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章 일촌간극(一村間隙) (4)
째앵! 까앙! 깡!
귀검의 검초가 서서히 빠르게 변했다.
조금씩 검을 빨리 쓰는가 싶더니 어느새 매초마다 홀리를 핍박하고 있다.
홀리는 처음부터 생기 무공을 사용했다.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가장 빠른 시간에 혈마가 되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또 생기 무공을 사용하지 않으면 귀검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혈맥참은 결코 지옥유부검을 상대하지 못한다.
스읏!
귀검의 신형이 사라졌다. 드디어 지옥유부검의 실체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홀리는 당황하지 않았다.
아직 혈마로 변한 것은 아니다. 지금은 생기 무공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도 귀검이 어디 있는지 그가 움직이자마자 즉각 알아챘다.
두 발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두 발을 단단히 잡고 있던 땅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몸뚱이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어딘지 모를 곳으로 퉁겨지듯 던져졌다.
귀검이 있는 곳이다.
쒜에에엑!
홀리는 생기가 이끄는 대로 검을 쳐냈다.
혈마가 되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껏 쳐냈다. 항상 혈마가 되는 것이 두려웠는데 그런 두려움 없이 마음껏 검을 쳐내니 오히려 상쾌하기까지 하다.
차앙! 창!
검과 검이 부딪혔다.
귀검은 홀리의 생기 공격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귀검의 검은 살단 단주 오택골을 죽인 절대 검이다. 불사신공을 깨트린 검이다.
생기 무공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절대 검과 절대 혈기가 만나니 작은 불똥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킥킥!”
어느 순간부터 홀리가 괴소를 흘리기 시작했다.
마음껏 혈기를 뿜어낸 탓일까? 보통 반 시진 넘게 드잡이질을 벌어야 혈마가 되는데, 홀리는 겨우 일다경을 조금 넘긴 시점에서 괴소를 쏟아냈다.
“해?”
등여산이 호발귀를 쳐다보며 물었다.
“음. 외운 대로.”
호발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탄 미심 초로차 하소 비고하나……”
등여산이 잔잔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구혼음소를 읊었다.
음성에 생기를 담아서 홀리의 귀에 송곳처럼 꽂히게 했다.
공기가 진동하고, 진파가 물결처럼 번져나가서 홀리를 두들겼다. 몸통 전체를 북처럼 두들겼다.
순간, 홀리의 안색이 급격하게 평온해졌다.
“아! 이거 효과가 있네.”
“그러게.”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구혼음소를 외울 때는 이게 정말 혈마에게 통할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음문촌의 귀색혼령대법에는 동원하는 것이 많다. 무엇보다도 뿌옇게 번지는 귀색무는 단연 압권이다.
귀색무에 중독되면 구혼음소가 아니더라도 쓰러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호발귀가 알려준 진결은 단지 노랫가락 같은 음률일 뿐이다.
이같이 주문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
구혼음소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음문촌의 구혼음소를 봤기 때문에 작은 중얼거림에도 절대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는 점은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런데도 무공을 익히는 것과는 다르지 않나. 단지 머리로 외우고 입으로 중얼거리는 주문일 뿐이다.
자신도 모르게 경시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홀리의 모습을 보니 구혼음소가 가히 절대적인 주문처럼 보였다.
“퉁밴 미차 야우 통밴 헤다이……”
쒜에에엑! 쒜엑! 쒝!
등여산의 주문에 맞춰서 홀리가 춤을 춘다. 아주 부드럽게 생기 무공을 이어간다.
호발귀가 등여산에게 다가가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등여산이 호발귀를 힐끔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구혼음소를 중단했다.
구혼음소가 효과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러면 구혼음소의 지속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어느 정도나 혈마를 평온한 상태로 잡아놓을 수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 진행할 수 없다.
귀검이 비록 절대 검을 지니고 있어서 혈마 공격을 버텨내지만, 곧 진기가 바닥날 것이다.
그러면 정작 때가 왔을 때, 지옥유부공을 펼치지 못한다.
마지막 암수, 혈마자심을 펼칠 수 있는 기력은 남겨놔야 한다.
쒜에엑! 까앙! 까아아앙!
접전이 일어나고, 귀검이 뒤로 주춤 물러섰다.
생기 무공과 접전을 벌인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귀검은 전력을 다하는데도 밀린다. 조금만 더 밀리면 혈마자심을 펼칠 기회도 얻지 못한다.
홀리가 이 정도까지 강하지는 않았는데, 동굴 수련을 통해서 부쩍 성장했다.
그러면 이쯤에서 귀검의 혈마자심이 혈마를 칠 수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쒜에엑! 쒜엑! 촤촤촤착!
홀리가 공격 속도를 빠르게 가져갔다.
