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二章 휴식주처(休息住處) (3)
“저기가 오인촌이지?”
“어. 맞아.”
“이제는 길이 생겼네. 그것참 희한해. 사람 몇 사람 산다고 당장 길이 나고.”
사람들은 이령 화전민 마을을 오인촌이라고 불렀다. 오인산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저 사람들은 어때?”
“아직은 모르지 뭐.”
사람들은 쑥덕거리기만 할 뿐, 호발귀 일행이 머무는 마을에 들어서지 않았다.
마을에 들어서서 물이라도 한잔 얻어먹기까지는 두어 달 이상 걸린다.
그동안은 어떤 사람들이 터를 잡았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이령 화전민촌은 어느 화전민 마을이나 다를 바 없다.
나무 기둥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막았다. 지붕은 나무를 엮어서 얹었다.
완전한 흙집이다.
흙집이라고 해서 단단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보수만 잘하면 백 년 이상 버틸 수 있다.
그래서 화전민이 떠난 자리에 다른 마을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기도 한다.
또 아예 떠나지 않고 평생 눌러사는 사람도 있다.
화전을 일궜는데 뜻밖에도 살기에 넉넉할 정도로 양식이 수확될 때, 떠나지 않고 남는 사람이 있다. 화전을 일군다고 해서 떠돌이 생활을 즐기는 건 아니다.
이들의 이웃은 가깝다고 해도 십 리는 떨어져 있다. 까마득한 산 밑에 있는 마을이 가장 가깝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 산속에 저런 사람들이 사는구나 할 뿐이다.
어떤 때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어떤 때는 완전히 소원한 채 살아간다.
꼬끼오!
수탉이 홰를 쳤다.
해자수는 화전민촌에 많은 가축을 들여왔다. 개도 키우고 닭도 키운다. 돼지와 토끼도 키운다.
가축은 척박한 산골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해 준다. 가끔 고기도 먹어줘야 한다.
사냥하면 되지 않을까?
혈마는 사냥하지 않는다. 살상은 완전히 금지했다.
생명을 끊는 자체가 바로 혈기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생명은 생기를 흘린다.
생명을 끊지 않았는데도 혈기가 움직일 때도 있다. 생명이 스러지는 느낌을 받으면 즉시 반응한다.
이런 영향은 가축을 죽일 때도 일어난다.
그래서 닭 한 마리를 잡더라도 혈마는 손대지 않는다.
귀무살이 혈기가 미치지 않는 계곡까지 내려가서 닭을 잡고, 손질까지 마친 후에 가져온다.
상당히 번잡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잘 잤나?”
해자수가 길게 기지개를 켜며 호발귀에게 다가왔다.
“됐습니다.”
호발귀는 해자수를 보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는 언제쯤 되는 거야?”
“이왕 시작한 것, 진득하게 기다려. 뭐 그렇게 조급해? 어차피 길게 생각하고 눌러앉은 거 아니야?”
홀리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기는 한데 지루하니까 하는 말입죠. 그냥 한바탕 드잡이질을 치면 간단할 텐데 말이야. 바로 혈마가 될 테니까. 이거 마냥 기다리자니 따분해서. 아함!”
해자수가 잠이 덜 깼는지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런데 어제는 누가 같이 잤나? 아씨 기분이 별로인 걸 보니까 책사님하고 잤나?”
해자수가 흙집 안을 기웃거리며 말했다.
“해자수……”
홀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해자수를 노려보았다.
화전민촌을 일구면서 호발귀는 정식으로 살림을 차렸다.
두 여인과 한집에 기거했다. 또 한 쌍의 부부, 도천패와 당홍도 같은 침상을 썼다.
“이봐, 마눌 둘 있는 게 좋은 게 아니지? 이제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할걸? 어때? 밤에 힘 딸리지 않아? 힘들면 인삼 좀 달여주고. 그게……”
빠악!
느닷없이 해자수의 뒤통수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울렸다.
말을 잇던 해자수는 비명과 함께 머리를 감싸 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호호호! 한 대 맞으실 줄 알았어요.”
등여산이 머리가 아픈 듯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해자수를 보며 놀렸다.
“끄응! 아무래도 여기서는 싸우기 힘들어. 일 대 삼이잖아. 모두 한통속이니.”
“해자수. 한 대 더?”
“아니, 아니, 아니, 됐습니다. 아씨.”
해자수가 급히 손을 휘저었다. 그때,
쿵! 쿵! 쿵!
땅이 바위에 찍히는 듯 거센 울림이 일었다.
도천패가 오고 있다.
도천패는 몇 걸음 걷지 않는 동안에도 당홍을 등에 업고 있다.
