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三章 혈기파동(血氣波動) (5)
저벅! 저벅! 저벅!
절곡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주군. 이번에는 제가 몇 수만에 방어해냈습니까?”
판수가 물었다.
“다섯 수.”
“끄응! 어떻게 이건 발전이 없네요.”
“한 수는 발전 아닌가? 전에는 여섯 수만에 반응했는데, 한 수를 좁혔잖아.”
“겨우 한 수잖아요.”
“한 수를 우습게 보내. 한 번에 한수씩 줄이면 즉각 반응하는 데까지 다섯 번이면 되잖아. 오십 일 만에 이뤄내면 대성공이지. 겨우 한 달 보름?”
호발귀와 판수가 활짝 웃으면서 잡담을 주고받았다.
호발귀는 혈마를 처음 생기를 알았을 때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한동안 마음 놓고 생기를 사용해도 되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해준다.
혈기를 말끔히 거둬낸다.
시술을 받는 사람도 이런 상태가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 알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생기 수련을 쌓을 수 있다.
멀쩡한 상태에서 생기 숙련도가 깊어지면 호발귀가 말하는 생기의 온도를 알게 될지도 모른다. 혈기로 변하기 전의 생기 상태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온도를 알던, 생기 모습을 보든…… 변하기 이전 상태를 각인해야 한다.
이것은 궁극적인 목표이지만, 아직은 요원하다.
지금 당장은 혈마가 되면 즉시 날아올 기습 공격만 대비한다.
눈앞에 멀쩡하게 존재했던 생기가 불현듯 사라지면 그 즉시 기습이 이루어진다.
혈기는 감지하지 못하는 공격이기 때문에 습관처럼 움직이도록 몸에 각인시켜놓는다.
현재, 이령 혈마들은 생기가 사라지면 즉시 몸을 움직이도록 수련되어 있다. 공격 목표가 사라졌다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즉시 움직인다.
거기까지는 수련이 되었다.
호발귀는 거기서 더 발전시키고 있다.
한 호흡을 기준으로 해서 한 호흡 만에 반응하면 열이라고 본다. 한 호흡을 쉬기도 전에 즉시 반응하면 영이다.
한 호흡 이상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 한 호흡을 놓치면 습격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이미 공격당한 후일 것이다.
판수는 다섯 수만에 반응했다. 딱 반 호흡 만에 역공을 취해왔다. 한 호흡보다는 짧지만 영보다는 길다.
호발귀는 반응속도를 최소한 삼 이하로 끌어 내릴 생각이다.
“잘 끝났어?”
절곡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등여산이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네. 주군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판수가 즉시 포권하며 말했다.
“그놈의 주군은. 우리 다 같은 혈마이고 몇 사람 되지도 않는데, 이제 주군 소리 좀 빼지?”
“그런 말씀은 귀검님께 드리는 것이……”
“끄응! 앓느니 죽지.”
호발귀가 머리를 내둘렀다.
귀검은 고집이 쇠심줄이다.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는 말은 아예 듣지를 않는다.
이백 년 전 혈마가 현신한 것도 아니니 주군으로 모시지 않아도 된다고 누누이 말했는데, 도무지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완전히 벽창호다.
“호호! 자, 가요. 귀검님께서 닭 잡아 놓으셨어요.”
등여산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해자수 때부터 수련이 끝나면 삶은 닭을 먹는 것이 일종의 관습이 되어 버렸다.
매일 수련받는 사람이 달라지니, 닭도 한 마리씩 삶아진다.
그 일을 귀검이 하고 있다.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도, 이제 닭 잡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듣지 않는다.
그래서 귀검이 움직이면 귀무살 전원이 움직인다.
닭 한 마리 잡는데 귀무살이 다섯 명이 따라붙는다.
“저희 생기가 완전해요. 처음 생기를 알았을 때와 같은 상태입니다. 혈기로 물들기까지는 시간이 넉넉하니 닭 정도는 저희가 잡아도 됩니다.”
“안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혈마라는 말을 떼어냈을 때…… 그때 해라.”
“……?”
“혈마라는 말이 붙어 있는 한, 너희는 언제든 내 살법의 대상이 될 수 있어. 이 닭은 너희에게 주는 내 살점이다. 이 정도는 먹여야 죽일 때 가차 없이 죽이지.”
“참 정 없는 말씀.”
“주군처럼 조견이 되었든 심등이 되었든 다른 사람의 혈기를 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나오면 바로 그만두지. 그때까지는 내 일이다.”
