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一章 소실무종(消失無蹤) [구름같이 사라지다] (3)
쉬이잇! 쉬익!
음문촌장은 급한 산비탈을 쾌속하게 쏘아갔다.
일자와 이자가 옆으로 바싹 따라붙었다. 그들 뒤로는 사자와 육자가 붙었다.
쒜에에엑!
다섯 명이 쾌적하게 질주한다.
원래는 은밀하게 잠입할 생각이었는데, 사자와 육자의 말을 듣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혈천방 사마가 산을 둘러싸고 포위해 온다. 혈마들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다.
그렇게 되면 음문촌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
모든 혈마가 혈천방주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다.
“호발귀, 이 새끼!”
이자가 이를 부득 갈았다.
이제는 삼자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분명해졌다. 호발귀다. 그 외에 달리 누가 있나.
“진중해라.”
음문촌장이 차게 말했다.
이자가 복수를 입에 담자, 당장 질책부터 했다.
촌장은 친자식이 살해당했는데도 자식에 대한 복수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삼자의 시신 앞에서는 당장 원수를 갚아줄 듯 으르렁거렸다.
실제로 복수도 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혈천방 시마’ 말을 듣고는 복수 따위는 싹 잊어버렸다.
“혈마 생포가 제일 순위다. 복수는 혈마를 잡고 난 후에 한다. 절대 잊지 마!”
확실히 삼자에 대한 복수심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혈마를 잡으면 어떻게 하죠?”
“일단 은밀한 곳에 숨겨놔야지. 혈마를 데리고 저놈들 포위망을 벗어나지는 못해.”
“그러면 우리는 싸움 한 복판에 있을 텐데……”
“뭐 어때? 혈천방과 호발귀의 싸움을 느긋하게 지켜보는 거지. 후후!”
음문촌장이 웃었다.
자신들이 이 산에 있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안 된다.
혈천방주를 만나면 허허 웃으면서 싸움 구경하러 왔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혈천방과 원수진 일도 없고.
쉬이이잇!
다섯 명은 순식간에 팔부능선에 올라섰다.
“화살이 왜 안 날아오지?”
일자가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사마들을 견제하느라고 정신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늘이 준 기회죠.”
이자가 말했다.
“맞아. 하늘이 준 기회. 이런 기회도 흔치 않지.”
음문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정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매우 매섭다. 산 끝자락만 밟아도 죽음의 시위가 날아온다.
어지간한 자는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도 듣지 못한다.
그 먼 거리를 날아오는데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화살에 꿰뚫리고 난 후에야 ‘꽈르르릉!’하는 우렛소리를 듣는다.
화살은 지독하게 빠르다.
귀무살 부대주 궁충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산으로 들어서는 모든 사람을 막아선다.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산으로 들어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다. 날아왔어도 진작 날아왔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는 귀검의 영역이야.”
촌장이 말했다.
궁충의 영역이자 귀검의 영역이다. 화살과 기습을 동시에 조심해야 한다.
“큰놈.”
“네.”
일자가 대답했다.
“귀검이 나타나면 네가 막아.”
“알겠습니다.”
일자가 대답했다.
촌장은 귀검을 일자에게 맡겼다. 하지만 일자는 귀검의 상대가 안 된다.
정면으로 붙으면 아마도 몇 순 돌지 않아서 승부가 결착 날 것이다.
목숨으로 버텨내라는 거다. 한마디로 말해서 죽으라는 명령이나 다름없다.
“가자!”
촌장이 먼저 신형을 쏘아내며 말했다.
쉬이잇! 쉿!
그들은 산비탈을 치달려 올라갔다. 순식간에 팔부능선을 지나 구부능선에 올라섰다.
이제 정상이 가까이 보인다.
그런데도 화살은 날아오지 않는다.
귀검도 없다. 귀무살도 보이지 않는다.
음문촌장은 발걸음을 멈췄다.
“함정인가?”
“함정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인기척을 못 느꼈습니다.”
