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三章 혈기파동(血氣波動) (3)
- 칠개월후(七個月後)
스슷! 슷! 푸우우욱!
“……!”
툭!
한 생명이 떨어졌다.
소리 없는 죽음…… 방금까지도 살아있던 생명이 스러졌는데도 비명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죽임을 당한 생명은 처절하게 비명을 내지르려고 했다. 몸을 쑤시고 들어오는 칼날이 너무 아팠다. 죽기 싫어서 내지르는 비명이 아니라 육신이 아파서 내지르는 비명이다.
하지만 입을 꽉 틀어막은 손이 소리를 막았다.
결국, 한 생명은 힘없이 무너졌다.
생명을 도륙한 자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차분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쓱쓱! 쓱쓱!
어둠 속에서 옷 갈아입는 소리만 차분하게 울렸다.
꼬끼오!
새벽을 알리는 수탉 소리가 고요한 아침을 일깨웠다.
“아함!”
농부는 크게 기지개를 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뭉그적거리면서 우물가로 갔다.
“이구! 추워.”
농부는 공기가 차가워진 것을 느낀 듯 몸을 움츠렸다. 그러면서 마지못해 우물물을 길어서 세면을 했다.
덜컹!
문이 열리며 아낙이 나왔다.
아낙은 사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부엌으로 가서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아침밥을 지으려는 거다.
황석골 노(魯)씨 집에는 다섯 가족이 산다. 이제 막 사십 대에 들어선 부부와 세 아들이다.
세 명의 아이들은 이제 열 살, 일곱 살, 다섯 살이다.
가장 말을 안 들을 나이다. 그래서 노씨 집에서는 아침마다 고함이 터져 나오곤 했다.
- 빨리 안 일어나!
- 마당이나 쓸어!
- 지금 나이가 몇인데 오줌을 싼 거야!
아침마다 고함이 터져 나오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라고나 할까?
그런데 오늘은 조용하다.
사내는 묵묵히 세면을 하고, 여인은 밥을 짓는다.
아이들을 타박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다. 하루를 시작하는 움직임은 확실히 감지되지만 산골 마을답지 않게 조용하고 침착하다.
활기찬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게 한계인가?”
혈천방주는 상당히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검을 패용한 무인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기는…… 칼 차고 사람 죽이던 놈들한테 일반 양민들처럼 살라는 게 타당한 명령은 아니지. 말이 안 되는 명령이었어. 그러니 이렇게 되는 거지. 안 그래? 귀무령.”
혈천방주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귀무령 찬도(燦刀)는 당연하다는 듯 묵묵히 지시를 기다렸다.
귀검이 이끌던 귀무살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찬도가 이끄는 귀무살 시대다.
‘귀무살은 살검, 절대 양민이 될 수 없어.’
방주의 명령을 쫓아서 한 마을을 통째로 드러냈다.
마을에 사는 모든 생명을 끊어내고, 은밀히 암매장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귀무살을 꽂아 넣었다.
이런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두었던 귀화(鬼花)도 투입했다.
귀검은 귀화의 존재를 부정했다. 귀화는 필요치 않다는 것이 귀검의 생각이었다.
혈천방주의 생각은 다르다.
여인도 사내 못지않게 강하다. 여인들은 귀무살과 같은 과정을 통하게 하면, 잔인한 수련을 받게 하면…… 그녀들이 귀무살보다 못할 리 없지 않나.
귀화는 냉혹하고 강하다.
귀검이 귀화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에 그녀들을 쓰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양성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다.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 꾸준히 준비해놨다.
하지만 찬도는 생각이 다르다.
귀화의 존재 여부를 논하지 않는다. 귀검처럼 강하면서도 혈천방주에 복종한다.
자신의 의견은 아예 내놓지도 않는다. 철저히 부하로 존재한다.
마음에 드는 귀무령이다.
귀화도 마음껏 활용한다.
확실히 여자는 사내보다 냉혹한 면이 있다. 연약할 때는 한없이 연약하지만 일단 적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사내보다 지독해진다.
목숨을 빼앗는 손길에 주저함이 없다.
살인에 익숙하면 익숙해질수록 살수는 더 냉혹해진다.
