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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九十六章 단장지애(斷腸之哀) (3)
움직이면 죽는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귀무살의 이야기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다.
홀리는 사마 여덟 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처리해 버렸다.
숲에 쥐죽은 듯한 적막이 흐른다.
분명히 홀리가 숲으로 들어간 것을 봤는데, 그녀의 행적을 잡을 수가 없다.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후우! 후우!”
바짝 긴장해서 가는 호흡을 흘려낸다.
무척 조심해서 숨을 뿜어내고 있지만, 이렇게 내쉬는 숨소리까지 들릴까 봐 더욱 조심한다.
홀리는 어떤 상태일까? 혈마가 되었을까? 아니면 아직 혈마가 되지 않았나?
어떤 상태라고 해도 귀무살이 감당하기에는 힘들다.
사마가 모두 죽었다면 이제 혈마가 된 홀리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분수도 모르고 괜히 혈마에게 덤비면 모두 처참하게 짓이겨진다.
‘어떻게 이런 일이!’
모두 같은 생각이다.
사마 셋이면 혈마를 충분히 잡는다고 했는데, 여덟이나 되는 사마가 한 명에게 당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벌어졌을까? 홀리가 아직 혈마가 되지 않은 상태라서 너끈히 감당한 것인가?
아니면 이령에 있는 동안 다른 기운이라도 얻었나?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죽게 될 거야!
귀무살들은 자신에게 그리고 숨어 있는 동료들에게 속삭였다.
입으로 말도 하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말했다. 영문은 알 수 없지만, 홀리가 떠난 것을 확인할 때까지 움직이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해?”
홀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물론 호발귀에게 한 말이다. 대답해줄 리는 없지만, 그래도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물어봤다.
귀무살, 이들을 어떻게 할까?
역시 호발귀는 대답해주지 않는다.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맡겼으니 귀무살도 그녀 뜻대로 하라고 한다.
홀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아버지와 이자의 기운은 여전히 느껴진다.
그들은 숲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한다.
사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두 사람이 숨어 있는 곳은 너무 멀어서 사마의 죽음을 지켜볼 수가 없다.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
“혈천방 이제 뿌리를 끊어야 해.”
끄덕! 끄덕!
홀리는 자문자답했다. 자신이 자신에게 묻고, 자신이 답했다.
혈천방과의 연관 고리를 끊어야 한다. 더는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귀무살들이 자신에게 취한 공격은 매우 강했다. 이만한 공격이라면 능히 혈마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호발귀가 때맞춰서 나타나 도와주었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아주 큰 낭패를 당할 뻔했다.
혈마가 되고도 남았다.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대략 반 시진만 더 지났어도 사마에게 잡혔을 것이다.
호발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런 공격을 당한다면…… 누구라도 당한다.
귀무살이 이런 공격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귀검. 미안해. 당신이 얼마나 애착을 가지는 부하들인지 아는데, 이런 살법을 쓰는 이상 어쩔 수 없어. 이 사람들, 여기서 놓아주면 다른 곳에서 또 이렇게 공격할 거야. 바로 우리, 혈마를 향해서. 이 사람들의 공격 목표는 혈마거든.”
혈천방과의 연관 고리를 끊는다. 그러기 위해서 혈천방을 멸문시켜야 한다면 기꺼이 한다.
저벅! 저벅!
홀리는 걸음을 옮겼다.
귀무살과 일전을 벌인다. 이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다른 혈마가 자신과 똑같은 곤욕을 당하게 할 수는 없다.
이들이 두 번 다시 혈마를 상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 놓아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확신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 느낌이 일어난다. 이들은 누군가를 혈마를 만들기 위해서 사련팔타법을 또 사용할 것이다.
팡! 팡!
생기가 두 발을 힘껏 밀어냈다.
혈기가 아닌 생기, 땅이 두 발을 붙잡는 느낌!
쒜에에엑!
홀리는 생기에 온몸을 맡겼다.
두 발이 바람처럼 허공을 내디뎠다. 땅이 더 강하게 밀어내고, 그녀는 더 빠르게 쏘아져 갔다.
그녀는 검을 휘두르지 않는다. 땅이 던지는 대로 쫓아갈 뿐이다. 하지만 목숨은 떨어졌다.
“아아악!”
누가 비명을 지르는지 안다. 귀무살이다.
홀리는 귀무살을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어떤 검을 쳐낼지 생각하지 않는다.
몸 안에서 일어난 생기가 타인의 생기를 찾아내서 꺼뜨린다.
어떤 자는 목이 베이고, 어떤 자는 등이 찍힌다. 어떤 자는 도주하다가 뒷머리를 맞기도 한다.