“우리한테 감지될 놈들이 아니지. 귀를 써봐.”
촌장이 말했다.
일자가 즉시 땅에 귀를 대고 땅의 울림을 들었다.
지둔지동술(地遁地動術)이다.
원래는 땅속에 숨은 채로 땅 위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는 데 사용한다.
능히 십여 장 밖에서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도 낚아챈다.
대략 물 한 그릇 마실 시간이 흐른 후, 일자가 얼굴을 들었다.
“소리가 없는데요.”
“음! 귀무살은 암습에 달통한 놈들이야. 조심해서 움직인다. 분명히 이 새끼들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야.”
음문촌장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 놈들한테 당할 우리가 아닙니다.”
스릉!
이자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이자 역시 귀검을 상대하지 못한다. 기습을 취해오면 꼼짝없이 당한다.
다른 혈마도 상대하지 못한다. 그러니 발각되면 무조건 도주해야 한다.
검을 미리 뽑은 것은 그들과 마주쳤을 때를 대비한 것은 맞는데, 의미는 전혀 다르다.
검을 뽑을 기회조차 없을 것을 우려해서다. 결코, 저들을 베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꿀꺽!
음문촌장이 마른 침을 삼켰다.
계속 이대로 밀고 나가야 하나? 함정이 분명한데. 기척을 완전히 숨긴 채 숨어 있는 것 같은데.
‘이판사판! 가보는 거지 뭐.’
“가자!”
촌장이 신형을 날렸다.
“음!”
음문촌장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산은 텅 비었다. 호발귀가 없다. 당홍도 없고, 도천패나 해자수도 찾을 수 없다.
귀검도 없고, 귀무살도 없다. 산 정상에는 텅 빈 채 찬 바람만 분다.
이것들이 어디 숨었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주변을 샅샅이 살펴봐도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는 숨을 곳이 많지 않다.
“여기 동굴이 있습니다.”
일자가 호발귀가 머물던 동굴을 찾아냈다.
모두 일제히 신형을 쏘아내어 동굴로 들어섰다. 진기를 가득 끌어내어 기습에 대비하면서.
“싸움이 있었나?”
사자가 동굴을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동굴 안에는 격투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었다. 석벽이 이리 찍히고 저리 찍혔다.
폐허도 이런 폐허가 없다.
돌로 만든 단단한 동굴이지만, 지금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아서 깊이 들어갈 수가 없다.
“안으로 들어갔나?”
촌장이 동굴 안쪽을 주시하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건 무립니다.”
“나도 알아!”
촌장이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동굴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 동굴 벽에 도끼로 찍은 듯한 자국이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동굴 위쪽에서 돌가루가 후드득 떨어져 내리고 있다.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매우 위험해 보인다. 자칫 천정이 무너지면 완전히 생매장당한다.
아니다. 사실은 안으로 들어설 용기가 없다.
호발귀가 동굴 안으로 숨었다면…… 그리고 자신들이 쫓아간다면…… 즉시 싸워야 한다.
귀검이나 혈마와 진검 승부를 가려야 한다. 당연히 결과는 죽음이다.
그들은 동굴이 위험해서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과 같아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계획을 좀 바꿔야겠습니다. 창피한 일이지만 혈천방주에게 도움을 청하시죠.”
이자가 말했다.
“제길! 퉷!”
음문촌장이 사뭇 못마땅한 듯 가래침을 내뱉었다.
혈천방주가 내준 혈마를 놓쳤다. 그래서 찾으러 왔는데 이곳에는 아무도 없다.
혈천방주가 정상으로 올라오고 있으니 그에게 부탁하면 어떨까? 혈마를 잡아달라고.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다.
달리 혈마를 잡을 방도가 생각나지 않는다.
“제길!”
음문촌장이 투덜거리면서 동굴 밖으로 나갔다.
“다른 놈들은 저기서 기거했던 것 같은데요.”
육자가 말라버린 초옥을 보며 말했다.
나무와 풀을 모아서 얼기설기 만든 초옥이 보였다.