사내는 살인을 거듭할수록 무감각해지지만, 여인은 잔인해진다.
아마도 저승에 악마가 있다면 악마의 성별은 여자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 혈천방주의 생각이다.
그들이 황석골을 점령했다.
아이들까지 준비하진 않았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나?
마을은 힘차게 아침을 맞이했지만 활기차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조용하고 침착하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위장 좀 제대로 하라고 해. 이거야 원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철저히 준비시키겠습니다.”
귀무령 찬도가 대답하며 신형을 솟구쳤다.
스스스슷!
찬도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후후!”
혈천방주는 만족한 듯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높은 산을 바라봤다.
이령!
“여기 숨어있었다. 이거지. 너희를 찾기까지 반년하고도 한 달이 더 걸렸네.”
혈천방주가 중얼거렸다.
혈기를 이토록 능숙하게 다를 수 있는 혈마가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게 실수였다. 그 생각 때문에 저들을 완전히 포위하고도 잡지 못했다.
“이제는 놓치지 않아. 후후!”
혈천방주는 이령을 보며 웃었다.
이령 주위에 있는 다섯 마을이 뒤집어버렸다. 원래 살던 양민들을 말끔히 제거되고 귀무살과 귀화로 대체했다.
그들은 산촌 사람들처럼 하루를 보낸다.
밭도 일구고 논일도 하고 산에서 나무도 해온다. 도검은 사용하지 않는다.
무공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다. 산적이 들이닥쳐서 마을을 휘저어도 저항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농민으로 숨어서 산다.
한데, 마뜩잖다.
혈천방주는 저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를 바랐는데 너무 무리한 바람이었다.
귀무살은 위장을 해 본 적이 없다. 저들은 늘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는 공격수들이다.
귀화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을 죽이는 데는 주저하지 않지만, 기녀로 분장한다거나 상대를 방심케 해서 기습을 노리는 살법은 배우지 않았다.
물론 암살도 능숙하게 한다. 암살이 주특기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상대방이 무방비 상태로 있는 틈을 노리는 것이지 일부러 변장까지 하면서 허점을 유도해내지는 않는다.
귀무살이나 귀화나 정면 돌파만 한다.
그런 귀무살에게 변복을 하고 모든 무공을 감춘 채 지내라는 명령이 통할 리 없다.
“조금 시간이 필요하겠어. 이놈들이 녹아들려면. 그 전에 이령 놈들과 마주치지 말아야 하는데. 쯧!”
혈천방주가 혀를 찼다.
“저곳이 확실합니까?”
음문촌장이 물었다.
“확실해. 아! 음문촌은 가만히 있어. 괜히 산통 깨지 말고. 다 된 밥에 코 빠트리지 말라고.”
혈천방주가 거침없이 하대했다.
이제 음문촌은 혈천방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한다. 머리를 숙여야 한다.
음문촌이 내세운 구혼음소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귀색혼령대법도 쓰지 못한다. 음문촌의 무공은 혈천방을 능가하지 못한다. 세력도 없다.
여러모로 음문촌은 멸살 당하기 딱 좋다.
그것을 혈천방주가 살려두고 있다. 당장 끊어버려도 좋은 사람들인데, 여전히 공봉 대접을 하면서 옆에 두고 있다.
“제 여식이 저기 있습니다.”
음문촌장이 차분하게 말했다.
“알지.”
“제가 불러낼 수 있습니다.”
“에이, 산통 깨지 말라니까. 관둬. 우리가 다 준비하고 있잖아. 저놈들 일망타진할 거야. 싹 잡아들여서 혈마로 만들 건데, 일부러 긁어 부스럼 만들 일 있어?”
혈천방주가 고개를 저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저기 혈마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저희는 딱 한 명, 제 여식만 데려가겠습니다.”
“산통 깨지 말라니까.”
“그럴 일 없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여식만 빼내겠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촌장이 지금껏 제대로 한 일이 있었어야 말이지.”
“이번 한 번만…… 저희가 홀리를 불러내게 해주십시오.”
“아서, 아서. 너희가 움직이면 우리도 들통나. 저놈들 모두 잡으면 그때 홀리 줄게. 혈마로 만들든 말든 마음대로 해. 그때까지 가만히 있기만 해.”
