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마전인-479화 (479/500)

第九十六章 단장지애(斷腸之哀) (4)

음문촌장과 이자는 얼어붙었다.

눈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여자는 자신들이 알던 여자가 아니었다.

저 여자는 악마다!

딸 홀리, 여동생 홀리가 아니다.

“으……!”

음문촌이 이 시린 소리를 흘렸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공포가 치밀어오른다.

어처구니없게도 홀리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진다.

저벅! 저벅!

그녀가 걸어온다.

‘도주해야 해! 여기 있으면 죽어!’

딸이 걸어오는데 지옥에서 튀어나온 저승사자가 걸어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죽는다. 홀리와 엮이면 죽는다. 절대로 저 여자랑 엮이면 안 된다.

“가…… 가야 합니다. 도, 도망가야……”

이자가 이를 따닥따닥 부딪치면서 말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음문촌장이나 이자는 지금보다 두 배 더 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어도 사마 여덟 명을 해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귀무살 예순 명과 싸운다? 말도 안 된다. 그런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물론 정작 싸움이 벌어지면 저들에게 죽을 생각은 없다.

최선을 다할 것이고 저들 중 태반이 죽을 것이다.

그만한 자신은 있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자신들도 두 번 다시는 검을 들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타격을 당한 후일 것이다.

아무런 상처도 없이 일방적으로 예슨 명이 넘는 귀무살을 죽여버린다는 것은……

아! 이건 사람이 아니다.

저벅! 저벅!

홀리가 걸어왔다.

두 사람은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홀리가 눈앞에 들이닥칠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두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그 정도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몸이 얼어붙었다. 아니, 도주해야 한다는 마음마저 얼어붙었다.

오히려 도주하면 죽는다는 생각이 든다.

“하!”

음문촌장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털썩 주저앉았다.

이 순간 음문촌장은 사지가 활짝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홀리에게는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다. 홀리가 검을 쳐내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저며진다.

어디를 공격하든 간에 내줄 수밖에 없다. 홀리는 인간이 아니다. 귀신이다.

“아, 아가.”

음문촌장이 더듬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속 시원해?”

홀리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음문촌장과 이자에게는 홀리가 사악해 보였다. 웃는 모습도 무섭다.

그녀는 예전처럼 웃고 있지만, 홀리 몸속에 있는 귀신…… 혈마라는 귀신은 결코 예전의 홀리가 아니다.

“가.”

“응?”

음문촌장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가자고. 가야 할 곳이 있잖아.”

“응? 응.”

음문촌장이 쭈뼛쭈뼛 일어섰다.

“지금부터 어떤 수작도 부리지 마. 뭐든 해도 괜찮은데 귀찮아. 또 한 번 이런 일이 벌어지면 죽일 거야.”

“아, 알았다.”

음문촌장이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슷!

홀리가 이자를 향해 돌아섰다.

“아버지는 길 안내를 해줘야 하니까 같이 갈 수 있는데, 당신은 왜 여기 있어? 같이 갈 이유가 없잖아. 여기 왜 온 거야?”

홀리가 이자에게 ‘당신’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도 이자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나, 나는 아버님을 모셔야 하니……”

이자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아는 일인데 뭘 새삼스럽게. 나 갖고 싶어? 동생을 여자로 본 거야?”

“아, 아니. 누가 그런……”

“저기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을 생각해봤는데, 거짓말 안 보태고 스무 번 넘게 생각했는데 이해가 안 돼. 그런 생각은 말이야. 하루아침에 드는 게 아니잖아. 음문촌에서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생활하면서 계속 그런 눈으로 나를 봤다는 거잖아.”

“그, 그게 아니라……”

“그래서 생각했어. 그 두 눈…… 없애버리기로. 살려줄게. 살려줄 테니까…… 두 눈 놓고 가.”

“홀리야.”

“듣기 싫어. 당신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는 거. 계속 날 불러대면 혀까지 뽑아버릴지 몰라. 그러니 아무 말 하지 말고 두 눈을 놓고 가든가 검을 뽑아. 내 바람이라면 검을 뽑았으면 좋겠어. 음문촌 사람이라면 죽는 자리는 알아야지.”

“홀리야. 네 오라비는……”

음문촌장이 거든답시고 말을 했다.

홀리가 검을 들어서 음문촌장을 가리켰다.

“조용히. 조용히. 우리 사이에 무슨 정이라도 남아 있는 것처럼 말하지 마. 어떤 아비가 다른 사람을 시켜서 딸을 공격해? 이건 아니지. 이런 일은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미안하다. 홀리야. 그런데 그게 아니고……”

“지금 내가 당했으면 신나서 달려들었을 거잖아. 당신이 그랬잖아. 세상은 냉정한 곳이라고. 강자만 존재하는 곳이라며? 약자는 살 생각도 하지 말라며?”

