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四章 외도가족(外逃家族) (3)
- 밖으로 도망간 가족
어떤 것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만나기 싫고, 보기 싫고, 잊어버리고 싶은 일일수록 그런 일은 종종 벌어진다.
모닥불을 한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아 있는 모습도 정말 보기 싫다.
갈색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한가운데 앉아서 마치 제왕이라도 된 듯이 자식들을 호통치는 모습도 보기 싫다.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이런 모습들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음문촌이라는 건가? 이런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인가?
“흐흐! 왔구나.”
이자가 홀리를 보며 활짝 웃었다.
예정대로 진행됐다면 이자는 홀리의 혈군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미 홀리와 살을 섞었을 거고, 애완동물처럼 옆에 끼고 다녔을 것이다.
홀리를 보는 이자의 눈빛이 음충맞았다.
홀리는 이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사자도 보지 않고, 육자만 잠시 쳐다봤다.
‘오빠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어?’
‘어쩔 수 없잖아.’
두 사람은 눈빛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홀리는 곧장 음문촌장에게 다가가서 다짜고짜 말했다.
“편지에 쓴 거, 사실이야?”
“오랜만에 만났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사실이냐고!”
홀리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사실일 것 같으니 니가 온 게 아니냐?”
음문촌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따라와!”
홀리는 찬바람 나게 획! 돌아섰다.
“저게 어디서!”
사자가 불끈해서 일어서려고 했다.
육자가 사자의 손을 잡아서 눌러 앉혔다.
“아서라. 원래 집 나갔다가 돌아온 망아지가 더 사나운 법이야. 처음부터 다시 길들여야지. 후후후!”
이자가 성난 모습으로 돌아서는 홀리를 보며 웃었다.
홀리와 음문촌장은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한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뭐라고!”
“네가 인간이니?”
“정말 네놈은!”
간간이 홀리가 분노를 터트렸다.
음문촌장은 차분했다. 분노하는 것은 홀리뿐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무슨 말은 나눴는지 홀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음문촌장의 멱살을 와락 잡았다.
“당신이 내 아비야! 정말! 정말! 당신이 내 아비라는 게 수치스러워! 내 몸에 흐르는 이 피! 다 뽑아내고 싶어! 내 몸에도 당신의 더러운 피가 흐른다는 게 역겨워!”
“마음대로.”
음문촌장이 히죽 웃었다.
딸에게 멱살을 잡혔으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 같이 갈까?”
음문촌장이 태연히 말했다.
“장소를 말해! 당신과 같이 가기 싫어.”
“그럴 수는 없지. 알다시피 이걸 공짜로 알려주는 건 아니잖아? 나도 널 이용할 만큼 이용해야지.”
“죽고 싶어? 내가 당신을 죽이지 못할 거 같아?”
“그것도 마음대로. 어차피 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동네 개차반 된 신세인데 죽는 게 아쉬울까. 딸내미 손에 죽으면 그것도 운명인 거고.”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이젠 창피함도 모르네?”
“그런 말을 할 필요 없고. 좋아. 내가 앞장서지. 내 뒤를 따라와. 오기 싫으면 말고. 굳이 동행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넌 내 딸이야. 다음에는 예의 좀 차리고. 효도까지는 바라지 않는다만.”
“이익!”
홀리는 음문촌장을 와락 밀쳤다.
음문촌장이 뒤뚱거리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이거는 애비로서 하는 말인데, 얼굴 좋아졌네? 그동안 편히 잘 지냈나 봐?”
“잊지 마! 수작 부리면 다 죽여버릴 거야!”
“쯧! 성질만 사나워져서는.”
“정말이야. 이젠 누구도 날 막지 못해. 나 화나게 만들지 마.”
“아이고! 무서워라. 네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꼭 아비한테 존대를 받아먹어야 속이 시원하시죠? 그러죠. 뭐. 조심하라는데 조심해야지 어쩌겠습니까?”
음문촌장이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혈천방주에게 다녀와라.”
음문촌장이 이자의 품에 서신을 찔러넣었다.
“혈천방주…… 말입니까?”
“가는 동안 저 아이를 길들여야지? 그래야 너도 품에 안을 거 아니냐? 아까 보니까 안고 싶어서 미치는 것 같던데. 동생을 욕구의 대상으로 본다. 너도 참.”
음문촌장이 이자의 가슴을 손으로 툭툭 쳤다.
“홀리의 혈군으로 정해졌지 않습니까? 혈군의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그래야지. 제대로 된 혈군이 되어봐.”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얼핏 말을 들어보니 어디론가 가신다는 것 같은데.”
