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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457화 (457/500)

第九十二章 휴식주처(休息住處) (2)

“제길! 정말 더러워서 이 짓거리 못 해 먹겠네. 내가 늘그막에 이 짓 하려고 여기 있어? 퉷!”

해자수가 투덜거렸다.

마을까지는 왕복 이십 리 길이다.

갈 때는 홀가분하지만 올 때는 쌀을 잔뜩 짊어지고 십 리를 걸어와야 한다.

화전민이 사는 곳은 길도 나 있지 않다. 지금부터 그들이 산길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거친 풀숲을 헤치고 길을 만들면서 다녀와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네. 젊은 놈들 놔두고 내가 이 짓을 왜 하는 거야?”

정상에서 마을이 있는 곳을 살펴봤다. 마을로 향하는 길도 눈짐작으로 정했다.

하지만 막상 짐승들이나 다리는 길을 따라 걸으면서 길을 만들자니 무척 힘들다.

툭하면 급한 산비탈이 나오는 통에 되돌아가기 일쑤다.

“쌀 좀 삽시다.”

해자수가 농가로 들어서며 말했다.

마을에 미곡상(米穀商)이 있을 리 없다. 방앗간도 없다. 그러니 아무 집이나 불쑥 들어가서 거래를 청한다.

“우리도 양식이 얼마 없는데.”

농민은 죽는소리부터 냈다.

아마도 산불을 봤을 때부터 누군가가 내려올 것이라는 생각은 했을 것이다.

쌀을 비싸게 팔려는 수작이다. 양식이 없다면서도 거절은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화전민들은 이런 부분을 인정해준다. 토착민들과 어울려야 하니 값을 비싸게 주고 사간다.

원래 화전민들의 습성이 그렇다.

“내가 늙어서 힘이 없어. 많이 준다고 해도 가져가지도 못해. 쌀 한 가마니만 삽시다.”

“한 가마니?”

“터 좀 다지면 애들이 사러 올 건데, 우선 당장 요기는 해야 하니까. 같이 먹고 삽시다. 주쇼.”

해자수가 전낭을 풀었다.

“삼백 냥이면 되지?”

“삼백 냥? 어휴! 이 촌구석에서 쌀을 어디서 사. 우린 뭐 하늘에서 떨어지나? 다른 데 가보슈.”

“사백 냥. 사백 냥. 이 정도로 합시다.”

해자수가 동전 사백 냥을 꺼냈다.

시중에서는 쌀 한 석이 오백 냥에 거래된다. 한 석은 두 가마니이니 이백오십 냥이다.

“사백 냥이라면 뭐…… 한 가마니 정도면 내줄 수 있지.”

농민은 만족한 듯 쌀 한 가마니를 내줬다.

“지게 좀 씁시다.”

“언제 갖다 주려고? 아예 그냥 사지?”

“이 동네 인심 야박하네. 하루 이틀 볼 것도 아닌데. 에이, 좋다! 오늘은 이 동네 처음이고 하니까 사지. 닷 냥에 파쇼. 안 된다면 다른 곳에서 사고.”

“됐어. 됐어. 그 정도면 됐지 뭐.”

농민이 돈을 챙겼다.

“이령(二領)에 터를 잡는 것 같던데…… 어디서 왔소?”

“오인산.”

“아! 오인산.”

농민이 아는 척을 했다.

복우산에 사는 사람이라면 오인산도 안다. 복우산 줄기는 아니지만, 지척에 있는 산이다.

“그래도 복우산은 명산이니 한 이삼 년 먹을 게 있겠지.”

말하는 동안 해자수는 쌀을 지게에 얹었다.

화전민은 논밭을 개간하지 않는다. 산을 태워서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씨앗을 뿌린다.

나무를 태운 재로 거름 삼고 땅의 지력(地力)에 힘입어서 곡식을 키워낸다.

당연히 수확량은 좋지 않다. 첫해가 가장 좋고, 이삼 년 정도 지나면 지력이 고갈해서 곡식이 잘 자라지 않는다.

그러면 화전민은 미련 없이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

짧으면 일 년, 길어야 삼 년 정도 머문다.

“끄응!”

해자수는 이를 꽉 깨물며 지팡이를 잡고 일어섰다.

“어휴! 나이는 드셨어도 힘은 장사네. 쌀 한 가마니를 거뜬히 지시네.”

