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六章 단장지애(斷腸之哀) (1)
“귀무살…… 아!”
홀리는 탄식했다.
귀무살이 원하는 바를 안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혈마가 되어야 하나?
귀무살을 잡기가 무척 힘들다.
자신이 원하는 싸움을 하지 못하고, 귀무살이 원하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싸움이 귀무살 쪽으로 움직인다.
이들이 검초로 공격을 가해왔다면 벌써 승부가 결딴났을 것이다.
박투, 육박, 격검…… 몸과 몸이 붙을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면 벌써 절반 이상은 쓰러트렸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이들은 음문촌 무공인 혈맥참도 감당하지 못한다.
하지만 귀무살은 철저히 암기로 싸운다.
일정한 거리를 벌려놓고 홀리가 다가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암기로 공격하는 것이 먼저인가,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 도주하는 것이 먼저인가.
우선순위가 어떻게 되냐고 묻는다면 당장 거리를 벌리는 것이 먼저라고 답할 것 같다.
공격은 안 해도 좋다. 거리를 벌린다!
그러면서 홀리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홀리가 쉴 것 같으면 즉시 암기를 도발한다. 홀리가 쫓아오면 도망간다.
공격보다도 거리 유지가 우선이다.
한두 수만에 끝내려는 생각이 아니다. 하루도 좋고, 이틀도 좋고, 열흘도 좋다.
몇 날 며칠이고 찰거머리처럼 계속 달라붙어서 격전을 치르고자 한다.
그렇다고 공격이 매섭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들은 귀무살이지 않나. 여덟 명이 던지는 암기도 날카롭지만, 사련의 연계가 숨을 막히게 한다.
공격과 공격 사이에 공백이 없어서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검을 움직여야만 한다.
“후욱!”
귀무살이 거칠게 숨을 토해내면서 빠져나간다. 하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는 잔잔한 호흡을 유지하고 있다.
진형에서 빠져나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몇 모금이라도 숨을 돌릴 수가 있다.
“후욱! 훅!”
“하아!”
홀리와 귀무살은 어깨를 들썩이면서 거친 숨을 토해냈다.
양쪽 모두 체력 소모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암기를 쳐내는 홀리도 정신없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귀무살도 숨이 턱에까지 찼다.
아무리 호흡을 고를 여력이 있다지만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섰다가 다시 튕겨 나가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전력을 다해야 한다.
진력 소모가 만만치 않다.
‘한 호흡만 늦추면 잡아낼 수 있겠는데……’
까앙! 깡! 타타탕!
홀리는 암기를 쳐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귀무살이 빠른 것은 아니다. 아니, 정말 빠르다. 자신이 이들보다 더 빠를 뿐이다.
신법만 가지고 말한다면 벌써 이들을 따라잡고도 남았다.
사련 연계가 아니었다면 벌써 따라잡았다.
“풋!”
홀리는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만일 뭘 했다면……’ 이런 가정은 무인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이런 생각에 집착하면 목숨을 잃는다. 가정을 버리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가?
첫째, 암기가 끊임없이 날아온다.
둘째, 귀무살이 자신의 움직임을 환히 꿰고 있어서 좀처럼 잡아챌 수가 없다.
한 사람을 쫓아가면 그 즉시 일조와 이조가 교대하며 여덟 명이 공격해 온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까앙! 깡깡깡! 까아아아앙!
홀리는 최대한 빠르게 암기를 쳐냈다. 그리고 귀무살을 쫓아갔다.
그러면 목표가 된 자는 즉시 도주하고 다른 여덟 명이 공격을 가해온다.
같은 일이 반복된다.
‘이 속에서 길을 찾아야 해. 내가 조금이라도 더 빨라질 때, 균형이 깨질 거야.’
쒜에에엑!
홀리는 즉시 방해 공격이 일어날 것을 짐작하면서도 귀무살을 쫓아갔다.
‘안 돼!’
한순간, 홀리는 가슴 떨림을 느꼈다.
이런 증상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더 당혹스럽다. 검 쥔 손이 부르르 떨린다.
가슴에서 울분이 치솟고 있다. 귀무살을 빨리 처리하지 못하는 분노가 뜨거운 열기가 되어서 손끝에 전해진다.
화(火), 감정의 변화!
원래 귀무살은 홀리의 상대가 안 된다. 그런 자들이 미꾸라지처럼 살살 빠져나가면서 암기만 던지니 당장 때려잡고 싶다.