“그건 알 것 없고. 어쨌든 홀리를 불러냈고, 옆에 두었잖아.”
“그렇죠.”
“우린 저 애를 잡을 수 없으니 혈천방주를 이용해야지. 그자에게는 괴물이 있으니까. 홀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면 혈천방주…… 후후! 열나게 달려올걸?”
음문촌장이 웃었다.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이자가 바로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음문 천장은 씩 웃었다.
앞으로 보름 예정으로 길을 떠난다. 그 사이에 혈천방은 홀리를 공격할 것이다.
홀리는 혈기가 치솟을 것이고 혈마가 된다. 그러면 그 즉시 지옥제일공 사령천공이 터진다.
홀리는 사로잡힌다.
이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생포되지 않으려면 이곳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한다.
홀리와 함께 보름 여정을 마칠 생각은 없다. 목적지에 갈 생각도 없다.
홀리가 너무 쌩쌩해 보여서 다소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혈천방이 알아서 할 문제이고.
‘이번 일…… 마지막 기회야.’
음문촌장은 이번 여정에 음문촌의 사활을 걸었다.
홀리를 혈마로 만들어서 혈군 밑에 두어야 한다
혈마를 음문촌이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앞으로의 판도가 걸려있다.
혈마를 갖지 못하면 음문촌은 지상에서 사라진다.
옛날로 돌아가서 멧돼지나 잡아먹고, 몇 날 며칠 씻지도 않는 산골 계집을 품어야 한다.
중원으로 나올 기회는 완전히 끊긴다.
혈맥참 같은 고도의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중원에 나오는 순간, 척살 대상이 된다.
음문촌은 세력을 넓히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음문촌이 건재했던 것은 음문촌 스스로 세력 형성을 조절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음문촌의 세력이 눈감아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당장 천살단이나 혈천방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혈천방은 음문촌을 휘하로 들일 생각이고, 천살단은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사실 음문촌은 이미 혈천방의 휘하가 되었다.
혈천방주가 음문촌에 혈마를 왜 주겠나? 혈마를 잘 키워서, 혈군 밑에 잘 가둬서 혈천방 밑으로 기어들라는 소리다.
혈마는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으니 혈마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딴짓거리하지 말라는 거다.
정말이다. 혈천방주는 혈마를 몇 번이고 잡을 수 있다. 그러니까 혈마가 어떤 식으로 변하든 상관없는 거다.
혈군에게 몸을 더럽히든, 호발귀의 마누라가 되든 아무 상관이 없다.
혈천방주에게 혈마는 살인 도구다. 아니, 그 이상이다. 불멸을 연구하는 대상이다.
“후후!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 방주. 방주도 이제 곧 우리 음문촌의 무서움을 알게 될 거야.”
음문촌장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쉬이이잇! 쉬잇!
이자는 산속을 질주했다.
이제 곧 홀리를 갖게 된다. 앞으로 칠 주야 안에 홀리와 함께 귀색혼령대법을 치른다.
‘예뻐졌어.’
이자는 홀리를 그렸다.
조각 같은 얼굴, 빼어난 몸매.
이자는 홀리를 동생으로 여긴 적이 한 번도 없다. 애초에 동생이 아니다.
이복이라는 말은 남남이라는 말이다. 알지도 못한 여자가 낳은 딸이다.
이자에게는 그렇다.
그러니 음문촌에 있는 형제들 모두가 남이다. 언젠가는 짓밟고 올라서야 한다.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는 거둘 것이고 거역하는 자는 죽일 것이다.
쉐에에엑!
이자는 빠르게 질주했다.
신형을 날릴 때마다 기운이 솟는다. 그때,
슷!
이자 앞에 무엇인가 불쑥 나타났다.
‘응!’
이자는 무엇인가가 튀어나왔다 느낀 순간, 반사적으로 신형을 퉁겨냈다.
그는 어느새 검을 뽑아 상대를 겨눴다.
“웬 놈이냐!”
이자는 와락 소리치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희한하네. 이제 나도 못 알아보나?”
해자수가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네 놈은!”
이자의 눈에 살광이 번뜩였다.
해자수…… 예전에는 이자의 눈길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비천한 놈이다.
중원의 소식을 물어다 주고, 심부름을 시키면 충실히 이행하는 중복이었다.
“네 놈이 웬일이냐?”
이자가 싸늘하게 말했다.
“거! 젊은 새끼가 나이 많은 노인한테 네 놈? 네 놈이 뭐냐? 네 놈이. 싸가지 하고는.”