“그건 널 강하게 키우려고……”

“그래서 충분히 강해졌어. 아비에게 검을 겨눌 정도로. 딸을 공격할 때는 자신도 공격당할 것을 생각했어야지.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 하잖아. 줄게. 나한테 준 그대로. 당신, 결정해.”

홀리가 이자를 쳐다봤다.

“하!”

이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홀리가 생각을 돌이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홀리의 눈은 매우 차다. 두 사람을 쳐다보는 눈길에 티끌만 한 감정도 섞여 있지 않다.

길에서 만난 길고양이에게도 이런 눈길은 보내지 않을 것이다.

홀리는 이자를 베기로 마음먹었다.

홀리 말대로 두 눈을 놓고 떠나든가 아니면 검을 들어서 맞서 싸워야 한다. 이 방법밖에는 없다.

“훗!”

이자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소위 음문촌 사람인데 두 눈을 놓고 갈 수는 없지. 그래 맞아. 널 갖고 싶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널 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럴 것 같았어.”

“발정 난 늙은이가 마구 싸지른 씨앗들을 모두 동생으로 여기는 건 피곤하잖아.”

슷!

이자가 검을 뽑았다.

“내 검이 어떤지는 너보다 잘 아는 사람도 없겠지. 옛날에는 내가 검을 뽑으면 긴장했는데 이제는 긴장도 하지도 않고. 풋! 네가 혈마가 될 줄이야.”

이자가 검을 들어서 홀리를 겨눴다.

“나는 이대로 가지만 당신도 큰일 났네?”

이자가 음문촌장을 보면서 말했다.

“홀리를 어떤 식으로 꾀어냈는지 알 것 같은데, 그거 거짓말이잖아? 얘 어미, 진짜 살아있어? 아니지? 당신은 여자가 싫어지면 죽여버리잖아. 토초 어미 죽이는 걸 내 눈으로 봤는데? 육자 어미도 발로 차서 벼랑에서 던져버렸고. 얘 어미는 어떻게 죽였어?”

“너 이 새끼!”

“그래. 욕도 힘 있을 때 해. 보아하니 당신도 곧 따라올 거 같은데 뭐. 얘한테 인정 같은 거 기대하지 마. 보면 몰라? 다 죽이기로 작정했잖아.”

이자가 음문촌장을 보며 웃었다.

마음이 평온하다.

아버지는 보내고 이자 오라비는 베겠다고 결심했다. 정말 그런 상황이 됐다. 그런데 마음이 진짜 편안하다.

아무런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곧 오라비를 베어야 하는데, 싸운다는 느낌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이 사람들만 나를 딸로, 동생으로 보지 않은 게 아니네. 나도 이 사람들을 아버지로 오라버니로 여긴 적이 없었어. 머릿속으로만 아버지 다 오라버니다. 하지만 진짜 속마음은 경쟁해야 하는 상대. 그래. 그렇게 여겼던 거야. 아버지가…… 그렇게 만들었어.’

홀리는 웃었다.

음문촌장은 자식을 모질게 키웠다.

오직 강하게, 강하게, 강하지 않으면 자식도 아니다.

자식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밥도 먹이지 않고 오직 무공수련에만 매진시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진심이었다. 강하지 않으면 살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벼랑을 기어오르다가 떨어져 죽어도 어쩔 수 없다.

자식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서 벼랑을 기어오르게 한 것이 아니다.

이것조차도 못하는 놈이라면 밥을 먹일 이유조차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자식들을 키웠으니 자식도 그렇게 자랐다.

이자가 자신을 여자로 본 거? 당연하다.

이제 알겠는데…… 자신도 오라비를 오라비로 본 적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들어도 전혀 슬프지 않았을 테니까.

일자…… 일자 오라비만 동생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자는 늘 있는 듯 없는 듯 한 발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이렇게 모든 관계를 다 끊고 자신도 한 발 떨어진 곳을 지켜보니 누가 오라비고 누가 외인인지 단박에 알겠다.

많은 형제 중에 홀리 곁에 있던 사람은 딱 한 명 일자였다.

‘이제 미련 없어.’

쒜에에엑!

홀리도 익히 알고 있는 혈맥참이 터졌다.

이자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쏜살같이 눈앞에서 검막이 활짝 터졌다.

홀리는 즉시 검을 쳐냈다.

까앙! 깡깡깡! 까아앙!

검과 검이 부딪혔다. 혈맥참과 혈맥참이 부딪혔다.

홀리는 생기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진기로만 혈맥참을 상대했다.

