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一章 소실무종(消失無蹤) [구름같이 사라지다] (1)
“이런 못난 놈!”
음문촌장이 혀를 찼다.
혈군이 되어서 혈마를 데리고 나왔어도 진작 나왔어야 할 사람이 영 무소식이다.
처음에는 당홍이라는 여자의 미색에 홀렸나 싶었다.
아무리 생각을 할 줄 모르는 영혼 없는 육신이라고 해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지 않나.
더욱이 당홍 정도 되는 미색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당홍의 살 냄새에 푹 파묻혀 있을 수 있다.
며칠간 즐겁게 지내라고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너무 소식이 없다.
“저항도 못 했네.”
동굴을 쓸어보던 이자가 중얼거렸다.
삼자의 무공은 힘을 바탕으로 한다.
똑같은 초식을 펼쳐도 세기(細技)를 중시하는 초식과 힘을 중시하는 초식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창출 해낸다.
홀리가 혈맥참을 펼치면 무척 빠르고 기괴한 검초가 펼쳐진다. 하지만 삼자가 펼치면 주변이 초토화된다.
사지육신을 갈가리 찢어발기겠다는 심산으로 검초를 펼쳐내기 때문에 웬만한 자는 기가 질려서 마주 서지도 못한다.
동굴은 깨끗하다.
삼자는 별다른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당했다는 거다.
아니,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당했다는 편이 훨씬 맞는 말일 것이다.
누가 삼자를 이렇게 죽일 수 있을까?
다른 때 같으면 눈을 까뒤집고 찾아도 찾을 수 없겠지만, 불행하게도 이 산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많다.
가장 의심이 되는 사람은 혈천방주다. 혈천방주가 혈마를 건네주었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회수해간 것인가? 삼자를 죽이고?
그럴 리가 없다. 그럴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혈마를 내주지도 않았다.
또 마음이 변했으면 그냥 혈마를 되돌려 달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음문촌은 혈천방을 막지 못한다. 혈천방주가 다시 달라고 하면 줄 수밖에 없다.
삼자가 이미 혈군이 되어버렸다면 어떨까? 그럴 경우에는 삼자까지 내줘야 한다.
이것이 혈천방의 힘이다.
혈천방주가 죽인 게 아니라면…… 그다음으로 의심되는 사람은 천살단 쪽이나 호발귀 쪽이 의심된다.
호발귀 쪽에서도 삼자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많다.
무공을 상당 부분 숨기고 있지만, 귀검의 지옥유부검도 삼자를 죽일 수 있는 검공이 틀림없다.
도천패나 해자수도 삼자를 죽일 수 있다.
원래 그들은 삼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던 미약한 존재들이었지만, 혈기를 움직이고 난 이후부터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삼자가 오히려 그들의 발끝도 쫓아가지 못한다.
더욱이 호발귀 쪽에서는 삼자를 죽일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당홍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봤다면, 겁탈당하는 모습을 봤다면 이런 식으로 죽는 게 당연하다.
호발귀 쪽에 걸렸나?
천살단도 혈마를 노린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사마를 만드는 방법이 있다. 귀색혼령대법을 막고 자신들만의 방법을 취하려고 할 것이다.
부득이, 급하게 귀색혼령대법을 막아야 했다면 살검을 떨쳐낼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삼자를 노리는 자가 많았다.
모두 제각각 발등이 불이 떨어진 상태라서 당홍에게는 신경을 쓰지 못할 줄 알았더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제가 쫓아가 보겠습니다.”
육자가 말했다.
“이놈이 죽었는데, 네놈인들 당할 것 같으냐?”
음문촌장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아야죠. 형의 복수나 혈마를 되찾는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삼자를 누가 죽였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당홍의 뒤만 쫓으면 된다.
당홍을 데리고 있는 자가 삼자를 죽였다. 천살단과 호발귀, 양쪽을 모두 뒤져야 한다.
“너희 둘은 천살단을 뒤져봐. 천살단주나 살단주를 만나면 싸움을 피하고. 다른 놈이 데리고 있으면 되찾아야 와. 원한을 갚는 것보다 혈마를 찾는 게 우선이다.”
음문촌장이 사자와 육자를 보며 말했다.
“어떤 놈인지 걸리기만 하면! 가자!”
사자가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사자는 늘 삼자와 붙어 다녔다. 그래서 싸움도 가장 많이 했지만, 정도 깊다.
쉬잇! 쉬이이잇!