한데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화가 난다.
이 감정은 홀리가 일으킨 것이 아니다. 혈기가 생기를 꺼트리지 못해서 일어나는 혈기다.
파팟!
눈길이 음문촌장과 이자에게 쏘아졌다.
멀리 떨어져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두 명의 생기도 짜증난다.
홀리는 아버지를 따라올 때부터 혈천방의 공격을 예상했다.
귀무살이 다가올 것도 알았다. 당연히 자신을 혈마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맨 앞에서 주도하는 자가 바로 자신의 혈육이다.
‘아버지!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새삼스럽게 음문촌장이 밉다.
혈육에 대한 정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아버지는 딸을 영혼이 없는 살인귀로 만들려고 하고, 오라버니라는 인간은 동생의 육신을 탐해서 살인 도구를 손에 쥐려고 한다.
인성을 망각한 인간들이다.
이미 가족은 무너졌다.
“크으!”
홀리는 신음을 흘렸다.
혈천방이나 귀무살은 남남이다. 그러니 그들이 자신을 적으로 간주해서 공격하는 것은 이해한다.
자신도 저들을 적으로 돌리고 검을 쳐내면 된다.
저들을 빨리 처리하지 못한 화는 일어나지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음문촌장과 이자에 분노는 쉽게 가라앉힐 수 없다. 생각만 해도 화가 치솟는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귀무살의 공격과 어울려서 극심한 혈기를 불러온다.
모두 죽이고 싶다.
‘눈앞에서 퍼덕거리는 불나방들!’
홀리가 살기가 충천했다.
홀리는 생기를 사용해서 수많은 싸움을 벌였다. 기어코 혈마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 살기를 일으켜서 혈마로 진입한 적은 없다.
지금은 살기가 들끓는다. 혈마가 되어서라도 음문촌장과 이자를 죽이고 싶다.
귀무살을 단숨에 쓰러트리고 싶다. 족제비처럼 얄밉게 피해 다니는 인간들이지 않나.
누군가를 이토록 죽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파파파! 파파파파파!
살기가 전신 요혈을 난타한다. 경맥을 뒤집는다.
순간, 머릿속에서 귀무살들의 모습이 싹 사라졌다. 그리고 어떤 환상이 피어났다.
땅이 웃는다.
밝게 웃으면서 두 발을 힘껏 잡는다. 아니, 아주 거친 힘으로 하늘을 향해 던진다.
몸이, 육신이 허공 높이 날아오른다.
이 모습에 취해서 검을 쓰면 생각대로 이루어진다.
귀무살이 단박에 죽는다. 그리고 자신도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혈마로 진입하는 전조 증상이다.
“이익!”
홀리는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순간,
팍! 팍!
암기 두 개가 오른쪽 견정혈에 틀어박혔다. 아주 강한 통증이 날갯죽지를 타고 쫘악 번져나간다.
“으음!”
홀리는 신음을 흘렸다.
견정혈을 당하면 팔을 쓰지 못한다.
잠깐의 망설임, 혈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입술을 악다무는 행동, 지극히 짧은 순간……
암기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귀무살은 모른다. 그들이 공격한 것은 홀리의 몸이 아니다.
홀리의 의지다. 혈마가 되지 않으려고 악다문 입술을 공격한 것이다. 혈마가 되라고.
쉐에에엑!
홀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사실 그녀는 귀무살을 향해 질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질주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땅이 자신을 튕겨낸다.
두 발을 굳건히 잡고 있던 땅이 있는 그녀를 힘껏 던져버린다.
쒜에에에엑!
홀리는 하늘을 나는 순간 자유를 느꼈다.
온 세상이 그녀를 반기는 듯했다. 얼굴을 스쳐 가는 바람조차 싱그럽다.
원융무애(圓融無碍)라고 했던가? 온 세상에 막힘이 없다. 몸을 움직이는데 방해되는 것이 전혀 없다.
하늘 끝까지, 지평선 너머까지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좋은 세상이지 않나.
“크아악!”
“커억!”
귀무살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으음!”
찬도는 신음했다.
지금까지 팽팽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암기를 던져왔는데, 홀리가 잠시 주춤거렸다. 멀리 떨어져서 구경하는 찬도도 감지할 정도로 확연히 틈이 생겼다.
그 틈을 노리고 암기가 틀어박혔다.
어쩌면 사마를 쓰지 않고도 홀리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에 홀리가 변했다.
홀리는 지금까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빨라졌다.