이령에 터를 잡은 후에는 일체 무공 수련을 하고 있지 않지만, 쌍학의 느낌만은 유지하려고 한다.
“됐어.”
호발귀는 도천패가 다가오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 없어?”
“이상 없어.”
“이거 대체 언제쯤 돼야지 혈기가 농익는 거야?”
“그거야 나도 모르지.”
호발귀가 칼로 감자 껍질을 벗기면서 말했다.
호발귀는 아침저녁으로 혈마를 점검했다. 혈기를 투사해서 그들의 혈기 상태를 감지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생기를 쓰지 않아도……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혈기는 저절로 짙어진다.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어도 연한 빛에서 진한 빛으로 변한다.
이것이 혈기가 농익는 것이다.
호발귀는 혈기가 무르익어서 혈마가 되기 직전의 상태가 되기를 기다린다.
툭 건드리기만 하면 탁! 하고 터져버릴 상태가 될 때까지 지켜본다.
해자수 말대로 싸움을 벌이면 혈기는 충만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변한 혈마는 혈기가 농익지 않은 상태에서 변했기 때문에 설익은 과일처럼 떨떠름하다.
완전히 혈기에 물들었을 때 혈마가 되면 반응도 훨씬 부드러워진다.
호발귀는 인체에 가장 무리가 없는 상태를 기다린다.
“우리는 오늘 요 아래 계곡에 있을 거야. 거기 약초가 아주 많아. 아주 밭이야, 밭.”
도천패가 말했다.
그가 말한 곳은 궁충이 찾아낸 계곡 앞쪽이다. 그곳에는 독충과 독초가 득실거린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독물이 밟힌다.
독공 고수인 당홍에게는 약초밭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두 사람은 눈만 뜨면 계곡으로 내려간다.
“안으로 들어가실 것 같으면 연락 주세요. 제가 가서 진을 거둬드릴게요.”
등여산이 말했다.
계곡 앞에는 미령환혼진이 펼쳐져 있다. 들어갈 수도 없지만, 안에서 나오지도 못한다. 등여산이 직접 가서 진을 거둬주어야만 출입할 수 있다.
“아냐. 괜찮아. 밖에서만 놀아도 충분해.”
당홍이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좀 늦게 일어났죠?”
마지막으로 궁충이 다가왔다.
궁충은 활을 쥐고 있지 않다. 늘 활을 잡고 있던 사람이 활을 놓으니까 너무 어색하다.
궁충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병기를 놓았다.
“흠! 아직 멀었네.”
궁충의 생기는 이제 막 태동 단계다.
생기를 마음껏 활용해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쓰면 쓸수록 힘이 넘친다. 더 쓰고 싶어진다.
궁충은 아직 혈마의 위험성을 알지 못한다.
그는 다른 사람이 혈마가 되는 과정을 보았다. 하지만 자신만은 혈마가 되지 않고 영원히 현재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는 착각마저 들 것이다.
“가보겠습니다. 오늘은 하단 밭을 점검할까 합니다.”
“수고해.”
호발귀는 궁충을 끝으로 마지막 점검을 마쳤다.
이 아침 점검은 대단히 중요하다. 아마도 복우산 이령 생활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될 것이다.
호발귀는 혈기투사를 등여산과 홀리에게도 했다.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두 여인부터 살폈다.
두 여인의 혈기는 안정적이다. 동굴에서 수련한 것이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다.
이 정도 같으면 두 여인은 특별히 더 수련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하지만 호발귀는 등여산과 홀리도 수련에 동참시켰다.
그의 목적은 동굴 수련에서 그치지 않는다. 혈기를 알아버린 모든 사람이 전부 자신과 같은 상태가 되기를 바란다.
혈기를 지켜보고 다스릴 수 있는 단계가 되었으면 한다.
아니, 다스린다는 말은 오만한 표현이다. 혈기는 다스려지지 않는다. 절대 다스릴 수 없다.
혈기를 지켜보는 것이 전부다. 혈기가 정신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최선이다.
호발귀도 그 정도 선에서 그치고 있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정신을 잃지 않고 혈기를 유지할 수 있다.
언제 조견이 무너질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이 정도만 유지해도 더 바랄 게 없다는 심정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상태가 됐을 때에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감자 다 깠어?”
홀리가 물었다.
“응. 다 깠어. 이걸로 뭐하게?”
“감잣국이나 끓일까 하고. 적은 양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건 국이 최고야.”
홀리가 호발귀에게서 감자를 받으며 말했다.
“잠시 걸었으면 합니다만.”
귀검이 정중하게 말았다.
“후후! 할 말이 있는 모양이네. 잠깐 산책 좀 하고 올게.”