초옥이라기보다는 비바람만 막을 용도로 나무만 올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곳도 텅 비었다. 모두 떠났다.
도대체 어떻게 떠났을까?
사마는 인기척에 민감하다.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간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사마가 산을 포위하기 전에 혈천방의 경계망을 뚫고 탈출했거나 아니면 동굴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거나.
음문촌장은 후자라고 생각한다.
산 밑에는 아직도 혈천방 무인들이 둘러서 있다.
비록 도움은 안 되지만 경계망 역할은 단단히 한다. 그들을 죽이거나 제압한 후에 빠져나갈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빠져나가지는 못한다.
혈천방도는 아무 눈치도 채지 못했다.
사마가 산 전체를 둘러싼 채 거리를 좁혀오고 있는 게 바로 그 증거다.
누군가가 빠져나갔다면 저토록 태연하게 포위망을 만들어서 좁혀올 리 없지 않은가.
놈들은 저 동굴 안에 있다!
“이거 꼴이 우습게 됐군.”
음문촌장이 허탈하게 말했다.
텅텅!
혈천방주가 소북을 두들겼다.
그러자 사마 무리 속에서 두 명이 뛰쳐나와 동굴 안으로 스읏 뛰어들었다.
역시 혈천방주는 거침없이 사마를 쓴다.
동굴 안은 조용했다. 사마가 뛰어들었지만 어떤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사마는 위험을 예감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다.
직감으로 알아낸다. 동굴이 무너질 것 같아도, 기습을 받을 것 같아도 당장 행동한다.
일다경, 이다경…… 시간이 무심히 흘렀다.
거의 한 시진 정도 지났을 무렵, 흙으로 범벅이 된 사마가 동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원래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지만,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이라는 것쯤은 단박에 짐작할 수 있다.
없다! 놈들이 없다! 빠져나갔다!
혈천방주가 음문촌장을 쳐다봤다.
“촌장, 영 쓸모없네. 혈마까지 내줬더니 그걸 놓치고. 이래서야 어디 같이 손을 잡겠나.”
혈천방주가 거침없이 하대했다.
음문촌이 힘들었을 때도 존대를 하던 방주다.
더는 힘을 쓰지 못한다고 판단해도 한껏 예우를 해주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완전히 태도가 바뀌었다.
“실망이 크지만, 그래도 조상이 같으니 어떡하나? 같은 뿌리를 잘라내면 나만 아픈 법이니 놔주지. 음문촌으로 돌아가시지. 중원에 먼지 묻히지 말고.”
“방주, 기회를 주시면……”
음문촌장은 혈천방주의 모멸에도 불쾌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매우 당연한 질책을 받는다는 듯 태연히 말했다.
“음문촌이 더 할 게 없을 거 같은데?”
“제 여식이 저들 속에 있습니다.”
“이미 절연한 여식이지.”
“놈들이 어디 있는지만 알면 적어도 제 여식만은 끌어낼 수 있습니다. 잘하면 해자수까지.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혈마 두 명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말로는 뭘 못해. 진작 그러지 그랬어.”
“방주, 이번 일이 제 목숨을 걸죠.”
“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어차피 같은 뿌린데, 뭐 그럽시다. 그러면 내가 뭘 해드려야 하나?”
“놈들에 대한 정보만 주십시오.”
“그거면 되나?”
“지금까지 받던 예우는 필요 없습니다. 아예 없는 듯 쥐죽은 듯이 지내겠습니다. 저희는 놈들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면 그때 움직이도록 하죠.”
“그럼 나는 별로 손해 보는 게 없네? 그러지 뭐.”
혈천방주가 거침없이 말했다.
음문촌장은 방주의 모멸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힘의 우열이 명확히 갈렸다. 음문촌은 이제 혈천방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에 불과하다.
지금은 그렇다. 지금 당장은.
‘우선 놈들을 찾아야 해. 홀리를 찾기만 하면……’
음문촌장의 눈빛이 가늘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