또 어떤 자는 검을 휘둘러 마주쳐 왔다. 하지만 격검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검이 어느새 상대방을 베고 지나간다.
파파팟! 파파파팟!
그들이 흘린 피가 홀리에게 튀었다.
홀리는 핏방울이 튀겨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죽인다! 죽인다!
사실, 홀리는 죽인다는 의식도 없다. 땅이 그녀를 퉁겨내고 그녀는 자유를 얻는다. 한껏 청량한 기분이 되어서 허공을 휘돈다.
그러면 귀무살이 맥없이 쓰러졌다.
“모여!”
찬도가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홀리는 흩어져 있는 귀무살을 귀신처럼 찾아낸다.
나무 뒤에 숨거나, 바위 뒤에 숨어 있어도 여지없이 발각된다. 어떻게 그렇게 잘 찾는지 모르겠다.
아니, 잘 찾을 수밖에 없다.
홀리가 보는 것은 생기다. 육신이 아니다. 두 눈으로 귀무살을 찾는 게 아니다.
인간이 흘리는 생기를 쫓아서 달려온다. 그러니 당연히 어디에 숨어 있던 발각될 수밖에 없다.
일 대 일로 싸울 때, 귀무살은 홀리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보아하니 지금 홀리는 혈마가 되었다.
인간이라면 펼칠 수 없는 검초를 전개하고 있지 않은가.
검이 너무 빨라서 보이지 않는다. 검력도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어쩌다가 그녀의 검을 막은 자도 있다. 하지만 막으면 뭐하나? 검까지 함께 썰려버린다.
홀리는 상대방의 병기를 잘라내면서 육신을 쳐버린다.
암기도 소용이 없다.
홀리는 암기를 쳐내지 않고 피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감탄이 절로 튀어나온다.
두 다리의 관절이 기이한 각도로 꺾인다. 마치 문어처럼 흐느적거린다. 딱딱한 뼈를 지닌 사람이라면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신법을 선보인다.
‘이건 상대가 안 돼.’
“뒤로 물러서! 모여!”
찬도가 쩌렁 일갈을 내질렀다.
기왕 상대가 안 될 바에는 차라리 같이 뭉쳐서 마지막 공격을 감행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쉬이잇! 휘익!
아직 홀리에게 당하지 않은 귀무살이 찬도 곁으로 모였다.
그들도 귀무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바르다고 본다.
다 함께 모여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면 혹여 살길이 생길지도 모른다. 지금은 오직 죽는 수밖에 없다.
스읏! 스스슷!
귀무살이 나란히 늘어섰다.
“아니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찬도는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찬도 곁으로 달려온 귀무살은 아홉 명밖에 되지 않는다. 찬도까지 딱 열 명이다. 예순세 명이 왔다가 쉰세 명이 쓰러졌다. 아주 잠깐 사이에.
홀리가 숲에서 튀어나온 게 조금 전인데, 숨 몇 번 고르는 사이에 쉰 명 넘는 귀무살이 쓰러졌다.
나름대로는 절정 검도를 수련한 자들, 동료 아흔아홉 명을 죽이고 살아남은 강골들, 그런 자들이 그야말로 종이 찢기듯 가볍게 찢겨 나갔다.
“아!”
찬도는 탄식했다.
탄식 같은 것은 할 생각이 없는데, 절정도를 수련하면서 그런 감정은 모두 망각했는데……
이번에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쉬이이잇!
홀리가 달려든다
“역광(逆光)이다. 할 수 있겠나!”
찬도가 차분히 말했다.
“하겠습니다.”
찬도 곁에 늘어선 귀무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가라!”
찬도가 일갈을 내질렀다.
그러자 귀무살이 일제히 홀리를 향해 쏘아갔다. 하지만 각기 순서가 있다. 한 명이 먼저 공격하면 다른 자가 바로 뒤를 잇는다.
일대일의 싸움이면서 숨돌릴 틈도 주지 않는 연타다.
죽음을 각오한 공격이다. 아니, 틀림없이 죽는다.
일대일의 승부가 가당키나 한가. 홀리는 맞선 자를 가차 없이 베어낼 것이다.
이때, 두 번째 검이 터진다. 앞선 자를 방패 삼아서 힘껏 홀리에게 밀어붙인다.
그리고 검초를 쏘아낸다. 필요하다면 앞선 자의 몸을 뚫으면서 검을 쳐낸다.
앞에 선 동료는 인간 방패다.
홀리는 검을 들어서 비스듬히 사선으로 내리쳤다.
