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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450화 (450/500)

第九十章 일촌간극(一村間隙) (5)

타탁! 탁! 탁!

동굴 밖에 소낙비가 퍼부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물줄기가 거세게 쏟아진다. 동굴 너머가 비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후우욱!”

주치균은 동굴 안에 굴러다니는 마른 가지를 모아서 불을 피웠다.

옷을 말릴 정도로 화력이 세지는 않지만, 동굴 안에 퍼진 눅눅한 습기는 밀어내준다.

화라락!

마른 가지에 불이 붙었다.

주치균은 편하게 드러누워서 한없이 쏟아지는 소낙비를 쳐다봤다.

‘웃기네.’

문득, 모든 게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비가 피를 씻어내고 있다. 피가 내가 되어서 줄줄 흘러내렸는데, 한순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씻어버린다.

가랑비 정도만 되어도 씻을 수 없는데, 알아서 맞추기라도 한 듯 소낙비가 떨어지고 있다.

이 산에서 전쟁 못지않은 살육이 이루어졌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모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사람은 없다. 이쪽이고 저쪽이고 죽이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정말 처절한 싸움이다.

그런데 묘한 것이…… 죽은 자들 대부분은 영문도 알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왜 죽었나?

죽은 자 중에서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맞다. 죽은 사람들은 죽는 이유를 전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주치균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자신이 여기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천살단 검벽 검주였으며, 살단 단주인 자신이 왜 한없이 궁핍한 곳에서 청승맞게 쏟아지는 비나 쳐다보고 있어야 했나?

누가 이런 물음을 던지면 당장 할 말은 있다.

혈마를 죽이기 위해서!

맞나? 정말 혈마를 죽이기 위해서 이곳에 있는 것인가? 혈마가 세상을 피로 물들이는 마인이라서?

미안하지만 틀린 말이다.

천살단주도 혈천방주도 혈마를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을 혈마를 생포하는 게 목적이었다. 죽일 기회가 있어도 죽이지 않았다.

등여산이 그래서 살았다.

홀리도 죽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자신이 여기 있는 정확한 이유는 혈마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혈마를 생포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혈마를 죽이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이해하겠는데, 저들을 잡아서 무엇에 쓰려고 하나?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혈천방이 만들어 낸 사마만 봐도 알 수 있다.

천살단도 사마를 만들어 냈으니, 혈마 같은 자를 만들고 싶은 것일 거다.

그런데…… 이것도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혈마를 잡아야 하는 진짜 이유가 뭘까?

그 내막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까지 누린 권력을 종이 쪼가리처럼 던져버렸다.

천살단 천주가 천주 자리를 훌훌 던져버리고 떠나갔다.

이제 천살단을 떠나서 야인으로 살겠다는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는 천살단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혈천방주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이곳에 던져버리고 있다.

사마, 얼마나 가공할 무위인가.

사마를 잡으려면 무령환살공이나 사령천공이 필요하다. 다른 무공은 옷자락도 건드리지 못한다.

우습지만 살단 무인들이나 귀무살은 설 자리를 잃었다.

혈천방주는 그런 사마를 소모품처럼 던져버리고 있다.

혈천방주는 진작에 혈천방과 천살단의 균형을 무너트릴 수 있었다. 사마 두세 명만 무림에 풀어놨어도 천살단은 힘을 쓰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

아니, 무령환살공이나 사령천공의 등장이 더 빨라졌으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천살단 천주라는 자리가 그렇게 쉽게 버려질 자리든가. 하지만 손톱만 한 미련도 없이 과감하게 내던졌다.

사마를 장난감처럼 쓰다가 버릴 인간이던가. 그런데 던지고 있다.

마치 우리에 갇힌 호랑이에게 먹이로 주듯이 던진다. 사마를 돼지나 닭으로 여긴다.

‘뭐냐? 혈마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대단한 것이 있긴 있는 모양인데. 단주, 당신 도대체 뭐야? 뭔데 이렇게까지 한 거지? 혈천방주는 혈천방이 무너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투이고.’

주치균은 천살단주를 떠올렸다.

천살단주는 평생 정의를 벗어나서 산 적이 없는 분이다.

정의의 표상이다. 그런 분이 혈마 앞에서는 혈천방주와 같은 행보를 취하고 있다.

