!
이번에도 여지없이 나무만 건드렸다.
사마가 궁충의 활에 반응하는 것은 틀림없다.
도대체 어떻게 혈마의 공격을 인지하는 것일까? 놀랍고 믿기지 않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궁충, 너는 여기서 계속 쏘고 있어. 내가 조금만 앞으로 나갈게. 삼십 장 너머로는 가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아무래도 저놈들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지 안 되겠어.”
“그러다가 혈마가 되면 벱니다.”
귀검이 차갑게 말했다.
“아! 베든 말든 맘대로 하고. 지금 이대로 있을 순 없잖아! 간다!”
스으으읏!
해자수가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듯 스며들었다.
“후후후! 생각보다 좋네.”
혈천방주는 만족했다.
사마, 사마는 영물이다.
사마는 생기를 완전히 죽인 상태다. 죽은 시신이나 다름없다.
오장육부가 활동하고 힘줄이 움직이는 것은 거의 약물이 끓어내는 힘이라고 보면 된다.
혈마라고는 근원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 예상하지 못했던 효과를 찾아냈다.
사마는 생기가 없다. 무(無)다. 그래서 유(有)를 더 빨리 찾아낸다.
다시 말해서 생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특히 혈마처럼 생기를 강하게 쓰는 경우는 즉시 눈치챈다.
사마가 혈기를 바로 읽어낸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더욱이 사마는 목표를 인식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든 아니든 목표를 인식시키면 죽을 때까지 달려든다.
그리고 목표를 찢어발긴 후에야 물러선다.
목표가 혈마일 때, 사마는 극강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마는 궁충의 활을 두 번이나 피했다. 혈기가 일어나는 것을 감지한 순간, 바로 피했다.
궁충이 활을 쏘았을 때는 이미 몸을 숨긴 후이다.
“이 정도면 됐어. 하하하!”
혈천방주는 웃었다.
단, 사마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기와 기의 싸움에서는 사마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지만, 육신의 힘이 가미되면 형편없이 무너진다. 홀리에게 사마 여덟 명이 당했을 때처럼.
눈에 보이면 당한다. 그러니 낮에는 싸우면 안 된다.
‘응?’
문득, 만족하던 혈천방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마가 움찔거리고 있지 않나. 뒤로 물러나고 싶은 듯 주춤거린다.
물러서지 못한다는 제약을 가해놓지 않았다면 벌써 피했을 것 같은 행동이다.
‘이건 생기에 반응했다는 건데? 활을 쏘는 것도 아니고. 아! 잠입! 그렇지. 그렇게 움직여야지. 하하!’
꾸우욱! 꾸욱!
혈천방주는 우각을 불었다.
그러자 움찔거리던 혈마가 즉시 몸을 돌려서 달아났다.
혈천방주도 신형을 날렸다. 사마가 움직이는 쪽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혈마의 혈기에 걸려들지 않아야 한다.
“후후후! 그렇게 도주해라. 계속 끌고 가.”
지금부터 사마 네 명은 잠입한 혈마를 이끌고 이동한다. 물러서면 달려들고, 달려오면 빠지면서.
어디까지 갈지는 모른다. 계속해서 끌고 간다.
저들은 흩어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드디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후후! 자, 하나는 뜯어냈고. 또 하나를 뜯어내야지.”
삐익! 꾸우욱! 꾹!
혈천방주가 우각을 불었다.
그러자 다른 쪽에 있던 사마들이 일제히 거리를 좁혔다. 아니, 안으로 파고들자마자 바로 튕겨 나왔다.
혈마를 계속 자극한다.
“으! 미치겠네.”
여괴가 머리를 싸매며 중얼거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어떻게든 이 혈기를 풀어내야겠는데 풀어낼 당사자가 없다.
“나하고 착심이 가장 곤란한 거 같은데, 우리 둘이 서로 의지해서 이걸 좀 풀어야겠습니다.”
“힘드냐?”
“네. 힘듭니다.”
착심이 여괴 대신 말했다.
“참아라.”
귀검이 냉정하게 말했다.
“귀무령님은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으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이건 정말 당해보면……”
순간, 귀검이 단검을 뽑아 들더니 허벅지를 푹 찔렀다.
붉은 피가 뭉클 솟구쳤다.
“이 정도의 고통이면 너희 고통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귀무령님!”
“참아. 그래야 산다.”
“아무리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하실 거야.”
궁충이 즉시 달려와서 금창약을 꺼내 찔린 상처에 발랐다.
귀검은 궁충이 상처를 치료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것보다는 이 사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