농민이 감탄했다.

“산에서 살면서 이 정도도 힘이 없으면 죽어야지. 다음에 또 봅시다. 안면 텄으니까.”

“그럽시다.”

농민이 해자수를 배웅했다.

해자수에게 쌀 한 가마니 정도 지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무인이 아니라고 하면 해자수의 나이나 덩치로 보아서 쌀 한 가마니를 치고 가는 게 대단히 힘이 센 사람처럼 보인다.

아예 힘쓰는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처럼 보인다고 할까?

농민은 해자수가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뒤돌아섰다.

이미 해자수에 대한 신경은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 말은 화전민에 대한 신경을 끊었다는 말과도 같다.

또 오늘 있었던 일은 삽시간에 소문으로 번져나갈 터이다.

오인산에서 온 화전민이 이령에 터전을 잡았다!

이제부터 사람들은 이령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화전민이라는 것도. 가까이할 필요도 없지만 꺼릴 필요도 없는 존재들이다.

다만 시비가 붙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막살아온 사람들이라서 건들면 물불 안 가리고 덤빌 테니까.

그것만 조심하면 저들은 아무 문제 없다.

* * *

“주변을 샅샅이 뒤져라!”

궁충이 말했다.

“넷!”

길성, 판수, 여괴, 착심이 힘차게 대답했다.

“두 번 일하지 않게 꼼꼼히 살피고 와! 한 시진 후에 보자!”

쉬이이잇!

네 명이 일제히 신형을 날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이 복우산에 온 목적은 혈마를 수련시키는 데 있다.

혈마가 된 후에도 암약혼기 같은 공부에 당하지 않도록 반사신경을 철저히 수련시켜놔야 한다.

혈마를 수련시킬 장소!

넓은 동굴이면 더없이 좋고, 어지간한 동굴이면 인위적으로 넓히면 된다.

그마저도 없다면 사방이 막힌 항아리 모양의 절곡을 찾아내야 한다.

입구를 틀어막고 절곡 안에서 혈마를 수련시킨다.

물론 사방이 트인 곳은 민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혈마의 울부짖음 소리를 듣게 되면 곤란하다.

혈마의 울부짖음은 온 산을 쩌렁 울린다.

괴기한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낮이고 밤이고 끊이지 않고 울려댄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엽사들이 당장 절곡으로 달려올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복우산까지 와서 숨어든 이유가 없다.

쒜에에에엑!

궁충도 신형을 쏘아냈다.

궁충의 안력은 귀무살을 훨씬 능가한다. 매의 눈이라고 해도 무색할 정도로 멀리, 깊게 본다.

그는 옛날의 궁충이 아니다.

귀무살 부대주 네 명은 자신들이 악불사왕의 후인이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악불사왕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부단히 무공을 갈고 닦았다.

궁충은 궁마가 되어야 했다.

활을 쏘면 천둥소리가 울리면서 반드시 한 생명이 끊어지는 뇌공일사를 터득해야 한다.

오직 그 한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뇌공일사 궁마를 능가한다. 궁마는 인간이지만 궁충은 스스로 혈마가 되었다.

악불사왕이 떠받들어 모시던 주인, 혈마가 되었다.

물론 귀무살 부대주 시절에 흠모하던 혈마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버렸다.

혈마는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호발귀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정신을 잃고 온 세상을 피로 물들일 것이다.

물론 그 전에 호발귀에게 죽임을 당하겠지만…… 호발귀가 손을 쓰지 않아도 혈마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이백 년 전에는 혈마가 무적이었지만 지금은 종이호랑이다.

혈마가 되기 전이면 여전히 무적이지만, 혈마로 변하고 나면 단숨에 나가떨어진다.

혈마 수련 장소를 찾는 일은 이제 궁충 자기 일이 되어버렸다.

파앗!

궁충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궁충의 안력은 이백 장 밖을 꿰뚫으며, 그의 화살은 이백 장 밖에 있는 목표를 관통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목표를 볼 수 있으니 꿰뚫을 수 있지 않은가.

‘없어!’

마땅히 머물 만한 장소가 없다.

‘이렇게 되면 난감한데……’

궁충은 이령 주위를 이 잡듯이 뒤졌다. 하지만 혈마가 머물만한 장소는 없었다.