홀리도 구혼음소가 중단된 이유를 안다.
그녀가 빨리 혈마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더 망설일 이유가 없다. 바로 혈마로 진입한다.
죽어라!
홀리는 정말로 귀검을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다.
까앙! 깡! 깡! 까아아앙! 깡!
검과 검이 부딪히기만 하면 순식간에 이십여 초가 교환되었다.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치는 홀리도 놀랍지만 그걸 받아내는 귀검도 놀랍기만 하다.
“야! 귀검이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도천패가 중얼거렸다.
“정말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천살단주와 붙어도 되겠어. 나는 천살단주가 제일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귀검, 다시 봤어. 대단해.”
해자수가 도천패의 말에 맞장구쳤다.
귀검은 천살단주나 혈천방주에 못지않을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혈마에게 꺾일 게 자명하다.
혈마의 혈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충천하는 반면 인간의 진기는 무력해진다.
사용하는 만큼 보완하지 못한다. 반면에 혈마는 숨을 들이쉴 때마다 우주 자연의 대기운을 마음껏 빨아들인다.
마르지 않는 샘과 쓰면 쓸수록 말라버리는 샘의 대결이다.
“후욱! 훅!”
귀검이 가쁜 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킥킥!”
홀리의 입에서도 괴성이 쏟아져 나왔다.
드디어 결전의 순간에 이르고 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아직도 정신을 놓지 않았겠지만……
홀리가 작심하고 혈마로 변신 중이다. 본인 스스로 혈기를 끌어낸다.
홀리는 마음을 완전히 풀어놓고 몸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혈기에 몸을 맡겼다.
검을 마음껏 쓰고 싶은 대로 쓴다.
쒜에에엑!
홀리가 허공에 뛰어올랐다가 득달같이 쏘아내렸다. 귀검을 반으로 쪼개겠다는 듯이 엄청난 기세로 몰아쳤다.
팟!
귀검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서 싹 사라졌다. 그리고는 다시 옆에서 툭 튀어나와 검초를 전개했다.
홀리가 가벼운 손짓만으로 검초를 밀어냈다.
귀검의 몸에 땀이 흥건하게 맺혔다. 소낙비에 맞은 것처럼 온몸이 흠뻑 젖어있다. 반면에 홀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쾌해지는지 펄펄 날뛰었다.
누가 봐도 승부는 명확하게 갈렸다.
여기서 반 시진만…… 아니다. 일다경만 더 시간을 끌어도 귀검이 패한다.
확실히 홀리의 혈기는 동굴 수련을 하기 전보다 훨씬 진해졌다.
이것이 전부 혈마 상태에 오래 머문 결과다. 등여산과 홀리는 진기의 길을 버리고 생기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실 진기의 길이니 생기의 길이니 하는 것은 없다.
진기를 사용하면 진기의 길인 것이고 생기를 사용하면 생기를 쓰는 무인인 것이다.
하지만 생기는 진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하고 신선하다. 녹슨 철검을 쓰던 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보검을 손에 쥐었다. 그러니 진기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진기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가짜 생기다. 진짜 생기를 쓸 줄 아는데 무엇 하러 가짜 생기를 쓰겠나.
까앙! 깡!
거센 격돌이 일어났다. 귀검이 비틀비틀 물러섰다.
“궁충.”
호발귀가 궁충을 불렀다.
“네.”
“활 좀 쏘지?”
“네.”
궁충이 즉시 활을 꺼내 화살을 재웠다. 그리고 기회를 엿봤다.
호발귀가 화살을 쏘라고 했지만, 싸움에 가담하라는 말은 아니다. 홀리가 더 빨리 혈마로 변할 수 있게끔 혈기의 전환점에서 타격하라는 소리다.
호발귀는 귀검이 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힘에 부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귀검도 손속에 사정을 남기고 있다. 홀리를 상처입히지 않으려고 애쓴다.
싸움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홀리가 혈마 초입으로 들어섰다.
쒜에에엑!
홀리가 허공으로 뛰쳐 올랐다. 순간,
쒜에엑! 쒜엑! 쒜에엑!
궁충이 연달아 화살 세 대를 날렸다.
“케에엑! 켁!”
홀리의 괴소를 흘렸다.
궁충의 화살에는 생기가 담겨 있다.
궁충은 아직 혈마에 이르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기분 좋은 상태에 생기를 사용한다. 진기가 순식간에 다섯 배, 여섯 배로 불어난 듯이 여겨질 것이다. 그러니 무공을 사용하는 매 순간이 즐겁기만 하다. 싸우는 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혈마는 날아오는 화살에서 진기를 읽지 않는다. 생기를 느낀다.
쉬잇! 까앙!