혈기 수련은 쉽지 않다.
혈마가 되어서 무생기에 반응하려면 그만큼 많이 얻어맞아야 한다.
뇌와 몸의 연결을 끊는 생기도도 무수하게 당한다. 하루 동안에 적어도 서른 번 이상 단락이 생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근력이 상하고 뇌에 충격이 일어난다.
몸에 습격을 각인시키는 작업이다.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린 미친 자에게 습격을 알려준다.
정신이 번쩍 나도록 거세게 격타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호발귀는 손속에 사정을 담았지만, 그래도 인간의 육신이 감당하기에는 벅차다.
이런 수련을 거치고 나면 몸무게가 거의 열 근은 빠지는 기분이다.
눈이 휑하게 들어가고, 피부가 푸석푸석해지고, 팔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린다.
몸은 온통 멍 자국투성이다.
간혹 코피를 흘릴 때도 있다. 얼굴은 타격하지 않지만, 경혈이 격타당하면서 피가 역류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생기를 가볍게 운용하면 금방 회복된다.
생기는 어떤 금창약보다도 뛰어나다. 다 죽어가는 사람도 벌떡 일으켜 세울 수 있다.
화(火)!
아궁이의 불길만 들여놓지 않으면 생기 사용은 훨씬 깊이 연장된다. 적과 싸우면서 분노, 투지, 살심 등등 생기를 자극하는 감정만 일으키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
이상한 말이지만 정을 끊고 검을 쓰는 절정검(絶情劍), 무정검(無情劍), 단정도(斷情刀) 종류의 무공을 수련한 무인이 사용하면 딱 좋을 것이다.
그런 무공들도 살심은 여전히 존재하니, 더 무정해서 얼음처럼 찬 인간이 되어야 하겠지만.
닭, 닭, 닭……
이령 혈마 중에서 귀검이 삶아주는 닭을 마음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귀검이 어떤 마음으로 삶아주는지 알기 때문에 더 불편하다.
“쯧! 귀무령님께 또 폐를 끼쳤네.”
판수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산 아래 마을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작게 시작된 불꽃은 순식간에 집 한 채를 집어삼켰다.
다행히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물을 끼얹는 바람에 불길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다행이네요. 집 하나만 태우고 꺼졌네.”
길성이 말했다.
이령에서는 불난 집이 너무 잘 보였다.
검은 연기가 뭉클 솟구칠 때부터, 나무를 잘라서 얹은 너와집이 타들어 갈 때까지 일다경도 걸리지 않았다.
“누군지 되게 속상하겠네. 쯧!”
해자수가 혀를 찼다.
집이 불탄다는 것은 집 안에 있는 세간살이가 모두 타버렸다는 것을 말한다. 순식간에 입은 옷 한 벌밖에 남아있지 않은 알거지가 되었다는 뜻이다.
“마을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시골집은 짓기도 쉬워서 한 보름이면 뚝딱 지어낼 겁니다.”
여괴가 말했다.
“그래도 속상하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일 거야.”
당홍이 안쓰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마음속에 피는 불도 문제고, 저놈의 불도 문제고. 불! 불! 좌우지간 불이 문제네.”
도천패가 말했다.
“지금 그런 농담이 나와?”
“어! 농담 아닌데? 난 정말 불을 걱정해서 한 말인데?”
당홍의 핀잔에 도천패가 미안해했다.
홀리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불난 집을 쳐다보았다.
이령에서 환히 내려다볼 수 있는 마을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마을 정도 된다.
그 마을들은 몇 가구가 사는지 헤아릴 수도 있다. 궁충은 날씨가 좋을 때는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까지 봤다고 한다. 물론 개미처럼 작게 보였겠지만.
불이 난 마을은 소곡촌(小谷村)이다.
일곱 마을 중에서도 가장 잘 보인다. 또 하필이면 불이 마을 한가운데서 일어났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 불길이 번졌다면 온 마을을 집어삼킬 뻔했다.
‘불……’
홀리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해가 지고 저녁이 찾아왔다.
소곡촌은 횃불을 크게 밝히고 불난 집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불에 탄 나무들을 드러내고, 집터부터 다져나갔다.
흔하지 않은 경우다.
대부분 불이 나면 일단 불타지 않은 세간살이가 남아있는지 뒤져보기부터 한다. 그리고 대략 이삼일 정도 경과한 후에야 정리를 하기 시작한다.
불이 난 바로 그날부터 집을 정리하고 다시 지을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한다.