그녀의 검이 요술처럼, 마술처럼 신기하게 확 피었다가 꺼지면서 검을 타고 흘러들었다.
파아앗! 퍼억!
검이 앞선 자의 심장을 후벼팠다. 동시에 밑으로 뚝 떨어진 검이 두 번째 사내의 검 든 손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가슴에서부터 목까지 위로 쳐올렸다.
귀무살이 순식간에 죽었다. 하지만 이 순간 이미 또 다른 사내가 쳐가고 있었다.
역광은 빗살이다.
끊어지지 않는 빗살이다. 귀무살들이 죽음을 담보로 계속해서 검을 쳐간다.
앞선 자를 방패 삼아서 홀리를 공격한다. 목표를 타격한다.
솔직히 열 번의 공격은 너무 짧다. 열 명 정도만 더 살았어도 스무 번의 연타가 이루어진다.
그만한 빗살이라면 홀리를 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귀무살의 역광은 매우 강력한 자살 공격이다. 하지만 그들의 자살 공격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상대가 너무 강하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후후! 괴물이군.’
스릉!
찬도는 칼을 뽑았다.
수하들이 깡그리 전멸당하는 판에 혼자만 살아 돌아갈 생각은 없다.
사실 도주도 하지 못한다. 혈마는 주변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한다.
호발귀가 혈마가 되어서 이산 저산을 뛰어다닐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잘 안다.
모든 생명체가 죽었다. 인간은 물론이고 들짐승 날짐승까지 다 죽었다.
물속에 있는 물고기까지 때려잡았다.
홀리는 자신보다 훨씬 빠르다. 혈맥참을 쓸 때는 그래도 상대할 수 있는데, 혈마가 되니 도저히 피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쒜에엑! 퍼억!
“크윽!”
비명이 울렸다. 홀리가 마지막 귀무살을 쳤다.
찬도는 역광에 가담하지 않았다.
원래는 그가 제일 마지막으로 역광에 몸을 바칠 생각이었지만, 역광조차도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역광이든 뭐든 혈마에게는 상대가 안 된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수련만 하고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도초를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
‘무정만천(無情滿天). 내 몸뚱이까지 무정하게 내팽개치고 전개하는 칼.’
쉬릭! 쉭! 쉿!
찬도는 허공에 칼을 휘둘러 몸을 달궜다. 손도 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을 풀어냈다.
수하들이 역광으로 죽는 동안 겨우 몸을 푼 것이다.
쉬이이잇!
홀리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혈마 놈들 지겨워.’
상대가 너무 터무니없이 강하면 저항할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칼 중 최강이 무정만천이지만 무정만천조차도 홀리에게는 약해 보인다.
쒜에에엑!
찬도가 칼을 쳐냈다.
칼이 흐른다. 하지만 예정된 타격 목표에서 벗어난다. 홀리가 칼을 비켜선다.
홀리의 이마가 칼 밑을 벗어났다.
동시에 북부에서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퍼억!
‘크윽!’
찬도는 쏟아지는 비명을 꾹 눌러 삼켰다.
죽더라도…… 꼴사납게 비명을 지를 수 있나. 귀무살 수령 귀무령이 단 일 초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비명까지 내지르나.
‘인간 같지 않은 놈들이야. 정말…… 정말…… 지겨워.’
쿵!
찬도가 쓰러졌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온다. 산 자도 죽은 자도 바람을 맞는다.
“안 나올 거야?”
홀리가 중얼거렸다.
사마가 죽고 귀무살이 모두 죽었는데도 호발귀는 나서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몸이 산산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다.
바람에 흩날렸다가 다시 돌아온다.
혈기투사.
사마와 귀무살을 죽이면서 일어난 혈기가 말끔히 씻긴다.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알았으니 말할 수밖에 없잖아. 그래도 말하기 싫은데. 말 안 해도 되지?”
역시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홀리는 호발귀가 자신의 말을 들었다고 확신한다. 그래도 말을 하지 않는다.
말을 하면 멀리 떨어져 있는 음문촌장이 눈치챌 것이기에 꾹 참는다.
무슨 일인지 모르니까 나설 수 없는 것이다.
홀리는 깊은 침묵 속에서 호발귀가 하는 말을 들었다.
- 묻지 않을게. 무슨 일인지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어떤 일인지 모르겠지만 좋게만 풀어. 원하는 대로 풀기 바래
혈기를 소멸시키는 바람이 호발귀의 말을 실어온다.
“고마워.”
홀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제는 방해꾼이 없다. 확신한다. 이제 남은 건 음문촌과 자신의 정리뿐이다.
휘릭!
홀리는 검에 묻은 피를 땅에 흩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