쉬이익! 쉬익!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작은 동굴을 발견하긴 했습니다만, 수련하기에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남쪽도 마찬가집니다. 작은 동굴은 꽤 많은데 너무 작아서 겨우 늑대굴 정도에 불과하고,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수련할 만한 장소는 찾지 못했습니다.”

“으음!”

궁충은 침음했다.

은밀한 장소가 언제 필요할지 알지 못한다. 혈마가 농익을 때라고 했으니까, 한 달 이상 걸릴 수도 있고 어쩌면 내일 당장 필요할지도 모른다.

최대한 빨리 정해야 한다.

“피곤하냐?”

“아닙니다.”

“그럼 다시 한번 뒤져보자. 숨겨진 동굴이 있나 살펴봐. 정 못 찾으면 직접 굴을 팔만한 곳이 있나 보고. 우리는 굴 파는 재주가 없으니까 약간 손보는 선에서 그쳐야 할 거야. 한 시진 후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넷!”

네 명이 대답하고 신형을 쏘아냈다.

궁충도 신형을 날렸다. 돌아가기 전에 이령 주위를 한 번 더 뒤져볼 생각이다.

‘마땅한 장소가 있어야 하는데……’

동굴은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절곡은 찾아냈다. 호로병 형태의 절곡은 아니지만, 안쪽이 절벽으로 막혀 있어서 막다른 계곡인 것은 분명하다.

“삼면이 바위로 둘러쳐져 있어서 위로 솟구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혈마라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여기보다 좋은 곳은 찾지 못했습니다.”

궁충이 보고했다.

“여긴 너무 약한데? 이 정도면 뭐 벽호공만 잘 써도 올라갈 것 같잖아.”

해자수가 안쪽 절벽을 쳐다보며 말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도 아니고 손으로 짚고 올라갈 곳이 많다.

그저 가파른 큰 바위가 막아섰다고 보면 되는데…… 무인이 아니라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이 정도면 됐어요.”

등여산은 만족해했다.

“너무 약하지 않을까요? 이곳에 있을 사람이 혈마이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쉽게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귀검도 불안한 듯 말했다.

“우선 혈마로 변하면 죽일 생각만 하지 도주할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리고 도주한다고 해도 호발귀가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바로 옆에 있을 테니까.”

“아! 그렇겠네요.”

“설혹 도주한다고 해도 절곡은 벗어나지 못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도주한다고 해도 절곡을 못 벗어나?”

해자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에 진을 설치할 거예요. 위쪽 삼면에는 천라금쇄진(天羅金鎖陣)을 설치해서 오르내리지 못하게 만들 거고, 입구 쪽에는 미령환혼진(迷靈還魂陣)을 쓸 거예요.”

“미, 미령환혼진! 그게 가능합니까?”

궁충이 놀라서 물었다.

미령환혼진은 일종의 미혼진 성격이 강하다. 환영진으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다.

절곡 안으로 들어가고자 계속 걸으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밖으로 걸어 나오게 된다. 한 바퀴 빙 돌아서 다시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미혼진이다.

진을 설치하면 절벽 안쪽에 짙은 운무가 어린다.

습기를 가둬놓아서 엷게 퍼트린다. 바람이 통하지 않고 습기가 늘 머물다 보니 운무가 피어난다.

절곡 안에 무엇이 있는지 한 치 앞도 안 보인다.

미령환혼진은 말할 필요도 없이 상고 절진이다.

설치하기가 너무 난해해서 전승자가 없는 절진이다.

이미 단맥된 상태로 절진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등여산이 가볍게 툭 던진 미령환혼진이라는 진법은 결코 쉽게 설치할 수 있는 절진이 아니었다.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진을 설치할 거예요. 도와주실 거죠?”

등여산이 궁충을 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싸우면 관은 공짜로 준다는 판수가 궁충을 대신해서 대답했다. 활짝 웃으면서.

귀무살과 등여산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관계다.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환히 웃을 줄 누가 알았겠나.

“진을 치시려면 필요한 게 많으실 텐데, 목록을 적어주시면 저녁 먹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궁충이 말했다.

“아니요. 내일부터 해요. 오늘은 여길 살펴보면서 더 좋은 진이 없는지 생각해볼게요. 진은 일단 설치하면 물리기 힘드니까, 미리 점검해야죠.”

등여산이 호로병 형태의 절곡을 보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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