불이라는 강력한 마구(魔具)가 인간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마음이 되게 급했나 봅니다.”
착심이 지나가면서 말했다.
지나가는 길에 홀리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인사치레 겸 건넨 말이다.
“그러게요. 되게 급했네요.”
홀리가 감정 없는 음성으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가서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하하!”
착심이 말을 건네며 멀어져갔다.
귀무살들은 혈기가 도질까 봐 서로 접근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서로가 뭉쳐서 온종일 무공 수련을 한다. 그리고 밤이 깊으면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다.
오늘 거품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내일이 되면 호발귀가 제거해 줄 것이다.
홀리는 횃불이 밝혀진 집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낮에는 불이 났고, 밤에는 수리한다. 횃불은 정확하게 아홉 개가 밝혀져 있다.
불난 집을 중심으로 여덟 개, 그 뒤로 뚝 떨어져서 한 개가 밝혀져 있다.
음문촌 신호다.
음문촌이 보낸 신호는 일반적인 게 아니다. 가족 간에만 사용하는 특별 신호다.
음문촌에서 신호를 보냈다는 것은 이령 혈마가 발각되었다는 뜻이다. 음문촌이 안다는 것은 먼저 혈천방이 알아냈다는 것일 테고……
혈천방이 이미 주위를 포위했다는 말이 된다.
혈천방? 혈천방은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공격해 와도 능히 맞서 싸울 수 있다.
이령에 있는 혈마는 혈기에 침식당한 상태가 아니다. 이제 갓 생기를 얻은 사람처럼 팔팔하다.
해자수가 단신으로 불마촌 낭견대를 초토화할 때처럼 생기를 마음껏 사용할 수가 있다.
등여산과 함께 혈마가 된 호발귀를 유인할 때처럼 몇 날 며칠이고 생기를 펼쳐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생기에 대한 이해는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개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생기의 크기는 정해져 있다.
원래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생기는 한정되어 있다.
대자연의 큰 힘 중 아주 작은 부분을 사용할 수 있다. 범인이 보기에는 그것만 해도 천력과 버금가지만.
그런 혈마가 무려 아홉 명이나 있다.
혈천방이 공격해 온다면 그들은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혈천방은 이령 혈마의 반격을 한 달 이상 받아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몰살당한다.
아니, 기한은 무한정 늘어난다. 싸움이 끝나면 호발귀가 혈마들을 둘러앉힐 것이다. 그리고 혈기를 제거한다. 다시 원 상태로 복귀시킨다.
혈천방이 혈마를 만들 기회는 없다.
지금은 혈천방과 천살단이 동시에 공격해 와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문제는 저 불길이다. 음문촌에서 자신을 불러내고 있다.
‘가야 하나?’
가야 할 의무는 없다. 부녀간의 인연은 끊어졌다.
이미 삼자까지 죽인 입장이니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왜 불러대고 있나.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어. 아버지라고 해도.’
홀리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만약, 자신을 공격해 온다면 오히려 아버지와 오빠들이 죽을 것이다.
현재 그녀는 호발귀가 혈천방을 무너뜨릴 때처럼 강력한 생기를 사용할 수 있다.
그 힘 앞에서는 누구도 견디지 못한다. 귀색혼령대법? 어림도 없다. 구혼음소? 구혼음소가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
만약에 자신을 해코지하려고 부르는 것이라면 아버지……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홀리는 고개를 돌려서 움막을 쳐다봤다.
움막 안에는 등여산과 호발귀가 있다.
호발귀가 오늘 수련하면서 있었던 일을 등여산에게 말해주면 등여산이 뛰어난 머리로 분석한다.
도움이 될만한 말을 주고받는다.
혈마 수련을 하고 나면 항상 하는 작업이다.
호발귀는 결코 혼자서 생각하고 결단 내리지 않는다. 자신이 알아낸 것을 이령 사람들과 공유한다.
그러면 호발귀가 생각해내지 못한 일들이 그들이 말할 때도 있다.
특히 등여산은 머리가 뛰어나서 하나를 말하면 둘 셋을 말한다.
‘내려갔다가 오는데 한 시진이면 돼.’
홀리는 결심을 굳혔다.
음문촌에서 왜 자신을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만나볼 생각이다. 이미 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놈의 혈육이 뭔지…… 이렇게 부르니 가지 않을 수 없다.
쒜에엑!
홀리는 신형을 날려 빠르게 산 아래로 질주했다.
한 시진 안에 조용히 내려갔다 오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