마치 혈마라는 보물을 놓고 두 사람이 서로 갖겠다고 싸우는 것과 같다.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혈천방주다.

사마를 죽이면서까지 잡은 혈마를 기꺼이 음문촌에 던져버렸다.

죽을힘을 다해서 잡은 혈마를 소용없어진 물건처럼 옆에 있는 사람에게 쓱 줘버렸다.

이것은 무슨 행동인가?

쏴아아아! 쏴아아!

소나기가 거칠게 쏟아졌다.

‘여기서 물러나면 평생 천주 심부름이나 하면서 살게 될 거야.’

주치균은 눈을 감았다.

혈마에게 어떤 비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뿐인 인생인데, 남에게 질질 끌려다니다가 끝난다.

‘여산……’

꼭 감은 눈에 등여산이 보였다.

‘고작 그런 모습을 보여주려고……’

등여산은 혈마가 되었다. 미친 여자가 되어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검을 휘둘렀다.

입에서는 고운 음성 대신 돼지 멱따는 것 같은 괴성을 쏟아냈다.

호발귀가 좋다고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훌훌 떠나간 여자가 기껏 그런 모습이 되어서 떠돌고 있다.

‘그러게 마인 곁에는 서는 게 아니라니까.’

주치균이 산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이유 중의 하나가 등여산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목숨만은 자신이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죽을 때 회광반조(回光返照) 현상을 일으킨다는데……

등여산도 죽는 순간에는 제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까?

문제는 무령환살공을 펼칠 기회가 몇 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치균 자신도 자신이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무령환살공은 마공이다. 위력이 패도적이라서 마공으로 분류된 것이 아니다. 시전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공부이기 때문에 마공이 되었다.

무령환살공은 육신을 갉아 먹는다.

진기를 사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오장육부까지 마구 긁어버린다.

주치균은 솟구치는 각혈을 진기로 억누르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아서 어디가 손상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속이 아주 심하게 망가졌다.

무령환살공은 자신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상대를 죽이는 데만 초점을 맞춘 무공이다.

힘없는 자가 단시간에 상승 무공을 얻어서 복수하기에 딱 맞는 공부다.

무령환살공을 몇 번이나 더 펼칠 수 있을까?

한 번이나 두 번? 가장 희망적으로 봐도 세 번이면 끝이다. 그 안에 틀림없이 죽음이 찾아온다.

‘응?’

생각에 잠겨 있던 주치균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사박! 사박!

동굴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짧은 보폭이며, 땅을 딛는 가벼움까지…… 여인이다.

기척을 숨길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발걸음 소리를 전혀 죽이지 않는다.

소낙비가 우산을 때리고 흘러내리는 소리가 너무 명확해서 숨길 수도 없지만.

여인은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피할 생각인지 훌쩍 건너뛰기도 했다.

‘누구?’

이 산에서 여인이라면 세 명뿐이다.

등여산, 홀리, 당홍…… 모두 산 위에 있는 혈마들이다. 그중 한 명인가?

누구라도 상관없다.

‘후우웁!’

주치균은 차분하게 진기를 가다듬었다.

자신이 찾아가도 모자랄 판인데 본인 스스로 와주니 더없이 고맙기만하다.

‘이번에 이걸 또 사용하면…… 후후! 형편없이 망가지겠군. 이제 천살단에는 돌아가지 못해. 나도 이 산에 뼈를 묻을 운명인가? 후후! 어쩔 수 없지.’

주치균은 파신금령술과 무령환살공을 떠올렸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혈마를 생포할 수 있다. 또는 단박에 죽일 수도 있다.

저들은 이미 초절정 고수가 되었다.

그런 판단이 드는 순간, 주치균은 살단 무인을 모두 돌려보냈다.

저들은 이미 인간이 창안한 무공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괴물이 되었다.

천살단이 가진 어떤 무공으로도 혈마를 상대할 수는 없다. 정공(正功)으로는.

살단 무인들이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한낱 귀무살에게 펑펑 나가떨어진다..

궁충은 귀무살 내에서는 상당히 알려진 자이지만, 천살단 입장에서는 똑같은 귀무살일 뿐이다.