그녀가 튀어 올랐다. 성난 맹수처럼 달려들어서 귀무살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퍼퍼퍼펏!
검초가 터졌다.
혈맥참이 아니다. 얼핏 혈맥참처럼 보이는데, 정교함이 사라졌다.
혈맥참은 검초다. 진기가 검에 실리고, 검의 괘선을 그려낸다. 가장 빠르게 지나갈 길과 가장 강력하게 쳐야 할 곳을 찾아낸다.
그리고 선정한 곳을 정확하게 찾아간다.
지금 홀리가 사용하는 검초에는 그러한 정교함이 없다.
일단 괘선이 없다. 혈맥참의 진기를 그대로 쓰는 거 같은데, 검초는 무지막지하다.
날랜 호랑이가 와락 달려들어서 앞발로 가슴을 찢어 놓는 것 같다.
귀무살이 찢겨 나간다.
검에 베여 죽는 것이지만,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맹수에게 물어뜯기는 것처럼 보인다.
한 사람이 적어도 다섯 번에서 여섯 번은 타격당한 후에 쓰러진다.
팔이 떨어지고, 옆구리가 찍혀서 창자가 삐져나온다. 머리뼈가 반으로 갈리기도 한다.
온전히 죽은 자가 없다.
홀리는 양 떼에 뛰어든 늑대 마냥 거침없이 살초를 쏟아냈다.
“진형을 유지해!”
귀무살 중 누군가가 일갈을 내질렀다.
홀리와 거리를 벌려야 한다. 진영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사련팔타법 아니 팔련팔타법은 이미 무너졌다.
홀리가 귀무살에게 거리를 주지 않는다. 의도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바짝 다가붙으면서 거침없이 검을 그어낸다.
‘혈마.’
찬도는 때가 되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지금 홀리가 전대하는 살초를 보면 이건 도저히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강력한 맹수가 인간을 짓이긴다.
혈마는 개인마다 특성이 있다.
지금 눈으로 보는 것, 이것이 홀리의 혈마다. 혈맥참이 만들어낸 혈마다.
찬도는 입술을 오므려서 휘파람을 세게 불었다.
삐이이이익!
찬도의 입에서 날카로운 소성이 튀어나왔다.
귀천음(鬼穿音)이다. 귀신이 지옥을 뚫고 나올 때 흘리는 소리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은 듣지 못하지만, 망자는 듣는다. 홀리는 듣지 못하지만, 귀무살은 듣는다.
파라라라락! 쒸이잇! 쒜에엑!
소리를 들은 귀무살이 일제히 신형을 퉁겨서 뒤로 물러섰다.
홀리와 얽힌 자들은 신형을 빼내지 못했다. 동료의 지원을 잃고 온전히 홀리와 맞서게 되었다.
파파팟!
“아악!”
귀무살이 신형을 빼내는 동안에도 살검은 멈추지 않았다. 귀무살을 악착같이 뒤쫓으면서 난도질했다.
순식간에 이십여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쓰러졌다.
그들의 몰골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분노한 살인귀들이 떼로 몰려와서 힘없는 사람을 난도질한 것처럼 보인다.
홀리는 검에 인간의 심성을 담지 않았다.
찬도는 귀천음을 흘림과 동시에 품에서 우각(牛角)을 꺼냈다.
소뿔로 만든 호각이다. 얇고 길며, 사검(蛇劍)처럼 구불구불 구부러져 있다.
삐이익! 삐이이이익!
우각에서 일어난 소리가 처량하게 싸움판을 훑어갔다.
그러자 사방에서 시커먼 기운이 뭉실뭉실 피어났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어두운 기운이 먼저 덮쳐온다.
한순간, 그토록 거칠게 검을 휘두르던 홀리가 움찔거렸다.
홀리는 더는 귀무살을 쫓지 않았다. 제자리에 멈춰서서 사방을 노려봤다.
그녀도 사방에서 일어난 검은 기운을 느낀 듯하다.
파파팟! 파파파팟!
검은 기운이 홀리를 압박해 갔다.
“됐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다 했어. 이젠 너희가 요리해봐. 실망 주지 말고.”
찬도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찬도의 눈에도 사마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있다.
굳이 귀무살이 아니라도, 무인이 아니더라도…… 사방에서 피어나는 죽음의 기운은 단박에 느낀다.
그만큼 살기가 강렬하고 짙다.
사마는 이미 나타났으며 홀리와 교전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