끝까지 진기로 싸울 생각이다. 혈맥참으로 승부를 결정지어서 오라비의 자긍심마저 무너트릴 생각이다.

하지만 생기를 알게 된 사람은 진기를 사용할 수 없다. 진기를 쓰는데 생기가 일어난다.

땅이 두 발을 꽉 잡았다가 탁 튕겨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검을 쳐냈다.

써걱!

검이 살을 갈랐다.

‘아! 혈맥참으로 끝내고 싶었는데……’

홀리는 탄식했다.

스읏!

땅에 내려서서 뒤돌아봤다.

오라비 이자가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쥐며 주춤주춤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다.

이자의 목에서는 피가 붉은 피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혈맥참 대 혈맥참으로 싸웠다면 손속에 사정을 남겨두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생기가 검을 쳐내면 목숨을 끊는다. 상대방이 생기를 끊어 놓는다.

홀리는 검의 강도를 조절할 정도로 생기를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한다.

혈마 중에 가장 혈기를 잘 다루는 호발귀도 검의 강도를 조절하지 못한다.

혈마는 지극히 초보적인 단계에 들어섰을 뿐이다.

무궁무진한 우주 속에서 겨우 손끝 하나를 만졌을 뿐이다.

“컥! 컥컥!”

이자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홀리를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스륵! 쿵!

이자가 무너졌다.

“우리 엄마 살아있어?”

“그, 그게……”

“우리 엄마 죽였구나. 그러면 내게 동생이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야? 날 데리고 어디로 가려고 했는데?”

음문촌장은 체념한 듯 어깨를 쭉 늘어뜨렸다.

“어디로 갈 필요는 없었으니까. 넌 여기서…… 혈마가 돼야 했어. 후후! 그렇게 강하게 키웠는데…… 이런 말로 꼬드겨 낼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지.”

“엄마는 왜 죽였어? 그래도 당신 자식을 낳아준 여자잖아.”

“나는 말이다. 여자가 애를 낳으면 그다음부터는 건드리기 싫어져서 말이야. 여자로 안 보이는 걸 어떡하나.”

“아!”

홀리가 탄식했다.

이것이 항상 의문이었다. 아버지는 많은 여자를 처첩으로 두었다.

그런데 한 여인이 자식을 한 명씩만 낳았다. 그리고 자식을 낳은 후에는 어김없이 죽었다.

홀리는 이것이 음문촌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원래 핏줄에 저주가 깃들어 있어서 자식을 낳으면 어김없이 죽는다고. 진실은…… 생각보다 더러웠다.

철컥!

홀리가 검을 거뒀다.

“그래도 아비니까 보내줄게. 이것으로 인연을 끊자. 어디서 뭘 하든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마.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취하면 당신…… 죽어. 정말 죽일 거야.”

“후후후!”

음문촌장이 웃었다.

“너도 네 어미가 살아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잖아. 넌 네 어미의 무덤이라도 찾고 싶었을 건데. 말해달라면 말해줄 수 있는데. 네 어미 어디 묻혔는지?”

홀리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지 마. 그건 당신이 쓸 패가 아냐. 아직도 날 혈마로 만들고 싶어?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면 당신도 죽일 거야. 그냥 가.”

어미의 무덤…… 어디 있는지 알고 싶다. 물론 이번에는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아비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아비는 이용할 만한 것이 있으면 절대 내놓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딸을 이용할 생각만 한다.

아비와 말을 섞으면…… 벨 것 같다.

홀리는 뒤돌아섰다. 털끝만큼도 미련이 없다.

저벅! 저벅!

홀리가 걸었다.

저벅! 저벅!

그녀의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호발귀가 따라 나와 홀리의 뒤를 걷고 있다.

말은 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따라온다.

“다 들었어?”

“아니.”

“정말 추잡하지?”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니까.”

“나, 저런 시궁창에서 자랐는데 그래도 괜찮아? 사람이 달라 보이지?”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니까.”

“풋!”

홀리가 피식 웃었다.

“오늘 기분이 우울한 거 같네. 술 마실까?”

“아니. 기분 더러울 때 술 마시면 뒤끝이 안 좋아. 많이 취할 거고. 오늘은 술 마시고 싶지 않아.”

“그래.”

“혈기투사, 안 해? 내 몸에서 혈기 걷어내야지. 방금 살인했잖아.”

“이 정도는 괜찮아.”

호발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고마워.”

“뭐가?”

“전부 다.”

“몰랐나 보네. 내가 원래 고마운 짓을 많이 하잖아.”

호발귀가 씩 웃었다.

홀리도 호발귀를 향해 웃었다.

그렇구나. 내 곁에는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구나.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술 마시자. 기분 좋아졌어.”

홀리는 진정으로 활짝 웃었다.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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