홀리는 검으로 화살을 쳐냈다. 동시에 귀검을 버리고 화살을 날린 궁충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왔다.
역시 진기보다는 생기에 더 빨리 반응한다.
이런 반응이 홀리를 더 깊은 혈기 속으로 침잠하게 만든다.
하지만 귀검이 홀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누가 놓아주겠나. 눈앞에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적을.
팟!
귀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라졌다가 느닷없이 검초를 펼쳐냈다.
지옥 유부에서 흘러나온 검이다.
홀리는 궁충에게 다가서려다가 멈칫거렸다. 아니, 즉시 귀검을 향해 돌아섰다. 끌리기는 생기가 더 끌리지만, 귀검의 공격은 절대 무시하지 못한다.
“켁켁켁켁켁!”
홀리가 괴성을 연신 토해냈다.
“귀검.”
호발귀가 조용히 귀검을 불렀다.
싸움이 긴박하게 벌어지고 있지만, 호발귀의 음성은 똑똑히 울려나 갔다.
홀리의 상태는 호발귀가 가장 정확히 안다.
호발귀는 홀리의 혈기를 세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심등은 자신의 혈기를 지켜보지만, 타인의 혈기도 보여준다. 홀리에게서 빛나는 푸른 빛이 어떤 식으로 변형되는지 즉각 알아낸다.
홀리가 혈마 초입을 벗어나 안으로 진입했다. 혈마가 되었다.
스읏!
귀검이 움직임을 멈췄다.
“키키키키키!”
혈마가 된 홀리는 괴성을 내지르며 귀검의 가슴을 향해 검초를 전개했다.
필살검 혈맥참이다.
순간, 귀검이 신형을 감췄다.
순간적으로 사오 보가량 옆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생기를 감춰버렸기 때문에 홀리의 눈에는 귀검이 보이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느낄 것이다.
예전 같으면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생명체를 찾기 위해서.
이번에는 달리 행동했다.
쒜에에엑!
홀리가 공격을 이어갔다.
검으로 귀검이 서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그 순간 귀검의 검이 조용히 다가와 홀리의 등에 틀어박혔다. 아니, 틀어박히는 듯이 보였다.
혈마자심이다!
홀리는 검을 쳐내려 가는 힘을 이용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빠르게 원을 그리며 휘돌기 시작했다.
귀검의 진기가 사라지자 공격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원래 귀검이 서 있던 곳을 중심으로 사방 사오 장의 거리를 벌리고 빠르게 휘돈다. 자신이 휘도는 원 안에 귀검이 있다고 확신하는 듯하다.
네가 언젠가는 숨을 쉬겠지. 숨 한 모금이면 진기가 흘러나와. 너를 잡을 수 있어.
홀리의 입가에 사악한 웃음이 어리는 듯했다.
아니다. 혈마는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다. 거의 잡을 뻔한 생명체를 놓쳐서 화가 나나?
그것은 인간의 감정이다. 혈마는 아무런 느낌도 갖지 않는다. 생명체를 놓친 데 대한 아쉬움이나 후회 또는 섭섭함이 전혀 없다.
있으면 죽이고, 없으면 마는 것이다. 이것이 혈마다. 방금까지 격렬하게 싸웠던 자가 사라졌다? 그러면 끝이다. 더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혈마는 매우 단순하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원을 그리면서 빙빙 돈다. 걸음을 멈추면 공격이 있다는 것을 몸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혈기는 몸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
“후후! 됐어.”
호발귀가 만족한 듯 웃었다.
이제 홀리는 그 누구와 싸워도 잡히지 않는다.
스으읏!
호발귀가 미끄러지듯 두 사람의 격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혈기가 드러나지 않게 전신을 심등으로 감싸고……
홀리가 그리는 원의 길목을 막고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홀리는 호발귀가 서 있는 줄도 모르고 빠르게 달려왔다.
스읏! 탁!
호발귀 손에서 삼마돌각수가 터졌다.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이 송곳처럼 오므라져서 지나가는 홀리의 백회혈을 툭 건드렸다.
순간, 홀리가 피식 쓰러졌다. 너무 싱겁게 쓰러졌다.
호발귀는 즉시 홀리 옆에 앉아서 진기접물 수법으로 혈기격타를 시작했다.
두 손에 혈기를 운집하고, 혈기로 혈기를 안무한다.
몸을 만지는 것도 아니고 진기를 만지는 것도 아니다. 뭉클거리는 혈기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휴우!”
홀리가 깊은숨을 토해냈다.
혈마에 잠겼다가 맑은 정신을 찾아서 다시 홀리로 돌아오는 과정이 너무 매끄럽다.
옛날처럼 힘들어하지 않는다.
호발귀는 이미 혈마가 나갈 방향을 찾아낸 듯하다.