다른 귀무살보다 조금 더 강하지만 귀검과는 비교하지 못한다.

살단 무인들이 그런 자가 날린 화살에 나가떨어진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소리 없이 날아와 틀어박히는 화살을 피할 방도가 없다.

궁충이 날린 화살을 빠르고 강하다. 화살이 허공을 찢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어떤 신법으로도 피하지 못한다. ‘엇!’하는 순간에 쓰러진다.

궁충의 화살은 백발백중이다.

산을 기어오르려고 조금만 고개를 내밀어도 여지없이 화살이 날아온다.

“적어도 백 장 밖에서 날린 화살입니다.”

눈이 밝은 무인이 죽어가는 동료를 보며 한 말이다.

이즈음에서 살단 무인들은 이미 먹이사슬 중 최하위층으로 떨어졌다.

적을 건드리기는커녕 모습만 드러내도 사냥당하는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 수하들을 옆에 두고 있어 봤자 희생만 늘어날 뿐이다.

그래서 모두 돌려보냈다. 앞으로 혈마가 개입된 사건에는 절대로 나서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주치균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게는 네놈들을 상대할 방법이 있어. 나도 먹이로 보면 곤란해. 후후!’

주치균은 무령환살공을 떠올리며 동굴 밖으로 쏘아봤다.

스읏!

여인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원주님!”

주치균은 긴장이 탁 풀렸다.

동굴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천원주 주당염이다.

주치균이나 등여산에게는 늘 누이처럼 자상하게 대해주던 몇 안 되는 친인이다.

“여기는 어쩐 일로?”

주치균이 벌떡 일어나 포권을 취하며 물었다.

“원주라니? 말 못 들었어? 이제 천주가 됐는데.”

“아!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천주님.”

“고마워.”

주당염이 싱긋 웃었다.

“그런데 여기서 뭐해? 우리 천살단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냐? 살단 단주라면 이런 곳에서도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는데. 푹신한 침상이라도 가져오라고 할까?”

“어쩐 일이십니까?”

주치균이 공손하게 말했다.

천원주 주당염은 누구에게든 무시 받을 사람이 아니다.

주당염은 천살단에서도 오로지 정(正)만 생각하는 진찌 정인(正人)이다.

“여기서 궁상떨지 말고 가자.”

천원주가 동굴을 휘 둘러보고는 돌아섰다.

“단주님, 저는……”

“천살단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야. 책사가 여기 있는데, 가자고 한다고 가겠어? 너와 책사, 둘 중 한 명은 죽어야 하는 운명인 것 같아. 너, 마음 접을 수는 없지?”

“진작 접었습니다. 그런 여자 따위는……”

“그런 말 하면 마음이 풀려? 사내들이란 참…… 단주. 나 같으면 그냥 놔주겠는데. 그게 안 될까?”

“하하하! 저를 잘 모르시네요. 제가 책사를 좋아한 적은 있지만, 지금은 말끔히 잊었습니다. 이미 남의 여자 아닙니까? 널 너무 순진하게 보시네요.”

“혈마가 됐잖아.”

“……”

“단주가 좋아했던 여자가 혈마가 되어서 날뛰잖아. 단주, 그런다고 책사가 단주에게 돌아서지 않아. 단주가 할 수 있는 일은 책사를 죽이는 일뿐이야. 그런데…… 그런 일을 할 사람은 많지 않나? 굳이 직접 할 필요는 없잖아?”

“여기 있겠습니다.”

“호발귀는 뭐해?”

천원주가 동굴 밖을 쳐다보며 물었다.

“……”

주치균은 대답하지 못했다.

살단 무인들을 돌려보낸 후, 주치균의 눈과 귀는 꽉 막혔다.

호발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가장 기본적인 물음인데도 대답하지 못한다.

그는 혈천방이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굴에 틀어박혀서 꼼짝하지 않는다.

분명히 좋지 않은 상황일 것 같은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동굴을 지키는 사람들이 너무 태연하다. 그들은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대답할 말이 있다면 이것이 전부다.

“일단 가자. 가서 따끈하게 덮인 술로 피로 좀 풀어. 책사를 죽이더라도 지금 상태로는…… 그렇잖아? 기왕이면 진심이 담긴 검을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천원주가 주치균을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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