사자와 육자가 바람처럼 신형을 날려서 사라졌다.
현재, 이 산에는 천살단주는 물론이고 살단주도 머물러 있다. 그밖에 어떤 무인들이 더 들어왔는지 모른다.
음문촌이라고 해도 상당히 주의해야 한다.
사자 곁에 육자를 딸려 보낸 게 그런 이유에서다.
사자는 천방지축 앞뒤 가리지 않지만, 육자는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한다.
“너희는 나와 같이 호발귀에게 간다.”
촌장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일자와 이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음문촌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이 산에는 우리를 잡을 수 있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일자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약자예요. 물러나야 합니다.”
“못난 놈! 여기서 물러나면 우린 비적밖에 안 돼!”
음문촌장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냥 비적으로 삽시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벌써 물러섰을 일자인데, 오늘은 계속해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음문촌은 중원을 오시하는 무공을 가졌다. 중원 무림쯤은 언제든 휘어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혈천방과 천살단은 무시하지 못할 집단이지만, 그래도 자신 있다.
혈맥참을 한층 발전시켜서 산맥검법으로 만들어냈다.
하지만 혈천방과 천살단의 힘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사마 같은 것이 없어도 상관없다. 방주와 단주의 무공만 해도 결코 산맥검법이 뒤지지 않는다.
아니, 훨씬 능가한다. 음문촌이 합공을 펼쳐도 그들을 눕힐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이백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음문촌은 쇠락했다. 아니다. 음문촌이 쇠락한 것이 아니다.
음문촌은 제자리를 지켰다. 혈천방과 천살단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조직이 가진 힘을 십분 활용했고, 강해질 수 있는 부분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그런 사실을 음문촌은 까마득히 몰랐다.
아예 중원에 눈과 귀를 닫고 산 것이나 마찬가지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형님도 참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비적처럼 살자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이자가 입가에 비웃음을 매달며 말했다.
“가시죠.”
이자는 오히려 촌장을 재촉했다.
“어찌 하나같이 믿을 놈이 없어. 쯧!”
음문촌장이 혀를 차며 신형을 쏘아냈다.
일자는 앞서서 달리는 아버지를 쫓아서 같이 신형을 쏘아냈다. 반대는 했지만, 행동은 같이한다.
삼자는 아무래도 호발귀 쪽에서 죽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들을 찾으러 간다. 하지만 촌장은 혼자서 움직이지 못한다.
두 자식을 동반해야만 간신히 탐색이라도 할 수 있다.
혼자서는 산에 올라가지 못하니 자식들과 함께 가는 것이다.
이런 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설혹 당홍이 호발귀 옆에 있다 한들, 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쫓아가서 죽일까? 호발귀를 죽이고 당홍을 찾아와?
어림없다. 지금은 아무런 방도가 없다.
결국, 혈마를 빼앗아오려면 꾀를 써야 한다.
일자는 이런 게 싫었다. 당당하게 검으로 밀고 들어가지 못할 바에는 음문촌으로 돌아가는 게 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된다.
쉬잇! 쉬이이잇!
촌장과 이자가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뒤쫓아오는 일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쉬익! 쉬이이익!
사자와 육자는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삼자는 죽은 지 오래되었다. 시반(屍斑)으로 보면 이삼일은 지난 것 같다.
혈마를 가로챈 자는 이미 멀리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를 쫓아가려면 바삐 서둘러야 한다.
다른 쪽은 일체 염두에 두지 않는다. 오직 천살단만 염두에 두고 쫓는다.
“이 새끼들! 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간다!”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형님 손에 죽을 자들이 아닙니다. ”
육자가 싸늘하게 말했다.
“네 놈은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냐! 에잇! 정내미 떨어져. 계집처럼 반지르르한 생김새도 그렇고.”
“얼굴 반지르르하기로야 나보다도 이자 형님이 더 낫지.”
“아니야. 네가 더 나아. 넌 귀여운 면이라도 있지. 이자 형은…… 으!”
사자가 치를 떨었다.
이자는 영준하다. 상당한 미남자다 키도 크다. 몸도 딱 균형 잡혀 있다. 흠을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는 미공자다.
하지만 차다. 심성이 너무 차서 그의 옆에 있으면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응!”
갑자기 육자가 달리던 걸음을 멈췄다.
“왜?”
육자가 급히 사자의 옷깃을 낚아채서 숲으로 몸을 숨겼다.
“왜 그래?”
사자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육자가 손을 들어서 앞을 가리켰다.