혈천방주가 웃었다.
“저희한테 여식과 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신호를 보내면 알아채고 나올 겁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약속드립니다. 방주께서 하시는 일에 전혀 방해되지 않을 겁니다.”
음문촌장이 자신 있게 말했다.
혈천방은 혈마를 파괴한다. 일단 혈마로 만든 후에 잡아들인다.
그래서는 손을 쓰지 못한다. 당홍이 좋은 사례다. 혈마로 변해버린 자를 속박하기는 쉽지 않다.
음문촌장은 삼자가 죽은 것이 급하게 귀색혼령대법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미색에 홀릴 틈도 없이 대법부터 펼쳤다면, 절대 그런 식으로 죽지 않았을 텐데.
귀색혼령대법은 혈마가 되기 전에 심상(心象)을 심어놓는다. 그게 순리다.
촌장이 간절하게 부탁하는 이유다.
온전하게 혈군을 만들어야만 혈마를 조정할 수 있다. 혈마 천하를 만들 수 있다.
혈천방주가 음문촌을 쳐다봤다.
“거 참, 사람 마음 약하게 만드네. 좋아. 해봐. 놈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신호를 보낼 수 있다면 해봐. 홀리가 다른 놈들과 상의한다거나 하면 안 돼. 신호를 받으면 즉시 혼자 나올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나?”
“그럴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산통을 깨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음문촌 사람들, 전부 시마 재료로 내줘야겠어. 촌장 자식들 정도면 상당한 시마가 될 거야. 그 정도 약조는 해줘야지? 동의?”
“동의합니다.”
음문촌장이 말했다.
그도 이번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안다.
혈천방은 호발귀를 잡기 위해 다섯 마을을 뒤집고 이령 주변을 완전히 장악했다.
어떤 이유로든 호발귀에게 경고하면 산통이 깨진다.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방주님의 대업에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다. 홀리만 조용히 빼내겠습니다.”
음문촌장이 다짐했다.
“후후!”
혈천방주는 멀어져가는 음문촌장을 보며 웃었다.
음문촌장을 살려두고 있는 이유가 있다.
음문촌장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 혈마가 되기 이전에 낙인을 찍는 방법이 혈천방에는 없다.
오직 음문촌만이 사용할 수 있다. 크게 믿지는 않지만, 한 명쯤 그런 방식으로 혈마를 만드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음문촌장에게 홀리만 빼낼 방법이 있다면 당연히 써야 한다. 그가 저렇게 사정하지 않아도.
이번 일을 허락한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이령에 있는 혈마는 예전의 혈마가 아니다.
혈마의 사슬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은데, 호발귀에게 갈고 다듬어진 것은 확실하다. 뭔가가 다를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음문촌장이 수를 써서 홀리만 빼내도 좋다. 한 명쯤은 혈기가 충천 되기 이전에 혈마로 만드는 것도 괜찮다.
사실 어떤 혈마가 될지 상당히 궁금하다.
발각되어서 혈마와 교전을 벌여도 좋다. 혈마가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볼 좋은 기회다.
“촌장. 사력을 다해야 할 거야. 이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니까. 후후후!‘
혈천방주는 웃었다.
혈천방의 눈은 천하에 깔려 있다.
호발귀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다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딱 하나 숨기지 못하는 것이 있다.
혈마의 괴소다.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섬뜩한 울음소리!
이 소리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누가 들어도 단번에 알아챌 수가 있다.
인간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소리라고만 말하면 누구라도 알아챈다.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보고하는 자들은 없다. 호랑이의 으르렁거림도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기는 하지만 인간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다.
이령에서 울리는 괴소는 다르다.
인간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소리다. 그런 소리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을 계속해서 울린다.
이래서야 어디 숨을 수 있나.
이령에서 터져 나오는 괴소에 비하면 오히려 늦게 발각된 감도 있다.
그만큼 호발귀가 조심했다는 뜻이다.
저들은 아주 지독히 몸을 사렸다. 이령 정상을 점거하고 산 아래 계곡을 낱낱이 감시한다.
소리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기진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래도 더 조심했어야 한다.
‘이제 찾아냈으니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아. 반드시 잡는다.’
혈천방주는 이령을 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