호발귀가 등여산과 홀리에게 말하며 일어섰다.
이령에 온 후, 귀검은 될 수 있는 대로 호발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경계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귀검과 귀무살은 이령 가장 바깥쪽에 흙집을 지었다.
오인촌 외곽에 집을 지어놓고 거주하면서 사주 경계를 철저히 했다.
보지 않는 듯하면서 봤고, 느슨한 듯하면서도 늘 긴장감을 풀지 않았다.
경계는 귀무살이, 주군은 편안하게.
귀검의 신조는 매우 간단하다.
“중요한 말인가?”
호발귀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물었다.
집 안에서 말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 두 여인에게 비밀로 할 것은 없다.
그런데도 같이 걷자고 하는 것은 말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래서 호발귀가 먼저 물었다.
저벅! 저벅!
귀검은 묵묵히 앞장서서 걸었다.
두 사람은 몇 걸음 걷지 않아서 이령 정상에 올라섰다.
남들은 이령에 올라서려면 거의 반나절은 산을 타야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숨 몇 번 들이쉴 정도면 충분하다.
“부탁이 있습니다.”
귀검이 넓게 펼쳐진 산하를 굽어보면서 말했다.
“무슨 부탁인데 이렇게 뜸을 들여? 듣기 겁나네. 무슨 부탁인데?”
호발귀가 웃으면서 귀검을 쳐다봤다.
귀검이 이토록 어렵게 말을 꺼내는 것은 처음 봤다. 귀검은 늘 망설임 없이 즉시 말했다.
“우리 귀무살…… 궁충까지 다섯 명이 있습니다. 궁충은 혈마가 됐으니 주군이 직접 관리하실 것이고, 남은 놈이 넷인데…… 그놈들에게 생기를 알려주십시오.”
“뭐!”
호발귀가 놀라서 귀검을 쳐다봤다.
귀검의 부탁은 귀무살 네 명을 혈마로 만들어 달라는 거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 것 같고, 방금 귀무살을 혈마로 만들어 달라고 한 것 같은데?”
“우리 귀무살 말입니다. 그래도 한때는 중원 천하에서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칠 정도로 무섭고, 잔인하고, 강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판에서는 도저히 힘을 쓰지 못합니다.”
“……”
호발귀는 침묵했다. 하지만 인상을 저절로 찌푸려졌다.
“아시다시피 저희 귀무살은 쫓기기 바쁘죠. 시마, 사마, 음문촌, 혈천방, 천살단.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버텼습니다만 이제 남은 놈들이 저놈들뿐입니다. 그것도 힘이 되지 못하죠. 집 앞에 서서 집을 지키는 개가 될 수는 있지만, 막상 적이 나타나면 물어뜯지 못합니다. 주군께 도움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혈마를……”
“혈마가 되면 도움이 될 겁니다. 지금 궁충을 보니 싸움만 없으면 한동안 혈마가 되지 않을 것 같더군요.”
“맞아.”
호발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습니다. 나머지 네 놈, 혈마로 만든다고 해도 경계를 서기에는 충분합니다. 이미 위험에 처한 사람부터 천천히 수습하시고, 그다음에 저희 귀무살을 수습해 주셨으면 합니다. 수습이 곤란하시면 제가 마지막을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음!”
호발귀는 침음했다.
귀검은 진심이다. 귀검이 눈이 날카롭게 번뜩인다.
“그러는 귀검은 정작 혈마가 될 생각이 없잖아.”
“저는 주군의 마지막 칼입니다. 주군이 혈마가 되었을 때…… 지금 상황으로 보면 제 검이 주군께 통하지 않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주군을 벨 수 있는 마지막 검입니다. 저는 항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제 부탁, 들어주십시오.”
귀검이 머리를 숙였다.
“이건 내가 선택할 문제가 아닌데? 인간은 언제든 검을 놓을 수 있어. 세상에 내려가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사람 속에 섞여서 살 수 있어. 하지만 혈마가 되면 그렇게 하지 못해. 평생 검을 놓지 못하는 거지. 후후! 혈마가 되는 건…… 몇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나.”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귀검이 말했다.
“저놈들 인생은 제가 쥐고 있습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제 인생은 주군이 쥐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저를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저놈들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귀검이 머리를 숙였다.
“먼저 본인들 이야기부터 들어보고, 본인들이 하겠다고 하면 하고 말겠다면 말고. 귀검, 이것만은 내 뜻에 따라줘. 귀무살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본인들 자유의사가 아니면 하면 안 돼. 이건 평생을 두고 후회할 문제거든. 강해지기만 하면 괴물이 되어도 좋다. 그런 생각이 아니면 혈마가 되면 안 돼.”
호발귀가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