“뭐야 저건?”
그제야 사자가 일단의 무리를 발견해냈다.
상당히 많은 사람이 실혼인처럼 두 팔을 축 늘어트린 채 휘적휘적 걸어왔다.
“사마? 사마 맞지? 뭐야? 저거 왜 이렇게 많아?”
사자가 눈을 끔뻑거렸다.
혈천방의 사마는 이미 본 적이 있다. 그들은 혈마와도 대등하게 싸웠다. 한 명이면 지지만 두 명이면 이길 정도다.
세 명, 네 명이 달라붙으면 필승이다.
사마는 그만큼 강하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풍경은…… 사마가 무려 백여 명이나 움직이고 있다. 정확히 헤아리지 않았지만, 얼추 봐도 백 명은 훌쩍 넘어 보인다.
그들이 휘적휘적 걸어온다.
“보아하니 혈천방주…… 이 산에서 아예 끝장낼 모양이네.”
사자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삼자를 죽인 자는 확실히 혈천방은 아니다. 사마가 저렇게 많다면 또 다른 혈마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럴 생각으로 사마를 끌어냈다.
혈천방주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당홍을 내주었다.
그녀를 왜 내주었을까? 음문촌에서 그녀를 조종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인가?
그래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다.
음문촌이 당홍을 조정할 수 있다면 그 조정 기술을 뽑아 먹을 수가 있다. 그러니 좋다.
음문촌이 당홍을 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녀를 망가뜨려도 상관없다. 대여섯 명이나 되는 혈마 중의 한 명을 잃어버렸을 뿐이다.
이 산에는 당홍과 버금가는 혈마가 많이 있다.
혈천방주는 그들을 잡을 생각이다. 인간을 사마로 만들었듯이 혈마를 잡아서 혈천방의 방식대로 사마를 만들 생각이다.
이것 역시 되어도 좋고 안 되어도 좋다. 혈마를 사마로 만드는 데 성공하면 혈천방주는 원하는 최상의 것을 얻게 된다.
인간이 혈기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 시작부터 끝까지 시간을 두고 차분히 연구할 수 있다.
만약 사마를 만드는 데 실패하면 혈마는 죽게 된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이후 혈천방은 천하를 독패할 것이다.
천살단은 사마를 상대할 힘이 없다. 천살단주와 살단주가 사마를 누를 수 있지만, 살단주의 무공은 한계가 있고 천살단주는 글쎄…… 손 하나로 백 개의 손을 감당할 수가 있을까?
그렇다면 삼자를 죽인 자는 정말 천살단인가?
“갑시다. 저쪽으로 빠져나가면 될 것 같아.”
육자가 말했다.
“제길! 이제는 저런 놈들까지 피해 다녀야 하나?”
사자가 못마땅한 듯 중얼거리면서 신형을 날렸다.
“이상한데?”
육자가 중얼거렸다.
“뭐가?”
“천살단 무인들이 보이지 않아. 이 정도 왔으면 누군가는 보여야 하는데……”
“정말 그러네?”
사자가 눈을 부릅뜨고 사위를 살폈다.
산 전체에 쫙 깔려 있어야 할 살단 무인들이 일절 보이지 않는다.
완전히 철수했나? 그럴 리 없다. 호발귀가 눈앞에 있는데 완전히 철수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들이 당홍을 잡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혈마 한 명으로 만족할 리 없다.
설혹 만족한다 쳐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남아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이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이렇게 되면 천살단으로 직접 쳐들어가는 수밖에 없잖아?”
“그건 아닐 겁니다.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만 당홍에게 눈길이 팔려서 까맣게 모르고 있었네요.”
“이것들이 정말!”
사자가 시근덕거렸다.
살단 무인들이 일절 보이지 않으니 그들을 쫓아가려면 천살단 본단으로 찾아가야 한다.
본단에 침투해서 당홍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해야 한다.
“어떻게 할래?”
사자가 물었다.
“천살단 본단으로 가는 것은 나중에 가도 늦지 않아요. 일단 아버님께 현 상황을 보고해야겠어요.”
“그래. 그게 맞는 것 같다.”
“아버님은 호발귀를 쫓아갔을 테니…… 돌아가죠?”
“그래.”
사자는 무조건 육자 말을 쫓았다.
육자는 똑똑하고 야무지다. 무식하지 않다. 그래서 홀리와도 대화가 통했다.
쉬잇! 쉬이잇!
그들은 일제히 되돌아갔다. 산 정상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