“후후! 말은 들었지. 혈마가 되었다고? 혈마가 되니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보지?”
“뵈는 게 없긴 하지. 이 몸이 그래도 천살단주하고 한 시진 넘게 싸운 몸이야. 넌 그럴 수 있어?”
“으음!”
이자는 신음했다.
해자수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는 천살단주와 한 시진 넘게 싸웠다. 그것도 우위를 점했다.
혈기가 충천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천살단주가 위험했다.
생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한낮 비천한 자도 당장 일약 고수로 만들어 준다.
한 시진…… 생기를 사용한 해자수의 공격을 한 시진 동안 막아낼 수 있나? 불가능하다.
“웬일이냐? 나한테 볼 일이 없을 텐데?”
이자의 음성이 가늘게 흔들렸다.
“사람이 눈치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볼 일이 있으니까 이렇게 나왔지. 내가 이렇게 나왔을 때는 아씨 뒤를 밟았다는 생각은 안 해? 줘봐.”
해자수가 손을 내밀었다.
“뭘 말이냐?”
“그 늙은이 편지. 무슨 내용인지 좀 봐야겠어?”
“후후! 정 보고 싶으면 뺏어가야지, 말로 달라고 하면 되나.”
이자가 검을 들어 돌렸다.
“너, 그 검 쓰면 죽어. 나한테 천살단 불마촌 낭견대가 나한테 몰살당한 거 모르지? 너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좋은 말로 할 때 편지 내놔.”
“팔이 아파서 서신을 못 꺼내겠네?”
“그런 놈이 칼은 잘만 들고 있는데?”
“그러게. 팔이 여기서 딱 굳어버렸어.”
“뭐야? 꺼내 가라 이거야? 그럼 그래야지.”
슷!
해자수가 무방비 상태로, 전혀 싸울 준비를 하지 않은 채 가까이 다가왔다. 그 순간,
파파파팟!
이자의 검이 폭죽 터지듯 터져 나왔다.
한순간에 검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해자수 코앞에서 확! 피어났다.
사라졌던 검이 순식간에 수십 줄기가 되어서 쏟아진다.
혈맥참이다.
이자의 혈맥참은 홀리의 혈맥참과는 상당히 다르다. 똑같은 검초이지만 표현은 전혀 다르다.
파앗!
불꽃이 튀었다. 해자수의 몸이 찢겨나가는 듯 보였다. 한데,
탕!
이자의 검이 거센 힘에 밀려서 옆으로 툭 튕겨 나갔다. 그리고 가슴 한복판에 거대한 철판이 들이박혔다.
“컥!”
이자는 숨도 쉬지 못했다. 가슴뼈가 몽땅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자는 단 일 초 만에 뒤로 붕 날아가 떨어졌다.
“거 참. 이러니까 내가 얌전히 달라고 했잖아.”
“컥! 컥! 컥!”
이자가 숨도 쉬지 못했다.
생기로 쳐낸 일격…… 이렇구나. 이런 힘이 초식을 무너트리는구나. 모두 이런 힘에 밀려서 죽었구나.
이자는 혈마의 무공을 처음으로 받아봤다. 그것은 공포였다.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공을 무력화시키는…… 무공의 끝자락, 천계의 힘이었다.
해자수는 이자의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아! 이거 진짜! 내 짐작은 했지만 이게…… 이게…… 정말 이 인간 아씨를 핏줄 섞인 딸이라고 생각하긴 하나? 너무하네. 휴우!”
해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행동은 이상했다. 서신을 다시 접어서 이자의 품에 찔러 넣었다.
“이렇게 좋게 보여줬으면 됐잖아. 왜 꼭 맞고 보여줘. 누가 뺐는데? 그냥 보기만 한다고 했잖아. 가! 가서 혈천방주에게 알려줘. 어차피 그놈들 혈마만 보면 잡아먹겠다고 달려들 놈들이잖아. 쯧!”
해자수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이자는 눈을 끔뻑이면서 해자수를 쳐다봤다.
지금…… 혈천방에 서신을 전하라는 거지? 홀리를 잡으라는 거지? 왜? 이놈에게도 무슨 꿍꿍이가 있나? 혈마 내부에 분란이 생긴 건가? 아니면 권력다툼?
이자가 눈을 끔뻑거렸다. 해자수의 의도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해자수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 눈깔 더럽게 굴리네. 가려면 가고 말려면 말고.”
해자수는 이자는 내버려 두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볼일 다 끝났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